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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관(敎官) 김공(金公) 묘갈명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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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7-10-03 09:50 조회1,76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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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관(敎官) 김공(金公) 묘갈명 갑신년(1704. 숙종30)

우리 세종대왕이 즉위한지 26년 되던 해에 상은 아직 궁중을 나가지 않은 여러 종친들을 위해서 스승을 가려 뽑아 미리 기르려 하였다. 그리하여 집현전(集賢殿)에 명해서 인물을 신중히 선발하게 하였는데, 이때 모두들 말하기를, “생원으로 성은 김(金)이고 이름이 대래(大來)인 자가 있는데, 학문이 이미 정밀하고 또 효성으로 이름이 조정에 올랐습니다.“하였다. 상이 또다시 승정원에 의논하게 하자, 모두들 말하기를 ”좋습니다.“하니, 이에 교관(敎官)으로 불렀다.

공은 이때 충청도 결성현(結城縣) 개산(蓋山) 아래에 있었는바, 모부인을 모실 적에 뜻을 받들고 물건으로 봉양함에 온 마음을 다하고 그 밖의 일은 사모하지 않았다. 공이 왕명에 따라 입조하자, 상이 말하기를 “내 그대가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줄을 아니, 멀리 어버이를 떠나 벼슬하게 된다면 어찌 날짜를 아끼는 정(情)이 없겠는가. 역마를 타고 돌아가 모친을 맞이해 오라.”하였다. 공이 이에 역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 곱게 꾸민 가마를 받들고 길에 올라 오고 가는 행차가 찬란하니, 당시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이에 조정의 어진 사대부들이 많이 시장(詩章)을 지어 주었는바, 성공 삼문(成公三問)의 시에

공과 같은 분 끝내 초야에 버릴수 있겠는가 / 如公可使終野遺

예로 발탁하여 종영의 스승을 삼으셨네 / 以禮擢爲宗英師

우는 말 하루 아침 구름 속의 궁궐문에 들어오니 / 鳴騶一朝入雲扃

아들이 어머니 뒤를 따라 사마를 달리네 / 兒隨母後駟馬馳

라고 하였으며, 박공 팽년(朴公 彭年)은 공과 동방(同榜)에 합격한 분의 자제로 또 시권(詩卷)의 서(序)를 지을 적에 공이 경서(經書)를 연구하고 효성이 독실하며 은총을 골고루 받은 사실을 자세히 말하였으니, 이는 두 분의 시와 서문을 보면 증험하여 믿을수 있다. 그 후의 일로 말하면 전하여 알려진 것이 없어서 기록할 수가 없다.

공의 묘소는 결성현(結城縣) 벽지산(碧池山) 은하봉(銀河峯) 아래 어령리(魚寧里) 갑좌(甲坐)의 산에 있다. 공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현(鉉)과 진(鎭)인데, 현의 7대손 흥구(興九)와 하구(夏九)는 아직도 공의 묘소를 지키면서 때맞춰 향화(香火)를 받들어 올린다. 진은 벼슬이 정평부사(定平府使)이고, 인상(麟祥)은 강원도 철원부(鐵原府)로 이사 하였는데 벼슬이 예조 정랑으로 판교(判校)에 추증되었으며, 아들 인(軔)은 벼슬이 병조 정랑으로 승지에 추증되었고, 아들 지사(地四)는 일찍 죽었는바 호조 참판에 추증 되었다. 지사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이름이 응하(應河)와 응해(應海)인데, 응하는 광해군 무오년(1618)에 선천 군수(宣川郡守)로 있다가 건주(建州)를 정벌 할적에 종군하였는바, 두 원수(元帥)는 살아서 항복하였으나 공은 홀로 싸우다가 죽으니, 절의(節義)가 천하에 드러 났다. 이 사실이 ≪충렬록(忠烈錄)≫에 자세히 기재 되어있다. 표창하여 영의정을 추증하고 시호를 충무(忠武)라 하였으며, 용만(龍灣 의주義州)에 사당을 세웠다. 응해는 어영대장(御營大將)이다.

충무공의 아들 익련(益鍊)과 손자 세귀(世龜)는 모두 수사(水使)이고, 증손 중우(重禹)는 충무공의 제사를 받든다 하여 조정에서 대대로 이어가는 상을 내려 지금 벼슬이 판관이고, 중기(重器)는 총융사(摠戎使)이다. 응해의 손자 세익(世翊)은 한성부 좌윤이고 증손 중원(重元)은 병사(兵使)이고, 중삼(重三)은 수사(水使)이고, 중구(重九)는 영장(營將)이다.

우리 조선조에는 세종의 정치가 가장 훌륭하여 수많은 어진 선비들이 조정에 가득하였는데, 종영(宗英)의 스승을 뽑을 적에 여러 사람들이 공을 천거하여 맡겼으며, 역말을 달려 돌아가 어머니를 가마로 모시고 와서 서울에서 녹봉으로 봉양함에 이르러는 특별한 영화와 남다른 예우가 실로 전대에 일찍이 없던 것이었다. 그러하니 공의 높은 인품과 뛰어난 학행을 백년이 지난 뒤에도 오히려 상상해 볼 수 있다. 다만 후손들이 크게 현달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쌓아 놓은 경사와 남은 아름다움이 충무공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나서 다만 일시적으로 그 문호를 번창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장수의 가문에 장수가 배출되어 부절을 잡고 병마를 호령하여 계속 이어지고 끊이지 않으니, 복록의 유구함이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공은 신라의 국성(國姓)이니, 고려 때 상락공(上洛公) 방경(方慶)에 이르러 관향을 안동(安東)으로 옮겼다. 고조는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낸 휘 승용(承用)이고, 증조는 감찰사 장령(監察司掌令)인 휘 구(玖)이고, 조고는 밀직부사 휘 천순(天順)이며, 선고는 통례문 봉례랑(通禮門奉禮郞)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된 휘 담(談)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입신 양명은 / 立身揚名

굳이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요 / 不必在高位

오직 효도와 학문이라오 / 惟孝惟學

후손에게 넉넉한 복을 남김은 / 垂裕後昆

근대에 있을 뿐만 아니라 / 不但在近代

멀수록 더욱 빛나도다 / 愈遠愈焯

지금 사람들 / 凡今之人

만일 이것을 믿지 못하거든 / 如不信者

이 명문을 보라 / 請視斯銘

공에게 증거할 수 있으리라 / 於公徵也


1) 날짜를 아끼는 정(情): 날짜를 아낀다는 것은 부모가 늙어 봉양할 날짜가 만지 않으므로 효성을 다해 봉양함을 이른다.

2) 종영(宗英): 종친의 영재(英才)를 이른다.

3) 두 원수(元帥): 원수 강홍립(姜弘立)과 부원수 김경서(金景瑞)를 가르킨 것이다.

 

출전: 약천집 (남구만)


교관공 김대래 (敎官公 諱 大來)

동영주사(東瀛洲事)를 지내고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치사한 부사공 천순(天順)의 손자요, 통예문봉예랑(通禮門奉禮郞)을 지내고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증직된 휘 담(談)의 아들이다.

태종17년(1417) 생원(生員)이 되고 세종25년(1443) 정월에 임금의 특지(特旨)로 포상하고 세종26년(1444)에 교관(敎官)으로 발탁되어 종사(宗師)가 되어 조사첩(朝謝帖)을 받았다. 벼슬은 중군섭부사정 증 한성부참군(中軍攝副司正 贈漢城府參軍) 이다. 세조 원년(1455) 12월에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錄) 되었다. 단종(端宗)이 손위(遜位)되자 통곡하며 홍주 어은동(洪州 魚隱洞)에 들어가 號를 미암(薇菴)라 하고 후학을 길렀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덕이 높아 문충공 성삼문(成三問)과 충정공 박팽년(朴彭年) 최영성(崔寧城)등과 교유 하였다. 묘는 충남 홍성군 은하면 대천리 은하봉(結城縣 碧池山 銀河峯下 魚寧里)에 있는데, 이조판서 우찬성 송환기(宋煥箕)가 묘지명을 짓고,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묘갈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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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홈 역사적 인물란의 <김대래>란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