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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렁이의 젖은 등(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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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석 작성일07-10-03 14:30 조회2,011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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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타고 우박을 맞다(향수)--#2

 어릴 적 방과후면 어김없이 마루에 가방을 던져버리고 외양간으로 발길을 옮겼다.옷을 갈아입을 것도 없다.학교 갈 때나 집에서나 그저 잠 잘 때까지 작년 추석에 사주신 자주색 츄리닝이다.초등학교 졸업사진도 츄리닝이다.다 같은 검정고무신이기에 철사를 달구어 앞코에 구멍을 가늘거나 굵거나 한 개나 두 개 심지어 오십이(그 친구 아버지가 오십에 득남하여 붙여진 자랑스런 이름)는 세 개까지 뚫어 표식으로 삼았었다.

 최근에 양주 어느 곳의 산사에서 섬돌에 놓여있던 흰고무신의 옆에 휠라마크가 세겨진 것을 보고 한참을 혼자 웃었던 기억이 난다.나이키도 아니고 휠라라서 특이했었다.아이디어가 신선했다.하지만 검정고무신은 불가능 하기도 했지만 그땐 메이커도 따지지 않았고 그저 헤지면 사이즈만 올려서 장날에 어른들이 사다 주셨다.

 오늘 주제는 고무신이 아니다.자꾸만 이야기가 사연을 보태며 옆으로 샌다.그만큼 추억이 많고 더러는 치부를 들어낼지도 모르지만 용기를 내 본다.

 궁벽한 내 고향은 집을 나서면 바로 들길이다.집에서 기르던 소를 몰고 풀을 뜯기러 가는 게 매일처럼 반복되는 일과이기에 고삐를 잡고 농작물을 피해 소가 가고자 하는 곳까지 이르면 온종일 전답을 갈아 엎느라 뱃가죽이 움푹 들어간 자리가 불룩해지는데 그제서야 되돌아 올 수 있었다. 오가다 쇠똥이나 사쿠리,칡넝쿨을 보면 토끼풀도 만들어 와야했다.

 지금도 밤비가 내리는 여름날이나 우박이 쏟아질 때엔 어김없이 누렁이가 생각난다.소는 이름도 없이 그저 누구네 소,아무개네 소로 불렸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 간 해에 들어 와 꼭 십 년을 일해주고 암 송아지 한 마리와 숫 송아지 아홉 마리를 낳고 주인집에서 죽은 누렁이,당시 암송아지는 삼만원이었고 숫송아지는 십 이,삼만원이었기 때문에 가계에도 큰 보탬이 되었었다.숫 송아지만 연거푸 생산한다며 선친께서도 흐뭇해 하셨었다.

 내가 누렁이의 젖은등어리에 찰싹 달라붙어 산길을 헤집고 내려온 그날은,무더위가 가신 늦여름에 갑자기 깍두기 같은 우박이 한참을 퍼붓던 늦은 저녁이었다.

 선친께서 밭일을 하시다 깊은산에 방목을 위해 매어 놓으시고 내려오셔셔 담배를 찌고 계셨기에 일러주신 장소로 소를 찾으러 가야했다.우박이 사납게 얼굴을 때리며 어린몸을 부수고 있었다.

 누렁이의 고삐는 개암(깨금)나무에 묶여져 있었다.누렁이가 나를 보았다.순간,사위가 어두운 슾지를 앞발로 박차고 솟아 오르더니 도라지밭을 넘고 밭두렁을 넘어 고추밭을 덮칠듯 질주하여 내려온다.

 지금도 난,윷(소)놀이를 왜?,한 끝발 높은 모(말)놀이라 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다.그것은 소의 끈기와 저력이다.마지막으로 도랑을 단숨에 건너 온 누렁이는 어린 주인의 발치에서 순한 양처럼 엎드렸다. 난 올라탔다.야생이 아니었기에 소는 어둡고 우박내리는 것이 풀뜯어 먹는 것보다 두려웠던 것이라고 어린 나는 생각했다.

 난 등을 두드렸고 누렁이는 일어섰다. 선친께선 육척장신이셨다.당연히 누렁이의 목에 큰방울이 두 개나 달렸었고 고삐도 굵었다.방울소리는 굵고 깊었다. 빈들에서 둥지를 찾는 날짐승들이 놀라 가늘고 길게 울며 달아났다.

 어느해 어머니가 처음으로 소고기 장조림을 하셔서 자취방을 찾아오셨다.장이 스며든 고기는 질겼고 이따금 콩비린내가 풍겼다.일 년 마다 숫 송아지를 낳던 누렁이는 먹은콩이 불어(고창증) 죽어서 나의 몸을 파고들었다.

댓글목록

김행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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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매밀꽃 하얀 기억에 이어 누렁소가 등장하는군요.  마치 소설을 읽는 기분입니다.^^
아름다운 추억이 있어서 행복해 보이시는 님~~ 글 속에서처럼 행복하세요^^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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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읽을수록 다음 편이 기다려집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단양의 산촌일기는 <동배꽃>보다도, <메밀꽃 필 무렵>보다도 놀라운 묘사와 서술로 선명하게 눈에 떠오릅니다.
1편-메밀곷 속의 어머니
2편-누렁이의 젖은 등
3편이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