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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담김시양 문집(8)-상소문(병란 후 장신의 죄를 논한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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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12-14 18:47 조회1,4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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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율(軍律)을 논한 차(箚)-논군율차(論軍律箚)

정축 (丁丑. 인조15년. 1637)

출전 : <하담 김시양문집> 233p

 

 삼가 신(臣)의 숙병(宿病)이 깊은 고질이 되어 아뢸 힘이 없사오나, 부지런히 은혜에 보답할 처지이므로, 성은(聖恩)에 만 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는 길은 불과 한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신(臣)이 말씀드리려 하니 뒤돌아보며 머뭇거려집니다. 원성이나 피할 셈으로 여기시면 신(臣)의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삼가 원컨대 성명(聖明)께서 살펴주소서.

 장신(張紳. 주: 병자호란때 江華留守. 淸兵이 강화도로 쳐들어오자 달아나 버려 강화는 함락되었다)등의 죄의 경중은 잠시 버려두고 논하지 않으면서, 김세렴(金世濂. 주: 1593- 1646. 문신 학자 자 道源. 호 東溟. 본관 선산. 시호 文康) 등의 정계(停啓. 주: 죄인의 이름을 적은 전계(傳啓)속에서 죄인의 이름을 지워버림)가 옳다고 한 즉 대간(臺諫)의 조치는 부당합니다. 허물을 추구한다고 교체하는 것은 이미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데, 교체를 청했으면 그 논의는 당연히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이미 세렴(世濂)을 교체했으면서 한마디 말이 없으니, 미처 거기에 따로 의리(義理)가 있는 줄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혹시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 사사로운 정으로 공적(公的)인 일을 팽개치고, 비위나 맞추고 때가 잔뜩 끼었으니 이와 같은 은전으로 나중에 누가 원망을 사겠습니까. 당초 대간(臺諫)이 율(律)에 따라 한번 계(啓)를 하여 윤허를 받았으면 전하(殿下)의 위엄과 결단을 보이셔야 합니다.

군대가 패하여 율을 잘못한 자는 즉시 군중(軍中)에서 처단하는 것은 고금에 상법(常法)입니다. 그래서 그 때 사사로운 정을 두었던 자가 마침내 감히 잡혀 갇혔는데도 애매하게 계(啓)를 들여, 끝내는 장신(張紳)으로 하여금 결국에는 복종을 안 하게 하였습니다. 아! 장신(張紳)등에게 어떤 국문할 사정이 있었습니까. 그러니 꼭 잡아다 국문하여 범죄의 실정을 알아내야 했습니다. 이숙번(李叔蕃. 주: 1373-? 정종때 문신. 본관 安城)은 정사원훈(定社元勳․주: 태조때 芳碩의 난을 평정한 17명에게 준 훈호)의 공도 더불어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태종(太宗)께서는 교만 방자한 죄로 그 훈적(勳籍)을 깎았는데, 장신(張紳)이 종사(宗社)를 함몰시킨 죄는 교만 방자함보다 더하며, 정사(靖社. 주: 인조반정 공신 50명에게 내린 훈호)에 뛰었던 공로도 숙번(叔蕃)에게는 못 미칩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우리나라의 형(刑)을 바로 하지 않으시고 자진(自盡)하게 하여, 오히려 공신으로 대접함으로써 인자(仁慈)로 그르쳐, 참으로 귀신과 사람의 분노를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臣)이 듣건대, 장신(張紳)은 자진하여 바로 자기 집에 들어가서 죽었다고 합니다. 국가의 형살(刑殺)에는 그 제도가 있거늘, 어찌 이렇게 용납이 되어야 합니까. 금부도사(禁莩事)의 직무를 그르친 죄는 단호히 구제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리고 대간(臺諫)은 아직 말 한마디 없으니 어찌 알면서 논하지 않습니까. 혹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까. 전하께서 장신(張紳)등의 죄로 당장 죽였더라면, 대간(臺諫)의 계사(啓辭)는 합당하지 않다고 한 달 넘도록 윤허하지 않으셔도, 사사로운 정을 품었던 자로 하여금 입에 오르내리게 함을 멈추게 했을 것입니다. 만약 원훈(元勳)이기 때문에 혼자만 차마 처벌하기가 합당하지 않다거나, 또는 밑으로 그렇게 대간(臺諫)에서 논의를 못 할 만큼 그 죄가 아주 가볍다고 한다면, 교지(敎旨)의 중함으로 임금의 위엄을 취한다는 것이 점점 미약해지는 것입니다. 큰 난이 있고 난 후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사사로운 뜻을 남김없이 혁파하여 봉공(奉公)하겠다는 한 뜻으로 모두가 하늘의 뜻에 돌려 국세(國勢)를 만회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큰 의논을 돌아보지 않고, 한 나라의 공적인 시비(是非)가 오직 사사로운 것을 건지는데 제일 급한 일로 삼고 있으니, 끝내 나라가 어느 지경에 이를지 모르겠습니다.

 신(臣)은 또한 듣건대, 곤사(閫師. 주: 兵使와 水使)로 죄를 지은 자를 청병(淸兵)이 철수한 다음에 잡아다 문초한다면서 오히려 병권(兵權)을 주어 군대에 옹호되어 죄를 앉아서 보고만 있는데 그런 율(律)이 어디 있습니까. 조정(朝廷)의 조치가 이와 같이 느릿느릿하니, 그들이 정말 그렇게 죽지 않고 벗어나려고 했음을 헤아려 알 수 있습니다. 발호(跋扈)할 사람이면 아마도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법대로 끝까지 하여야 함은 갑자의 화(甲子之禍. 주: 인조 2년 1월의 이괄의 난)를 거울삼아야 합니다. 신(臣)은 지금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조정(朝廷)에서 이후를 신중히 하여야 한다는 것일 뿐입니다.

 신(臣)은 병으로 폐인인 사람으로서 곧 조정(朝廷)의 득실을 논의하려는 것이 아니고, 성은(聖恩)을 입어 신료(臣僚)의 마음을 나타내 보임에 애통한 바 있기에 천지 부모 같으신 분 앞에 감히 스스로 억제하지 못 하오며 그 사정 또한 근심스럽습니다.

답하여 말씀하시기를, 「경(卿)이 올린 차(箚)로 경(卿)의 뜻을 모두 잘 알았노라. 차(箚)에 말한 것은 아주 당연하며, 나 또한 잘못이 있었노라.」고 하셨다.

 

․주: 이 상소문은 병자호란 직후 난이 수습되면서 군대의 책임을 물을 때의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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