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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순례 14-1.(의성군 : 사촌3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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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6-13 16:18 조회1,6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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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군지(의성군지편찬위원회, 1998)





▣ pp 1465 사촌 3리.





가. 마을의 유래와 개황.



---신라시대의 나정승(羅政丞)이 이 마을에 살았다는 전설과 자하산(紫霞山) 중



턱에 나정승의 묘라고 전해지는 고총(古 )으로 보아 마을의 역사가 1,000년이 넘



었으리라 짐작된다. 그 후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의 후예 감목공 김자첨



(監牧公 金子瞻)이 안동 회곡(檜谷)에서 이주하여 1392년에 중국의 사진리(沙眞



里)를 본 따서 사촌(沙村)이라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 1914년 전까지 서변(西邊)



1, 2리를 합해 하나의 마을로 통칭되다가 행정구역 개편때 사촌 3리로 불리우게



됐다. 낙동강 지류 미천(眉川) 붘녁에 사질의 기름진 땅이 동서로 길게 놓였고,



그 뒤를 수려한 봉우리들이 마을을 지키며 감싸듯 홀연히 솟아 있다. 이 마을은



소재지 권에 속하면서 사촌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여기가 원사촌이고 미천 건너



산재 마을이 있다. 합해서 96세대이며 289명이 살고 있다. 일부 공직자와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 외에 대부분이 농업을 영위하고 있다. 주곡 외에 고추, 담배, 사과



등이 수입의 대종을 이룬다. 점곡초등학교가 이 마을 서편에 있고 또 그 서편에



길게 가로 놓인 서림(西林)이 방풍겸 경관지 역할을 하고 있다. 성씨별 세대수는



안동김씨 75호, 풍산류씨와 기타 등이다.





나. 풍수설에 의한 영남의 명기.



---자하산(紫霞山)과 기령산(奇靈山)이 배산이고 금성산(金城山)이 안산이다. 십



리 장벽 건마산은 서쪽에서 역으로 응해 있고 동쪽의 병봉(丙峯) 또한 이 곳에



응해 있다. 사방의 산과 물이 이곳으로 쏠렸는데 산수가 밝고 맑아 장수(長壽)하



는 사람이 많다. 동서 수십리가 트인 가운데를 태고연한 서림이 가로 놓여 경관



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다. 자하산을 등지고 들어선 대촌의 고가(古家)들을 보면



전통있는 유향(儒鄕)임을 또한 알 수 있다.





다. 만취당(晩翠堂)



---사촌 김씨 종실(宗室)로 사용되어 온 조선조 특유의 11간 대청 건물이다. 400



여년전, 이곳에서 약 2㎞ 밖에 있었던 신라 때의 사찰 문루를 뜯어 옮겨 지었다



고 하니 자재는 천년이 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 無量壽



殿)과 더불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가의 목조 건물이다. 건축이후 수많은 전란



에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고 지금은 문중 집회장소 또는 경노당 구실도 함께 하고



있다. 현판은 한석봉(韓石峰) 글씨라고 전한다. 지방문화재 제169호로 지정되었다.





라. 문현달사(文賢達士)와 과한(科翰)이 이어진 마을.



---송은 김광수 서애 류성용 등 많은 유현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대과에 13명



소과에 28명이 합격하여 각 시대에 활약하거나 은거 자수했다. 조선조 후기 퇴계



학의 정맥이라 일컬어지는 천사 김종덕은 영남의 학통을 이었고, 그 문하에는 많



은 유생들이 원근에서 모여들어 수학한 바 있다.





마. 김광수(金光粹 1468∼1563)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송은(松隱), 본관은 안동이다. 고려 중흥공신이며 출장



입상의 경륜을 가진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은 그의 9대조이며, 고려말에



도평의(都評議)를 지낸 바 있는 아버님 김구정(金九鼎)을 모시고 사촌으로 입향한



감목공 김자첨(監牧公 金子瞻)은 그의 증조부이다. 조부 효온(孝溫)은 1412년에



태어나 생원에 합격하고 박팽년 최항 등과 문과 동방으로 친교가 있었으며, 정통



(正統) 경신년(庚申年)에 태어나서 기묘년에 생원이 되고, 신묘에 문과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와 지례 현감(知禮 縣監)을 역임하면서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극해



(克諧)는 그의 아버님이다. 외손자 서애 류성용은 임난 7년 풍진을 성공적으로 마



무리하여 더욱 유명하다. 일찍이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다가 연산의 정



란을 예견하고 대과와 관직을 단념하고 귀향하여 기수 남안에 영귀정(詠歸亭)을



지어 시를 읊으며 은둔 강학하니 당시의 선비들이 송은거사(松隱居士)라 추앙하



며 모여 들었다. 거실 서편에 우뚝 서 만년송(萬年松) 아래 청빈을 벗삼아 살다가



소안백발(韶顔白髮)의 지상선인처럼 타계하니 향년 96세였다. 공의 학문과 덕망은



당시 영남일대에 알려졌고, 그 후손에 이름난 선비가 연세 상전하여 대소 등과한



이가 50여명에 이르렀다. 숙종 11년에 공의 학덕을 추모하여 사림의 공의로 장대



서원(藏待書院)에 제향했다. 저서로는 경심잠(敬心箴)과 송은집이 있다.





바. 김사원(金士元 1539∼1601)



---자는 경인(景仁), 호는 만취당(晩翠堂), 연산조에 이름난 선비 송은 김광수의



증손이다. 부호군의 벼슬을 지냈으며 퇴계의 고제로서 도산구곡(陶山九曲) 중의



제2곡으로 알려진 월란정사(月瀾精舍)는 그가 강학하던 곳으로 지금도 후학들이



보존 관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의성 정제장으로 활약하여 공훈을 세



운 바 있으며 천성이 후덕하고 돈독하여 원근에 명성이 자자했다. 특히 사친에



효도를 다하고 기민을 구휼함에 전곡(錢穀)을 아끼지 않아 사람들이 공의 집을



김씨 의창(義倉)이라 일컬었다. 그 외에도 남을 구휼한 사례가 많아 오늘날까지



일화로 전함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사후에 공의 덕망을 추모하여 후산사(後山祠)



에 제향했다.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이 행장을 짓고 번암 채제공(樊岩 蔡濟恭)



이 묘갈을 썼다. 그의 독후한 천성의 여음으로 후손이 번창하고 문맥이 연면히



이어졌다. 그 가운데 장손 김상원(金尙瑗)은 호를 남애(南厓)라 하고 어려서는 수



암 유질(修岩 柳 )에게, 장성한 뒤에는 한강(寒岡)과 여헌(旅軒) 문하에서 수학하



여 문사가 뛰어났다. 병자(丙子) 강화 후에 과거에 응하지 않고 자수 강학하여 세



인이 숭정처사(崇禎處士)라 부르고 효우도 출중했다. 호군을 지내고 유고가 전하



며 다음 손자 상기(尙琦)는 호를 사오(沙塢)라 했으며 장사랑(將仕郞)을 역임하고



문행이 뛰어나 당사의 명사와 교우가 빈번하고 유집이 전하며, 자여당 상각(自餘



堂 尙珏)은 천성이 관후하고 효우가 극진하여 향리에 널리 알려졌고, 후손들이 공



을 추모하여 사촌에 자여당(自餘堂)을 창건 관리하며, 다음 손자 상인(尙璘) 또한



가학을 이어 받아 문장이 훌륭하고, 특히 숭조와 교손에 더욱 힘써 일향의 추앙



을 받고, 만년에 양진당(養眞堂)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며 여생을 보냈다. 통훈대



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의 증직을 받았다. 현손대에 이달(履達), 이규(履



規)는 모두 문행이 있어 생원시에 합격하고 유집도 전하며, 증손 성좌(聖佐)는 갈



암 이현일(葛庵 李玄逸)을 사사하여 문행이 높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부사(寧



海府使)를 역임하고 청백리로 추앙받았다. 도응(道應)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회인



현감(縣監)을 지냈다. 양좌(良佐), 추응(秋應) 등 모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되고



문적이 남았으며, 소암 재응(素巖 載應)은 눌은 이광정(訥隱 李光庭)에게 배우고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구사당 김락행(九思堂 金樂行) 등과 친교가 있었으며,



유집과 사례집사(四禮輯辭)가 전한다. 6세손 이하에 와서 종구(宗九)는 호를 운암



(云庵)이라 했고 문과에 급제 전적(典籍)을 역임했으며, 성은(誠應), 양직(養直),



청진(淸進), 성진(誠進)은 모두가 족친인 천사 김종덕에게 학문을 닦아 생원과 진



사에 합격하고 명망이 원근에 알려졌다. 양휴(養休)는 호를 율원(栗園)이라 하고



천사(川沙)와 후산 이종수(后山 李宗洙), 손재 남한조(損齋 南漢朝)에게 수학하여



경사에 밝았고 후학을 장진한 공이 있으며, 유집 5권이 전한다. 이어서 양경(養



絅)은 진사이었으며 서고 우유(西皐 佑裕)는 경사에 밝고 후덕했으며, 사촌 희유



(思村 羲裕)는 대과를 거쳐 사간원 정언(正言)을 지냈고, 기산 석유(奇山 奭裕)는



정제 유치명의 고제로서 후진 양성에 힘써 당세에 공헌했으며, 수익(壽翼), 상호



(相鎬), 호직(浩直) 등은 한말에 진사에 합격되었다. 운산 상종(云山 象鍾)은 서산



김흥락의 문인으로 의도가 준정하고 기우가 광심했으며, 1896년 병신년에 창의하



여 의성 의병장(義兵將)으로 추대되고, 금성면 산운(山雲)과 옥산면 황산(黃山)에



서 왜군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린 바 있다. 후에 파병조칙에 의거 융복을 거두고



61세로 서거했으며 독립유공자로 추서를 받았다. 좌산 수욱(左山 壽旭)은 소모장



(召募將), 권대직(權大稷)은 중군(中軍), 수담(壽聃)은 선봉장(先鋒將), 수협(壽莢)



은 관향장(管餉將)으로 의성 의병을 주도한 바 있다.





사. 김사형(金士亨 1541∼ )



---자는 사겸(士兼), 호는 독수헌(獨秀軒) 송은 광수의 증손이다. 문과에 급제하



여 직장(直長)에 올랐다. 유일재 김언기(惟一齋 金彦機) 문하에서 수학하고, 임진



란 때 아우 사정(士貞)과 더불어 화왕산(火旺山)에 들어가 곽망우당(郭忘憂堂)과



같이 창의했다.





아. 김사정(金士貞)(1552∼1620)



---자는 정숙(正叔), 호는 후송재(後松齋), 송은 광수의 증손이며 만취당 사원의



아우이다. 젊어서 재예와 총명이 과인했으며, 가훈에 따라 관직에 뜻을 두지 않



고, 오로지 퇴도(退陶)를 사숙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임진란 때에는 중형 사형



(士亨)과 함께 망우당 곽재우를 따라 왜적에게 항전하여 크게 전과를 올린 바 있



다. 창영 화왕산성에서 섶을 깔아 맹서하되 "피로서 맹서하니 마음은 칼날과 같



고 몸은 불살라도 뜻은 재가되지 않으리 삽혈심여도 분신지불회( 血心如刀 焚身



志不灰)" 하였다. 증직으로 사헌부 지평(持平)을 제수 받고 문집과 계문예설(溪門



禮說)이 전하며 도담사(道潭祠)에 제향되었다. 그 후손에 이름있는 선비와 대소



과한이 끊이지 않았으니 그 손자 오계 상유(玉溪 尙瑜)는 장사랑을 지내고 문행



이 있었으며 유집이 전한다. 현손인 북오 이중(北塢 履中)은 무과에 올라 선전 오



위장(宣傳 五衛將)에 이르렀고 식략이 절인하고 무신란에 의장(義將)으로 추대되



어 군공을 세운 바 있다. 5세손 성고 성(省고 聲)과 귀은 오응(龜隱 五應)은 다같



이 문과에 급제했는데 성(聲)은 통례원 좌통례(左通禮)를 지내고 경학에 고명하여



당세에 추앙을 받았다. 초휘는 성응(聲應)이었으나 어전에서 강경할 때 성(聲)음



이 청아함으로 어명으로 성(聲)자 만을 이름하게 되었고, 오응은 사헌부 감찰, 병



조정랑, 춘추관 기사관을 거쳐 여러 주, 읍을 다스림에 청백리로 알려 졌다. 정희



량의 반란이후 사론이 분분할 때, 소수로서 직언(直言) 충간하여 조의(朝議)를 바



로 잡아 전 영남이 신원(伸寃)된 일이 있으며, 함평에 치적비가 세워졌다. 6세손



종필(宗泌)은 문장이 뛰어났고, 종헌(宗憲), 종국(宗國), 종식(宗軾)은 각각 생원



(生員)과 진사(進士)로 모두가 경사에 능통했고 명망이 있었으며 형진(馨進)은 호



가 괴음(槐陰)으로 족대부 재응(載應)에게 수학하여 지국이 준정하고 경학에 정통



하여 후진을 양성하고 유집 4권이 있으며 경진(景進)도 진사에 합격했다. 양정(養



楨)과 그의 아들 노선(魯善), 양정의 아우 양식(養植)과 그 아들 기선(驥善)은 모



두 생진과에 합격하여 향방에 널리 알려졌다. 양정(養楨)은 정종로(鄭宗魯)를, 노



선(魯善)은 유치명(柳致明)을 사사하여 문장이 능하고 율기와 검약으로 후덕하게



처신했다. 한 때 도천의 물망에 올랐으나 사양했고, 양정은 문집 8권, 노선은 12



권을 펴 냈으며, 양식, 기선 부자 또한 행의가 근엄하고 문사(文辭)가 탁월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고 유집이 전한다.





자. 김종덕(金宗德) 형제와 종반



---자는 도언(道彦), 호는 천사(川沙), 김종덕은 사원(士元)의 6세손으로 일찍이



퇴계의 연원 정맥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을 사사하여 퇴계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조선조 후기 학자로서 영남의 사종(師宗)으로 추앙을 받았다. 알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덕망과 학행으로 천거되어 의금부 도사(義禁府 都事)



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유자정을 짓고 강론함에 원근의 많은 선비들



이 문하에 출입했다. 문집(文集) 20권 부록(附錄) 4권, 성학입문(聖學入門) 상.하



권, 성학정로(聖學正路), 정본(正本), 초려문답(草蘆問答) 4권 예서(禮書) 등이 발



간되었으며, 고증(考證) 12권 및 동몽교재(童蒙敎材) 입본(入本) 등은 간행하지 못



한 채 유고로 남아있어 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사후 사림에서 불조위(不 



位)로 고유했고, 안동과 청송 사림에서 부강서당(鳧江書堂)을 창건하여 호(湖) 이



상정(李象靖) 사(沙) 김종덕(金宗德) 평(坪) 유치명(柳致明) 삼선생의 위패를 봉안



하려던 중 대원군의 철훼령으로 무산되고, 대산의 약중편(約中編)과 천사의 성학



정로(聖學正路), 정제의 주절휘요(朱節彙要)를 동시에 병간했으며, 부강서당은 지



금도 보존되고 있다. 1992년에 계명한문학연구회(啓明漢文學硏究會)에서 전책 7권



이 간행(刊行)되었다. 형제 4인중 종반 2인 모두 대산 이상정을 사사하여 문사가



출류하고 경학과 성리학에 밝았으며 대소과에 전원 급제하므로서 당세에 널리 알



려졌다. 중제 종경(宗敬)은 호가 구재(苟齋)로 문과 급제하여 성현 찰방(省峴 察



訪)과 사헌부 지평을 역임했으며, 선사 대산으로부터 심경강록(心經講錄)의 찬술



을 명받고 완성치 못한 가운데 졸함에 형 종덕과 아우 종섭(宗燮)이 필역하여 세



상에 전한다. 숙제 종발(宗發)은 호가 용연으로 문과 등제하여 장능 별검(莊陵 別



檢)과 사헌부 장령을 역임했다. 천품이 영매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사훈을 독신했



다. 정조는 그의 행의가 특이하고 학문이 고명하다고 찬양한 일이 있으며 문집 4



권과 유가요람(儒家要覽), 예서 등이 간행되었으며, 계제 종섭(宗燮)은 호가 제암



(濟庵)이며 천자가 수미하고 총명이 뛰어났으며, 문장이 겸비하여 동문의 추중을



받았다.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명상 채제공과 친교를 가졌고 서찰의 왕래가 있



었다. 49세로 조요(早夭)했으나 후학을 계도하고 문집 8권을 남겼다. 종제 종신



(宗臣), 종준(宗駿) 모두가 생원(生員)에 이르렀으며, 학행으로 향도에 알려졌고,



종준(宗駿)은 글씨에도 능해서 필첩(筆帖)과 유고가 전한다. 종경의 손 양린(養



麟), 종발(宗發)의 손 양범(養範), 종섭의 손 양징(養徵)은 모두 사마시에 합격되



고 경사에 박섭하였으며, 양범은 생원 진사 양시에 입방하고 가학을 상승하여 선



비들의 추중을 받았다. 시혜불보(施惠不報) 애린교화(愛린敎化)에 힘써 후진을 감



복케 했으며, 명고동(속칭 만동골)에 문생들이 스승의 거처로 3간 집을 세우니 이



가 곧 만동서숙(晩同書塾)이다. 만년에 여기를 별저로 삼아 훈학하고, 명사들의



내왕도 잦았으며 유집이 있다.





▣ 김정중 - 많은 수고에 감탄할 따름 입니다

▣ 김태서 -

▣ 김주회 - 대단하십니다. 언제 이 많은 양을 타이핑 하시는지요? 윤만 종친님의 열정과 열의에는 그저 고개가 숙여집니다. 의성군지는 분량도 방대하고 복사해서 며칠간 따로 공부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영환 -

▣ 태영/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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