제46회 정기산행(동구릉) 보고_05 목릉, 휘릉, 원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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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용,윤식 작성일07-09-23 17:21 조회1,498회 댓글3건본문
제46회 정기산행(동구릉) 보고_05 목릉, 휘릉, 원릉
왕릉과 능역 조성에 대해 건원릉까지는 비교적 상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대부분의 능은 기본적인 능제(陵制)가 동일하므로 목릉부터는 주요사항만 간추려 보고내용을 조금 줄이겠습니다.
■ 역대 왕릉 중 가장 섬약한 선조의 능, 목릉
건원릉을 보고 나자 시장기가 심해지면서 발걸음이 느려집니다. 목릉으로 건너가 홍살문을 지나서 잔디밭에 돗자리를 폅니다. 재만 현종 부인께서 미리 대구에서 떡을 여러 종류 준비해 오시고, 영식 등반대장께서 ‘특별한 차(茶)’를 마련하신 덕분에 맛난 점심을 먹었습니다.
점심을 들면서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용주 현종께서 토지 단위인 ‘결(結)’에 대해 진정임 선생께 질문하자 확실한 답변을 위해 어디론가 전화를 합니다. 그 대답이 맨 처음 개경사에서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점심을 먹고 일어나려니 은근히 더 앉아 있고 싶습니다. 햇볕이 너무 따가웠거든요.
목릉(穆陵)은 제14대 선조(宣祖 1552~1608년)와 의인왕후(懿仁王后 1555~1600년) 나주박씨 및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년) 연안김씨의 능입니다.
금천교를 건너 홍살문을 들어서면 정자각 뒤로 세 개의 언덕[岡]에 선조와 두 왕후의 능이 한 기씩 각각 떨어져 있습니다. 정자각 뒤로 세 언덕[岡]에 각각 모신 왕과 왕후의 능침이 보입니다. 그 중에서도 정자각 북쪽에 있는 선조와 의인왕후의 능은 동원이강(同原異岡) 형태이나, 계비 인목왕후의 능은 동쪽 산줄기에 치우쳐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능역(陵域)은 같으나, 줄기와 향배가 전혀 다른 동역이강(同域異岡) 형국이라고 합니다.
▲ 목릉 홍살문. 기단부를 8각으로 조성하였다. 참도가 각각 떨어져 있는 왕과 왕후의 능으로 길게 뻗어 있다.
▲ 정자각 뒤로 선조의 능이, 비각 뒤로 의인왕후의 능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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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릉 전경. 동쪽(사진 오른쪽)이 계비 인목왕후의 능이다.
1600년(선조 33) 의인왕후가 승하하자 현재의 자리에 모시고 유릉(裕陵)이라 했습니다. 8년 뒤 선조가 붕어하자 능을 건원릉 서쪽 5번째 언덕[岡]에 유좌묘향(酉坐卯向 정서에서 정동 방향)으로 모시고 숙릉(肅陵)이라 하였으나, ‘숙(肅)’자가 숙릉(淑陵)의 ‘숙(淑)’자와 음이 같아서 목릉(穆陵)으로 고쳤습니다.
▲ 의인왕후의 현궁과 주위 석물.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을 두르고, 앞을 상·중·하계의 3단으로 나누어 석물을 배치했다.
그 뒤 1630년에 능에 수기(水氣 물기)가 차고 불길하다는 원주목사 심명세의 상소로 유릉 서쪽 언덕에 임좌병향(壬坐丙向 서서북에서 남남동 방향)으로 천장하고, 두 능을 합해서 목릉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조의 현궁을 열어 보니 물기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당시 지관들로부터 ‘십전대길지(十全大吉地)’라는 극찬을 받았답니다. 이에 따라 훗날 헌종의 능인 경릉(景陵)을 모시게 됩니다.
선조의 천장에 이어 1632년에 인목왕후가 승하하자 선조의 능 동쪽에 조성하여 현재와 같은 세 능이 각기 다른 언덕[岡]에 자리잡았습니다. 능을 바라보고 왼쪽이 선조, 가운데가 의인왕후,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입니다.
▲ 인목왕후의 현궁과 주위 석물. 의인왕후의 석물 배치와 같다.
세 능이 시차를 두고 조성됨으로써 정자각은 의인왕후 앞에 세워졌다가 선조의 능이 천장되면서 선조의 능 앞으로 옮겨졌습니다. 뒤에 인목왕후의 능을 조성하게 되자 정자각을 옮기는 것이 번거롭다 하여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세워졌던 정자각은 헐리고 그 터만 남았습니다. 이것이 가정자각(假丁字閣)입니다. 현재의 정자각은 선조의 능 조성 시에 건립된 것입니다. 진정임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왕이 먼저 승하하고, 왕비가 뒤따르는 경우에는 정자각을 헐지 않고 각기 따로 짓는다고 합니다.
▲ 가정자각 터. 선조의 능이 천장되면서 의인왕후 능 앞에 지었던 정자각이 헐리고 터만 남았다.
목릉의 정자각이 선조의 능을 향해 있으면서 신도(神道)가 세 능으로 길게 뻗어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연이야 그렇지만, 현궁에 올라 반대편 능을 건너다보면 신도가 산기슭을 크게 휘어져 돌아가며 잔디밭 사이에 그리는 선(線)이 아름답기만 합니다.
▲ 현종의 능에서 내려다본 신도
▲ 선조대왕과 인의왕후 및 인목왕후의 능표
추석을 앞두고 짧게 깎은 잔디밭을 밟으며 제정(祭井)으로 향합니다. 발에 닿는 잔디 감촉이 좋네요. 다듬은 장대석을 사각형으로 쌓은 제정은 1보×1보 크기입니다. 무릎 깊이 정도에서 끊임없이 맑은 물이 샘솟습니다. 이 물로 임금께 제사를 올리는 제물을 마련하는 데 사용했답니다.
▲ 제정(祭井). 정자각 오른쪽에 있다.
▲ 제정 내부. 맑은 샘물이 끊임없이 솟고 있었다. 맹꽁이 한 마리가 늘 자리를 지킨다고 하는데 이 날은 보지 못했다.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16세에 왕위를 이은 선조는 방계(傍系) 왕족으로서는 처음 보위에 올랐답니다. 보위에 오른 선조는 초야에 묻혀 있는 선비들을 등용해 사림파가 정계 중심으로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동서분당으로 당쟁에 휘말리기 시작해 끝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전쟁을 겪으면서 참담하게도 의주까지 몽진한 임금이기도 합니다.
목릉의 석물들은 기본적으로 영릉의 제도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전쟁으로 국가 재정이 어려운 탓에 조각기법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문인석과 무인석 역시 몸집만 클 뿐, 비례가 맞지 않고 섬약한 느낌을 줍니다. 문·무인석은 숙종 때부터 사람의 키 정도로 작아졌다고 합니다. 대신 망주석 등의 장식이 화려해졌습니다. 장명등은 가운데 화사창(火舍窓 불발기창)이 유난히 작아졌으며, 겉으로는 ‘구(口)’자 형태이나 안에는 ‘아(亞)’자형입니다.
▲ 선조의 능침이 그리는 곡선을 밟으며 답사팀이 걷고 있다.
▲ 선조의 능침.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고석 4개로 받친 혼유석을 배치했다.
▲ 선조 능의 무인석. 높이 290cm이며, 얼굴이 큰 편이다.
▲ 문인석. 310cm로 크기는 장대하나 조각기법은 이전보다 떨어진다.
▲ 장명등. 전체적으로 조각기법이 떨어지나 하단에 새긴 무늬가 매우 섬세해 후대에 조성된 능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현궁과 주위 석물은 이전의 왕릉들과 같으며,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의 복두에 방위를 나타내는 짐승이 새겨져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현궁을 수호하는 돌짐승의 경우에 암수 구별이 되지 않도록 조성하는데, 석양(石羊)을 유심히 보면 암수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석양, 석마 등 돌짐승은 다리 사이를 막아 지초(芝草)를 새겼습니다.
▲ 석양(石羊)의 뒷모습. 잘 보면 암수 구별이 가능하다.
선조의 능보다 30년 전에 조성된 의인왕후의 능은 병풍석이 없고, 망주석에 다채로운 꽃무늬 장식을 새겼습니다. 특히 석양과 석마의 네 발을 드러나도록 한 점이 특징입니다. 영창대군의 어머니이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둘째 따님인 인목왕후의 능에 설치한 석양과 석마는 다리 사이가 막혀 있어 비교가 됩니다. 다만, 의인왕후의 능에서 나타나는 꽃무늬 장식은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그 이후 조성된 조선 후기 왕릉의 석물조형에서 중요한 장식요소로 정착되었다고 합니다.
▲ 의인왕후의 능. 선조의 능보다 30년 앞서 조성되었다.
▲ 재만 현종 가족
▲ 의인왕후 능침 후경
휘릉으로 건너가기 위해 돌아나오는 길에 다시 홍살문을 보았습니다. 홍살문 기단 아래쪽에 홈이 파여 있습니다. 진정임 선생은 약간 물기가 있어야 한다며 홈을 약간 경사지게 파기도 한다고 설명합니다. 슬그머니 손을 집어넣었더니 어느 분이 “뱀 나와요.” 하시더군요. 속으로 짐짓 겁났지만, 태연한 척 밀어넣었더니 정말 홈 안쪽이 약간 높게 경사져 있더군요. 옛 사람들이 이런 지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감탄스럽습니다.
■ 예송 논쟁의 주인공 장렬왕후, 휘릉
휘릉(徽陵)은 제16대 인조(仁祖)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년) 양주조씨의 능입니다. 휘릉에 들어서자 윤만 현종께서 참봉공(휘 亨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참봉공께서는 문온공(휘 구용)의 15대손으로 진사시에 급제해 휘릉 참봉을 역임하셨습니다. 이분의 손자(휘 學墨)는 보건사회부 차관,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한국뇌성마비협회장을 지내셨으며, 증손자가 ‘용의 눈물’ 등으로 잘 알려진 명감독 재형 현종을 비롯해 재휘, 재덕, 재연 현종으로 명문가를 이루었습니다. 그런 사연을 듣고 보니 휘릉이 더욱 가깝게 느껴집니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정자각 바로 앞까지 참도가 직선으로 이어지는데, 지대가 약간 경사져 중간에 단(階)을 하나 두었습니다. 참도는 정자각 앞에서 동쪽을 향해 90도로 꺾어져 돌계단[石階]으로 연결됩니다.
▲ 휘릉의 홍살문. 시선이 직선으로 정자각으로 이어진다. 홍살문 바로 앞 오른쪽에 판위가 있다.
정자각은 경사가 비교적 급하지 않은 뒤쪽의 산과 소나무들이 잘 어울려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앞서 보았던 정자각과 달리 왕릉을 향한 닫힌공간 쪽이 5칸(정면)×2칸(측면)이라 꽤 커 보입니다. 가운데 3칸은 벽과 분합문으로 막혀 있지만, 양쪽 익실(翼室)은 툭 트인 열린공간입니다.
▲ 정자각. 양쪽에 사방이 트인 익랑을 배치한 점이 특징이다.
정자각 동쪽에 수복방이 터만 남았는데, 그 위쪽에 사방 1칸의 자그마한 비각이 있습니다. 1747년에 세워진 비각 안의 비석에 ‘조선국 장렬왕후 휘릉(朝鮮國 莊烈王后 徽陵)’이라고 전서로 적혀 있습니다.
▲ 비각
▲ 장렬왕후 능표
▲ 능침에서 정자각을 바라본 장면
▲ 정자각과 능침
휘릉은 제18대 현종(顯宗 1641~1674년)과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년)의 능인 숭릉(崇陵)보다 5년 뒤에 조성돼 석물을 비롯한 능역 조성이 숭릉과 거의 비슷합니다.
조선의 왕릉은 광릉(光陵 세조의 능)을 기점으로 크게 변화했답니다. 1468년 9월 세조가 눈을 감으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능(陵)이나 원(園)에 석실(石室)과 사대석(莎臺石 병풍석)을 쓰지 말라.”는 유교(遺敎)를 남겼기 때문이랍니다. 이후 왕릉은 석실과 석관 대신 관과 광중(廣中) 사이를 석회로 다지는 회격(灰隔)으로 대신했답니다. 예종(睿宗) 때의 실록을 보면, 그에 관한 기록이 보입니다.
▲ 세조 유교에 대한 조선왕조실록 기록
건원릉 바로 서쪽에 유좌묘향(酉坐卯向 정서에서 정동 방향)으로 모신 휘릉은 세조의 유교를 따라 석실 대신에 회곽(灰槨)을 썼으며, 회격(灰隔) 바닥에 지회(地灰 하관하기 전에 관의 밑자리를 다지는 석회)를 깔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물론 병풍석도 없습니다.
15세에 인조의 계비로 책봉된 장렬왕후는 1638년(인조 16) 춘추 64세로 승하하기까지 인조에서부터 효종, 현종, 숙종에 이르는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무렵 조정에서는 장렬왕후의 상복(喪服)에 관한 예송(禮訟) 논쟁으로 서인(西人)과 남인(南人) 사이에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능과 마찬가지로 상·중·하계로 이루어졌는데, 곡장으로 둘러싸인 현궁은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습니다. 특히 건원릉의 경우에 병풍석 십이지신상 머리 부분에 새겨진 방위 표시가 휘릉에서는 난간석에 간단하게 12방위를 나타내는 글자로 약화되었습니다.
▲ 장렬왕후 능침 전경. 세조의 유교에 따라 석실(石室)과 석관 대신 회곽을 사용하였다.
현궁을 수호하는 돌호랑이와 돌양도 그리 크지 않은데, 돌양은 다리가 너무 짧아 배가 거의 바닥에 닿은 형태입니다. 하지만 혼유석은 건원릉과 마찬가지로 귀면을 새긴 5개의 고석으로 고였습니다. 예종 때 영릉(英陵 세종의 능)을 여주로 천장하면서부터 고석을 4개로 줄였는데, 휘릉은 다시 건원릉의 사례를 따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현궁 주위의 난간석과 석호 및 석양
중계와 하계의 문인석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데, 조형적인 면에서나 조각기법 면에서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닌 듯합니다. 무인석은 얼굴과 가슴이 바짝 붙어 있어 목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 전체적으로는 듬직한 무인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 장명등과 문·무인석 및 석마. 장명등의 무늬가 섬세하다.
▲ 장렬왕후 능침 후경
■ 넋은 홍릉에 가셨을까, 원릉
동구릉 유일의 쌍릉인 원릉은 제21대 영조(英祖 1694~1776년)와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년) 경주김씨의 능입니다.
▲ 원릉 전경. 쌍분으로 병풍석 없이 난간석을 둘렀다.
후사가 없이 병약했던 경종(景宗)의 왕세제(王世弟 왕위를 이어받을 왕의 아우)로 책봉되면서 영조는 목숨이 위협당할 정도로 붕당정치의 폐해를 실감했습니다. 1724년 즉위 이후 줄곧 탕평책을 시행하면서 균역법 등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노력한 것도 그 때문이라 합니다. 진정임 선생은 영조의 어머니는 ‘무수리’ 출신이라고 전해지나 당시 정황을 고려할 때 품계가 낮은 ‘상궁’ 출신이라는 학설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무려 52년간 재위에 있었던 조선조 최장수 임금인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에 얽힌 이야기를 비롯해 재위 기간 중의 치적 등이 널리 알려진 분이므로 자세한 소개는 생략합니다.
원래 영조는 원비 정성왕후(貞聖王后 1692~1757년) 달성서씨와 함께 묻히고 싶어했답니다. 정성왕후의 행장기(行狀記)를 보면, 정성왕후가 대궐에 들어와 43년간 살면서 늘 웃는 얼굴이었으며,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위를 지극정성으로 모신 것을 영조께서 고마워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그런 정성왕후가 영조 16년(1740년)에 소생 없이 승하하자 영조는 홍릉(弘陵 정성왕후의 능)을 조성하면서 그 오른쪽에 자신의 묏자리를 일찌감치 잡아놓았습니다. 쌍릉으로 나란히 묻히고 싶었던 것이죠. 이 때문에 홍릉은 곡장 안 왕의 자리(능 오른쪽)가 비어 있어 보는 이를 애틋하게 합니다.
▲ 서오릉에 있는 정성왕후의 홍릉
그러나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드님이신 정조는 동구릉의 현재 자리, 즉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줄기[岡]에 영조를 모셨습니다. 영조가 66세에 맞이한 정순왕후는 15세에 왕비에 올라 훗날 사도세자의 죽음에 빌미를 제공했으며, 자손 없이 1805년(순조 5)에 승하하여 영조 곁에 묻혔습니다.
사연은 애틋하건만, 정자각과 비각 너머의 쌍릉은 동구릉의 다른 능들과 달리 다정하게만 느껴집니다. 참도를 따라 정자각에 이르면 유난히 장대한 돌계단의 소맷돌이 눈에 띕니다. 측면에 소용돌이 구름무늬로 장식하고, 윗면 하단의 돌출장식에 태극무늬를 새겼습니다.
▲ 원릉 금천교. 공들여 다듬은 장대석으로 넓직하게 금천교를 놓았다. 별다른 장식을 가하지 않아 엄숙한 공간임을 암시한다.
▲ 금천과 금천교. 측면에도 장식이 없다
정자각 동쪽 비각에는 3기의 비석이 있습니다. 1776년에 세워진 첫 번째 비석은 정조(正祖)의 어필(御筆)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비석은 1890년(고종 27)에 세워진 것으로 전서로 '조선국 영조대왕 원릉(朝鮮國英祖大王元陵)'이라 적혀 있습니다. 이 두 비석은 영조의 능표(陵表)이고, 세 번째 비석이 1805년(순조 5)에 세워진 정순왕후의 능표입니다. 이 비석에는 ‘조선국 정순왕후 부좌’로 적혀 있습니다.
▲ 홍살문 바로 앞에 설치된 판위. 정자각과 그 뒤의 능침이 참도와 직선으로 이어져 간결하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언덕 위 현궁은 세조의 유교에 따라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렀습니다. 그것도 왕과 왕후의 현궁에 따로따로 난간석을 설치한 것이 아니라, 두 분의 현궁 전체를 둘러싼 형태로 조성했습니다.
▲ 원릉을 살펴보는 답사팀. 난간석이 8자 형태로 두 현궁을 둘러싸고 있다.
▲ 난간석과 혼유석 및 망주석. 혼유석은 고석 4개로 밑을 고였다.
▲ 혼유석을 받친 고석. 문고리를 입에 문 귀면을 새겼다.
영조께서는 춘추 83세의 최장수 임금이었던만큼 생전에 8번이나 능(陵)과 원(園)을 조성하거나 천장했답니다. 그런 까닭에 능제(陵制)에 관심이 많았고, 숙종의 교명을 근거로 제도를 정비해 <국조상례보편>을 펴냈습니다. 이 책은 <국조오례의>의 ‘상례(喪禮)’ 부분을 보완한 점이 특징입니다. 진정임 선생은 원릉의 각종 석물이나 묘역 배치는 바로 영조가 새롭게 정비한 <국조상례보편>의 표본으로 평가받는다고 설명합니다.
혼유석은 왕과 왕후의 능침 앞에 각각 하나씩 배치하고, 쌍분 중간에 장명등을 하나만 놓았습니다. 특히 장명등은 이전의 팔각형에서 사각형으로 완전히 변화된 형태이며, 기단부인 향로(香爐)의 다리형태도 각대형(脚臺形)으로 바뀌었습니다. 개다리소반의 미끈한 다리 형태를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또한 상대석부터 하대석 부분에 장식한 꽃무늬가 매우 섬세해 세련되고 화려한 느낌을 줍니다.
망주석 역시 기단부에 화려한 꽃무늬를 베풀었는데, 혜릉의 사례처럼 세호를 오른쪽은 위로, 왼쪽은 아래로 조각했습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망주석의 세호를 ‘우주상행 좌주하행(右柱上行 左柱下行) 규칙에 맞춘 겁니다.
원릉의 석물들은 대체로 입체감이나 조각기법이 섬약한 대신 세세한 무늬가 더욱 섬세해진 점이 특징입니다. 세조의 유교 이래 산릉역(山陵役)에 투입되는 인력과 재정을 줄이느라 크기도 작아지고 조각형태도 간략화되자 그 보완책으로 화려한 무늬를 새기는 형태로 변화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문인석이나 무인석은 비교적 섬세하나, 입체감이 약하고 비례도 맞지 않는 데에다 왜소해서 장엄미(莊嚴美)가 매우 떨어지는 편입니다. 돌호랑이와 돌양도 크기가 작고, 다리 사이도 막혀 있습니다. 석마 역시 마찬가지이나, 다리 사이에 지초를 새겼습니다.
▲ 서쪽의 문인석과 무인석. 둘 다 웃는 표정이다.
▲ 동쪽의 문인석과 무인석. 조각기법이 뒤떨어질 뿐만 아니라 섬약한 느낌을 준다.
다만, 문·무인석 모두 미소를 띤 표정이라 엄숙한 느낌이 없습니다. 특히 무인석은 위풍당당한 장수로 느끼기 어려울 만큼 유약한 형태입니다.
▲ 원릉 후경
댓글목록
행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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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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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동구릉 후기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사진도 너무나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윤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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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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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사항 : 휘릉에서 학묵(學默)으로 법학교 교관이 아니시고, 보건사회부차관,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한국뇌성마비협회장을 지내셨으며, 아들중 재옥은 빼야 합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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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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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