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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회 정기산행(동구릉) 보고_06 경릉, 혜릉, 숭릉 外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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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용,윤식 작성일07-09-24 09:11 조회1,806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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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회 정기산행(동구릉) 보고_06 경릉, 혜릉, 숭릉 外 (끝)

이제 경릉을 시작으로 혜릉과 숭릉을 거쳐 고종의 원비 명성황후의 초장지를 조성하려던 터와 지당(池塘)을 보고드립니다.

이번 답사는 대종회 사무총장님과 영식 등반대장께서 미리 치밀하게 준비하시고, 전문해설사 진정임 선생의 도움으로 다시 없는 왕릉답사가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비공개 능을 포함해 동구릉의 9개 왕릉 지역을 모두 답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동구릉관리사무소 소장님과 직원 여러분께도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왕릉과 풍수지리 등에 문외한인 까닭에 여러 곳에서 오류가 발생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틀린 내용은 여러분의 이해와 함께 지적을 부탁드립니다.

■ 조선조 유일의 삼연릉(三連陵), 경릉

휘릉까지 둘러보고 나자 더운 날씨 탓에 많이 지쳤습니다. 대구에서 가족과 함께 어려운 발걸음 하신 재만 현종께서 작별인사를 하십니다. 남한산성과 또 다른 유적지를 두서너 군데 답사하실 계획이랍니다.

홍살문을 지나 참도를 따라 맞배지붕으로 지은 정자각으로 향합니다. 돌계단 소맷돌의 구름무늬가 인상적입니다. 그 북동쪽의 비각에는 1908년에 세운 비석이 모셔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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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릉 홍살문. 천원지방 형태로 다듬은 주춧돌 위에 세웠다. 좌우의 살 개수가 홀수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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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방 주춧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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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릉 정자각과 비각

경릉(景陵)은 동구릉에서 가장 나중에 조성된 능으로 제24대 헌종(憲宗 1827~1849년)과 원비 효현왕후(孝顯王后 1828~1843년) 김씨,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 1831~1904년) 홍씨를 모신 삼연릉(三連陵)입니다. 조선조 왕릉 가운데 유일한 사례로서 왕과 왕비 두 분의 능이 같은 산언덕[岡]에 나란히 모셔진 동원이분(同原異墳) 형식입니다.

동구릉의 봉분 형식은 다음 표와 같습니다.

능호

건원릉

현릉

목릉

휘릉

숭릉

혜릉

원릉

수릉

경릉

묘호

1대 태조

5대 문종
현덕왕후

14대 선조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

16대 인조
계비 장렬왕후

18대 현종
명성왕후

20대 경종 비
단의왕후

21대 영조 계비
정순왕후

익종
신정왕후

24대 헌종
효헌왕후
계비 효정왕후

매장
형식

단독장

단독장

단독장

단독장

단독장

단독장

단독장

합장

단독장

봉분

1

2

3

1

2

1

2

1

3

곡장

1

2

3

1

1

1

1

1

1

매장
위치

 

 

동원이강

동원이강

 

동강이분

동강이분

동분이실

동강이분

<조선조 왕릉문화의 이해> 21쪽.

경릉은 본래 선조의 초장지인 목릉(穆陵) 자리였는데, 원주목사 심명세의 상소로 현재의 목릉으로 천장한 뒤에 ‘십전대길지(十全大吉地)’라는 극찬을 받은 곳이랍니다. 효현왕후는 후안동김씨 김조순의 따님으로 1837년(헌종 3) 왕비에 책봉되고, 4년 뒤에 가례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왕후가 된 지 불과 2년 만에 춘추 16세로 소생이 없이 승하하여 1843년(헌종 9)에 맨 먼저 이곳에 모셔졌답니다.

뒤이어 헌종이 재위 15년 만인 1849년에 후사 없이 춘추 23세로 승하하여 효현왕후 능 오른쪽에 모셔졌습니다. 그리고 1904년(광무 8)에 효정왕후 남양홍씨가 춘추 73세로 승하하여 경릉 동쪽에 능침을 조성했습니다.

능침을 바라보고 가장 왼쪽이 헌종, 가운데가 효현왕후, 오른쪽이 효정왕후의 현궁입니다. 헌종은 문조가 요절함으로써 불과 8세의 어린 나이에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신 분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때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후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본격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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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 왕릉 중 유일하게 3연릉으로 조성된 경릉. 각각의 현궁 앞에 혼유석을 하나씩 따로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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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릉 능침 전경. 장명등을 중앙에 하나만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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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릉 능침에서 내려다본 정자각과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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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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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릉 능표

경릉의 세 현궁은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만 터서 연결한 점이 특징입니다. 진정임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각각의 현궁 앞에 혼유석만 각기 마련했을 뿐 여타 제도는 단릉(單陵)과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장명등은 중앙에 1기만 조성돼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경릉은 명릉(明陵 숙종의 능) 이후의 왕릉양식을 계승한 것이라고 합니다. 현궁 앞은 한 단을 줄여 2단으로 조성해 문인석과 무인석이 같은 단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문인석은 키가 2미터가 넘는데 몸집에 비해 얼굴이 크게 과장되고, 홀을 쥔 엄지손가락이 위로 치켜올라가 있습니다.

무인석은 이목구비가 부리부리하고 딱딱한 느낌을 줍니다. 문인석에 비해 체구가 작게 표현돼 있으며, 투구 앞면 중앙에 새겨진 태극무늬가 눈길을 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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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분의 현궁 전체를 난간석으로 둘러싼 경릉 능침 후경. 병풍석을 두르지 않았다.

 

■ 장 희빈의 아들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 심씨, 혜릉

답사길이 길어지면서 우리 일행이 넉넉히 가지고 간 물도 동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능침마다 동산을 하나씩 오르내리는 것이라 몸도 지쳐 갑니다.

조선조의 왕릉의 석물들은 명릉(明陵 숙종의 능)부터 사람 키만한 등신대(等身大)로 작아집니다. 혜릉(惠陵)은 제20대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端懿王后, 1686~1718) 청송심씨 능으로서 명릉의 예에 따라 문·무인석을 비롯한 석물들이 모두 왜소해졌습니다. 전체적으로 동구릉의 다른 능들보다 초라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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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릉 현궁. 동구릉의 능 중에서 가장 아담한 능이다.

천성이 어질고 총명할 뿐만 아니라 후덕했던 단의왕후는 병약한 세자(훗날의 경종)를 정성껏 섬겼다고 전해진답니다. 춘추 11세인 1696년(숙종 22)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애석하게도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인 1718년(숙종 44)에 춘추 33세로 승하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희빈 장씨의 소생인 경종은 세자 시절부터 신변상으로나 정치상으로나 갖은 수난과 곤욕을 겪은 분입니다. 불과 4년 동안의 재위 기간에도 끊이지 않는 당쟁 속에서 불운한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분의 능은 의릉(懿陵)으로 서울시 석관동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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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릉(경종의 능). 현궁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혜릉은 능역이 전반적으로 좁고 길 뿐만 아니라 정자각을 향한 앞쪽의 지세가 매우 가파른 형태라 풍수지리상으로는 그리 좋은 자리가 아니라 합니다. 좌청룡·우백호도 매우 빈약한 편이라고 합니다.

홍살문과 정자각도 오래 전에 허물어져 기단과 주춧돌만 남아 있었는데, 진정임 선생은 1995년 말에 복원한 것이라 설명합니다. 참도를 따라 정자각으로 향하면 소맷돌에 넓적한 구름무늬와 당초문이 새겨진 신계(神階)와 만납니다. 또한 하단에는 태극장식을 새겨서 눈길을 끕니다. 정자각 동쪽의 비각에는 1747년에 세운 혜릉의 능표가 모셔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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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릉 전경. 정자각 너머로 구리시 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단의왕후의 현궁은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만 둘렀는데, 12간지가 난간석에 뚜렷이 남아 있습니다. 대부분의 조선조 왕릉은 북침(北枕)을 하고 있는데, 혜릉은 서쪽에 머리를 둔 점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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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유석. 4개의 고석을 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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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릉에서 잠시 휴식 중. 진정임 선생에게서 왕릉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혼유석 좌우의 망주석도 다른 능보다 크기가 작은데, 세호는 우주상행(右柱上行)과 좌주하행(左柱下行)으로 만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새긴 듯 생생한데, 조각기법은 그리 뛰어나 보이지 않습니다.

장명등이 보이지 않아 이상했는데, 오래 전에 분실됐다고 합니다. 문·무인석은 옆에 서 보았더니 정말 사람 키만합니다.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문인석은 얼굴뿐만 아니라, 손으로 잡고 있는 홀도 큰 편입니다. 그런데 엄지손가락이 둘 다 위쪽을 향해 특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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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쪽의 문인석과 무인석. 혜릉의 석물들은 사람 키만한 등신대(等身大) 크기로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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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쪽의 문인석과 무인석. 무인석 코는 아들 낳기 바라는 속설 때문에 수난을 겪은 것이라 한다.

무인석은 문인석보다 얼굴이 더 크게 조성된 데다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특히 주먹코에 구멍 두 개가 뚫린 형태로 코를 강조해 놓아서 약간 코믹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표정은 그 당시 유행했던 양식과 달리 고래(古來)의 형식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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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릉 능침 후경

 

■ 역대 임금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현종, 숭릉

혜릉을 답사한 뒤 우리 일행은 억새가 무성하게 자란 용맥(龍脈)을 살피며 숭릉으로 향했습니다. ‘잉’에서 바라본 시가지 쪽은 하루가 다르게 아파트 숲으로 변해 가는데, 동구릉은 수백 년 전 그대로 남았습니다.

정자각으로 오르는 신계(神階)는 소맷돌 아랫부분에 태극무늬를 장식하고, 측면 바깥쪽에 소용돌이 구름무늬를 새겨 넣었습니다. 정자각은 특이하게도 다른 왕릉과 달리 맞배지붕집이 아니라 팔작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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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살문에서 바라본 정자각과 능침. 시선을 직선으로 유도한다. 정자각은 특이하게 팔작집으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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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각과 능침. 정자각은 양쪽에 사방이 트인 익랑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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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앉지 못하도록 정자각 들보 위에 설치한 꼬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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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방 터

정면 3칸×측면 2칸의 정자각 형식에 사방이 툭 트인 익랑(翼廊)을 양쪽에 붙여 정자각이 커 보이는 점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맞배지붕집보다는 짜임새나 엄숙함이 덜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익랑은 휘릉에서도 나타나지만, 휘릉의 정자각은 맞배지붕집입니다. 이곳은 비공개 능으로 사전에 우리 대종회에서 동구릉관리사무소에 공문을 발송, 특별 답사를 허가받았습니다. 정자각 오른쪽에 멀찌감치 설치된 비각에는 두 분의 능표가 모셔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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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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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릉 능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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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릉 능침에서 내려다본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으로 나가면 고종황제 비 명성황후의 능침을 조성하려던 터가 있다.

제18대 현종(顯宗 1641~1674년)은 봉림대군(효종)이 청나라의 볼모로 심양에 억류돼 있을 때 태어났는데, 훗날 보위에 올라 조선조 최초로 외국에서 태어난 임금이 되었습니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의 급서(急逝)로 왕위에 올랐는데, 1674년에 갑자기 승하함으로써 그 뒤를 이어 현종이 등극한 것입니다.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년) 청풍김씨는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따님으로 이분의 소생이 바로 숙종이십니다. 명성왕후는 매우 총명하였으나 성품은 과격하셨던 모양입니다. 궁중일을 다스리는데 과격하고, 숙종이 즉위한 초기에는 조정 일에까지 관여하실 정도였다고 합니다.

숭릉은 1674년에 현종이 춘추 34세로 승하하신 뒤 능역이 조성되었으며, 1683년(숙종 9) 12월 춘추 42세로 승하하여 현종의 능침 옆에 동강이분(同岡異墳)으로 모셔짐으로써 쌍릉이 되었습니다.

숭릉의 석물과 부속물들은 오늘날까지 거의 완전한 형태 그대로 보전되고 있는데, 능제(陵制)는 <국조오례의>를 따랐다고 진정임 선생이 설명합니다. 특히 석물들은 장릉(長陵 인조의 능)의 조형기법을 계승한 것이랍니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에 모셔진 현궁에는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만 둘렀습니다. 현궁 앞에 혼유석을 각각 설치하고, . 능침 앞에는 3단으로 조성했습니다. 상계에는 난간석을 비롯해 혼유석과 망주석을, 중계에는 장명등과 문인석 및 석마, 하계에는 무인석과 석마를 각각 설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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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릉 능침. 현궁에 난간석을 두르고, 각각의 현궁 앞에 혼유석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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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릉 전경. 원형 그대로 보전되었다고 한다.

망주석에 새긴 세호는 그 형상이 호랑이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형되었으며, 양쪽 모두 상행(上行)으로 조각되었습니다. 장명등은 초기의 왕릉처럼 8각 형태이며, 장식이 대단합니다.

문인석은 휘릉과 유사한데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데 반해 무인석은 부릅뜬 눈망울과 꽉 다문 입을 표현한 점이 특징입니다. 문·무인석 모두 등신대 크기이며, 초기 왕릉들보다는 조각기법이 뒤떨어지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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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쪽의 문인석과 무인석. 석물이 등신대 크기로 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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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쪽의 문인석과 무인석. 각각 단을 달리하여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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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명등. 화려하면서 섬세한 꽃무늬가 인상적이다. 옥개석의 서까래 표현도 놀라울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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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식 등반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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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릉 능침 후경

 

■ 명성황후 초장지 터와 지당(池塘)

제26대 고종황제(高宗皇帝 1852~1919년)의 비(妃)인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년)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었습니다. 명성황후에 대해서는 잘 아시고 계시므로 설명은 생략합니다.

1895년 8월 명성황후께서 왜놈들 손에 춘추 45세로 승하하시자 고종은 이곳 동구릉에 능을 조성하려고 했습니다. 그 장소가 바로 숭릉 아래쪽 숲 속입니다. 당시 고종은 숙릉(肅陵)이란 능호를 내려 국장(國葬) 절차를 진행했는데, 김홍집 내각이 실각함에 따라 명성황후의 능역 조성도 5개월 만에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진정임 선생의 안내로 그곳으로 향하자 길가에 그 당시 조성했던 석물들이 남아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난간석을 비롯한 여러 석물들이었습니다. 수풀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자 새 둥우리처럼 약간 파인 장소가 나타났습니다. 봉분 뒤쪽에 현궁을 조성하려던 활개 부분이 역력합니다. 주위가 온통 굵은 참나무로 뒤덮여 하늘을 가릴 지경이라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역사도 묻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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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의 능침을 조성하려던 자리. 현궁 뒤쪽의 활개 부분이 활처럼 둥그렇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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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 능침 조성에 사용하기 위해 준비하던 석물들. 앞쪽 큰 석물이 난간석의 일부이다.

이렇게 명성황후의 초장지 터를 조성하기 위한 공사가 중단된 후 고종은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명성황후로 추존함과 동시에 능호를 홍릉(洪陵)으로 다시 정했습니다. 이곳이 바로 오늘날의 청량리 홍릉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그 뒤 1907년에 고종이 순종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퇴위한 다음 1919년에 승하하시자 지금의 남양주시 금곡동에 고종의 능을 만들면서 천장론이 일었던 민비의 능을 옮겨 모셔 합장릉으로 조성했답니다.

명성황후 초장지 터를 둘러본 다음 우리 일행은 지당(池塘)으로 향했습니다. 지당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에 따라 네모진 연못을 파내고, 가운데에 둥그렇게 조산(造山)을 만듭답니다. 우리가 본 것은 내지당(內池塘)이라고 하는데, 수풀이 우거져 연못 전체의 윤곽을 알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동구릉 입구에 더 큰 연못을 팠는데, 현재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곳이랍니다. 지당은 풍수지리에 의해 조성하는데, 물 흐름을 조절하는 역할까지 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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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당(池塘). 철새는 물론 각종 보호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지당을 둘러보고 근처 물가의 나뭇그늘에 앉아 남은 음식으로 허기를 채웠습니다. 이어 동구릉관리사무소 직원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근처 음식점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귀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발용, 글 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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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발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발용
작성일

  섬세하고 전문적인 글을 사진이 미처 따라가지 못하였습니다. 송구합니다.
종친 여러분!
넉넉한 한가위 맞이하기기 바랍니다.

김상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상석
작성일

  이제 어둑어둑해지는 능침이 나타나네요,저만치 달그림자가 드리워질 때까지 함께하신 답사요원은 물론이고 방대한 후기작성과 함께 심혈을 기울여 빠지지 않게 한 컷 한 컷 수놓아진 자료사진을 올려주신 모든분들 가을의 햇살처럼 넉넉한 나날 이어가시길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자세한 후기 작성, 새로운 동구릉 해설서가 창조되었습니다. 큰 고생하셨습니다.
의문의 휘릉 앞에 일부 방치되었거나 묻혀 있는 석물들에 대한 관리소측과 진선생님의 답입니다.
1. 휘릉 앞의 석물들은 원릉 옆에 있는 것으로 보아 효종 천장시의 석물들로 보인다. 보존적, 미적, 예술 가치가 떨어져 일부 묻거나 방치한 것이다.
2. 현재 이와 유사한 것들이 주변에 많이 묻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