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답사자료(9) 강릉김씨 시조 김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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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6-07 18:50 조회1,836회 댓글0건본문
강릉김씨 시조 김주원
강릉김씨(江陵金氏)
◆淵源(연원) 및 由來(유래)◆
江陵金氏(강릉김씨)의 始祖(시조) 金周元(김주원)은 新羅統一(신라통일)을 이룩한
太宗武烈王(태종무열왕) 金春秋(김춘추)의 5세손이다.
그는 777년(혜공왕13) 이찬(伊●)으로 侍中(시중)이 되었고, 785년(선덕왕 6)왕이 죽고 아들이
없어 여러 신하들의 회의에서 王(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갑자기 큰비가 내려 閼川(알천:현 경주
부근의 하천)의 물이 범람하여 건너지 못해 입궐하지 못하게 되자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여
즉위를 포기하였다.
이에 元聖王(원성왕)이 즉위하니 그가 내물왕의 12세손 金敬信(김경신)이다 그후 원성왕은
그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강릉으로 은거하자 원성왕은 그의 겸손함에
감복하여 溟州郡王(명주군왕:지금의 강릉)으로 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江陵(강릉)을 本貫(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후손으로는 시조
주원의 8세손 上琦(상기)가 고려 睿宗(예종) 때 平章事(평장사)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人存(인존)과 沽(고)도 평장사를 지냈다.
한편 인존의 아들 3명도 모두 평장사를 역임하여 명문의 전통을 이어왔으며, 朝鮮(조선) 때 와서
가문에 우뚝선 인물은 世祖(세조)의 패륜에 통분하고 저항하여 매서운 절의를 지켰던
生六臣(생육신)의 한 사람인 梅月堂(매월당) 時習(시습)을 들수 있다.
그는 周元(주원)의 22세손으로 3세에 이미 詩(시)에 능했고 5세 때 「中庸(중용)」「大學(대학)」을
통달하여 神童(신동)으로 이름났다.
일찌기 성균관 대사성 金泮(김반) 문하에서 글을 읽고 師範之宗(사범지종)으로 일컬어진
尹祥(윤상)에게서 「禮書(예서)」 「諸子百家(제자백가)」를 배웠다.
1455년(세조 1) 나이 21살 때 삼각산 重興寺(중흥사)에서 공부하다가 首陽大君(수양대군:세조)이
端宗(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雪岑(설잠)으로 고친 후 방랑의 길을 떠났다.
1458년(세조 4) 책을 구하러 한양에 갔다가 孝寧大君(효령대군)의 권고로 세조의
佛經諺解(불경언해) 사업을 도와 內佛堂(내불당)에서 교정의 일을 맡았으며 1465년(세조11)
경주 남산에 金鰲山室(금오산실)을 짓고 독서를 시작하여 「山居百詠(산거백영)」을 썼다.
그후 수차에 걸쳐 「金鰲新話(금오신화)」 와 「梅月堂集(매월당집)」 「十玄談要解(십현담요해)」
등의 명작 저서를 남겼다.
그는 절개를 지키며 고고한 지성으로 불교와 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의 세계를 文學(문학)에서 찾으며 살다간 불행한 천재였다.
예조판서를 역임한 添慶(첨경)의 玄孫(현손) 시혁(始●)은 判敦寧府事(판돈령부사)를 지냈으며
始煥(시환)과 始炯(시형)도 예조 및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시환의 아들 尙星(상성)은 호조 및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始煐(시영)의 아들 尙集(상집)은
1755년(영조31)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史官(사관)을 거쳐 1761년(영조37) 正言(정언)이 되어
이듬해 景賢堂(경현당)의 문신 製述(제술)에서 장원하여 문명을 날렸다.
시혁의 아들 尙喆(상철)은 1736년(영조12) 정시문과에 급제, 지持平(지평)·校理(교리)에 이어
1757년(영조29)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1766년(영조42) 우의정에 오르고 1772년 좌의정,
1775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그외 啓洛(계락)은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右參贊(우참찬)·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며
經史百家(경사백가)에 통달하여 문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哲命(철명)의 아들 起宗(기종)이 1618년(광해군10) 문과에 장원하고 李适(이괄)의 난 때 무공을
세워 振武功臣(진무공신) 2등에 올라 벼슬이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朝鮮(조선)의 문신 行(행)은 國平(국평)의 아들로 1566년(명종21)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 茂長縣監(무장현감)이 되어 安平大君(안평대군)의 證道歌(증도가)를 刊刻(간각)하여
간행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大司諫(대사간)을 거쳐 형조판서를 오른 華鎭(화진)과 易學(역학)과 性理學(성리학)의
대가 鴻運(홍운) 등 많은 인물들이 名門(명문)의 전통을 이어왔다.
▣ 김항용 -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강릉김씨(江陵金氏)
◆淵源(연원) 및 由來(유래)◆
江陵金氏(강릉김씨)의 始祖(시조) 金周元(김주원)은 新羅統一(신라통일)을 이룩한
太宗武烈王(태종무열왕) 金春秋(김춘추)의 5세손이다.
그는 777년(혜공왕13) 이찬(伊●)으로 侍中(시중)이 되었고, 785년(선덕왕 6)왕이 죽고 아들이
없어 여러 신하들의 회의에서 王(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갑자기 큰비가 내려 閼川(알천:현 경주
부근의 하천)의 물이 범람하여 건너지 못해 입궐하지 못하게 되자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여
즉위를 포기하였다.
이에 元聖王(원성왕)이 즉위하니 그가 내물왕의 12세손 金敬信(김경신)이다 그후 원성왕은
그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강릉으로 은거하자 원성왕은 그의 겸손함에
감복하여 溟州郡王(명주군왕:지금의 강릉)으로 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江陵(강릉)을 本貫(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후손으로는 시조
주원의 8세손 上琦(상기)가 고려 睿宗(예종) 때 平章事(평장사)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人存(인존)과 沽(고)도 평장사를 지냈다.
한편 인존의 아들 3명도 모두 평장사를 역임하여 명문의 전통을 이어왔으며, 朝鮮(조선) 때 와서
가문에 우뚝선 인물은 世祖(세조)의 패륜에 통분하고 저항하여 매서운 절의를 지켰던
生六臣(생육신)의 한 사람인 梅月堂(매월당) 時習(시습)을 들수 있다.
그는 周元(주원)의 22세손으로 3세에 이미 詩(시)에 능했고 5세 때 「中庸(중용)」「大學(대학)」을
통달하여 神童(신동)으로 이름났다.
일찌기 성균관 대사성 金泮(김반) 문하에서 글을 읽고 師範之宗(사범지종)으로 일컬어진
尹祥(윤상)에게서 「禮書(예서)」 「諸子百家(제자백가)」를 배웠다.
1455년(세조 1) 나이 21살 때 삼각산 重興寺(중흥사)에서 공부하다가 首陽大君(수양대군:세조)이
端宗(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雪岑(설잠)으로 고친 후 방랑의 길을 떠났다.
1458년(세조 4) 책을 구하러 한양에 갔다가 孝寧大君(효령대군)의 권고로 세조의
佛經諺解(불경언해) 사업을 도와 內佛堂(내불당)에서 교정의 일을 맡았으며 1465년(세조11)
경주 남산에 金鰲山室(금오산실)을 짓고 독서를 시작하여 「山居百詠(산거백영)」을 썼다.
그후 수차에 걸쳐 「金鰲新話(금오신화)」 와 「梅月堂集(매월당집)」 「十玄談要解(십현담요해)」
등의 명작 저서를 남겼다.
그는 절개를 지키며 고고한 지성으로 불교와 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의 세계를 文學(문학)에서 찾으며 살다간 불행한 천재였다.
예조판서를 역임한 添慶(첨경)의 玄孫(현손) 시혁(始●)은 判敦寧府事(판돈령부사)를 지냈으며
始煥(시환)과 始炯(시형)도 예조 및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시환의 아들 尙星(상성)은 호조 및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始煐(시영)의 아들 尙集(상집)은
1755년(영조31)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史官(사관)을 거쳐 1761년(영조37) 正言(정언)이 되어
이듬해 景賢堂(경현당)의 문신 製述(제술)에서 장원하여 문명을 날렸다.
시혁의 아들 尙喆(상철)은 1736년(영조12) 정시문과에 급제, 지持平(지평)·校理(교리)에 이어
1757년(영조29)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1766년(영조42) 우의정에 오르고 1772년 좌의정,
1775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그외 啓洛(계락)은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右參贊(우참찬)·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며
經史百家(경사백가)에 통달하여 문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哲命(철명)의 아들 起宗(기종)이 1618년(광해군10) 문과에 장원하고 李适(이괄)의 난 때 무공을
세워 振武功臣(진무공신) 2등에 올라 벼슬이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朝鮮(조선)의 문신 行(행)은 國平(국평)의 아들로 1566년(명종21)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 茂長縣監(무장현감)이 되어 安平大君(안평대군)의 證道歌(증도가)를 刊刻(간각)하여
간행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大司諫(대사간)을 거쳐 형조판서를 오른 華鎭(화진)과 易學(역학)과 性理學(성리학)의
대가 鴻運(홍운) 등 많은 인물들이 名門(명문)의 전통을 이어왔다.
▣ 김항용 -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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