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군지순례 14-3.(의성군 : 사촌 입향 6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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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6-13 16:31 조회1,732회 댓글0건본문
▣ 안동김씨 사촌입향 육백년 추원비(安東金氏 沙村入鄕 六百年 追遠碑)
---pp532∼534)
■ 소재지 : 점곡면 사촌리
---태백(太白)은 동쪽을 휘감았고 소백(小白)은 서북을 둘러섰다. 황지에서 발원
한 낙수(洛水) 천리의 연변에는 옥야가 전개되고 鴻儒碩德(홍유석덕)이 연달아 배
출되니 세인들은 영남을 가리켜 인재의 부고(府庫)라 하였다. 여기 소주(韶州)의
북촌 사진리(沙眞里)는 명산대하의 지맥지류가 알맞게 배분되어 산광수색은 명미
하고 기름진 전토가 수리에 연하여 백세전손의 훌륭한 기지로 알려진 곳이다.
---차(嗟)흡다. 우리 감목선조(監牧先祖) 휘(諱) 자첨(子瞻)께서는 분파조이신 도
평의공(都評議公) 휘(諱) 구정(九鼎)의 아들이시며 고려조의 훈업상신(勳業相臣)인
충렬공(忠烈公) 대조(大祖)의 5세손으로 천성이 호매하고 고지원식의 탁견이 있어
안동회곡(安東檜谷)에서 세거하다가 조선조가 개국됨에 시류에 알맞은 유신의 뜻
으로 청전세업을 버리고 사촌(沙村)에 조기하니 곧 조선의 개국년대였다. 조정에
서는 전조명신의 후손 예우로 감목관(監牧官)에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도광양덕
(韜光養德)의 처세와 영세를 내다보는 경륜으로 서림을 조성한 선조는 창업보다
어려운 수성의 요체를 전지자손(傳之子孫)하여 오늘의 우리를 이땅에 살게하니
모두가 석과불식의 업보일 것이다.
---맏아드님 휘(諱) 효온(孝溫)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올라 사직을 역임하
였으나 세조의 찬위를 보고 은거불사하고 문과동방인 박팽년(朴彭年) 최항(崔恒)
과 심교가 깊었다.
---둘째 휘 효항(孝恒)은 사정의 벼슬을 하였으나 문헌무징(文獻無徵)으로 상고
치 못하고 청송화현(靑松花峴)으로 개기정거하여 청명직절(淸名直節)로 수분하고
현재에 이른다. 효온의 아드님 휘 극해(克諧)는 생원과 문과에 등제하여 북평사
(北評事)와 지례현감(知禮縣監)을 지냈으며 청백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아드님 휘
광수(光粹)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태학(太學)에서 공부하던 중 사우간에 중망이 높
았으나 연산조의 사화로 시정의 불리함을 보고 낙향하여 영귀정(詠歸亭)을 짓고
존현양사(尊賢養士)에 힘쓴 일사로서 세칭 송은선생(松隱先生)이라 하였다.
---사후에는 사림의 공의로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으며 그 청고한 인격
을 독행군자요 소안백발의 지상선인이라고 외손 서애선생(西厓先生) 류성용(柳成
龍)은 기록하였다.
---둘째 휘 광복(光復)은 충순위를 역임하고 효우로 처신하여 백씨(伯氏) 송은
(松隱)선생과 함께 연방고(聯芳稿)를 남겼다. 그 후 아들 언걸(彦傑)과 같이 김해
덕산리에서 전손 세거하며 문물이 상승하고 일향의 문족이 되었다. 송은선생의
아들 휘 당( )은 기자전(箕子殿) 참봉(參奉)이시고 그 아드님 세우(世佑)는 통례
원인의(通禮院引儀)이시다. 인의공께서는 세 아들을 두었으니 휘 사원(士元) 사형
(士亨) 사정(士貞)으로 모두가 일방의 망사가 되었다.
---사원의 호는 만취당(晩翠堂)으로 퇴도고제(退陶高弟)이며 도산(陶山)의 월란암
(月瀾菴)에서 위기의 학문에 전심하여 선생의 심허를 받았으며 임란을 당하여는
구국의 일념으로 창의하여 정제장(整齊將)이 되고 후덕심인으로 진활류민하니 김
씨의창(金氏義倉)이라 별칭하였다. 사후에는 후산사에 제향하였으며 사형은 호를
독수헌(獨秀軒)이라 했고 문과에 올라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유일재(惟一齋)선생
김언기(金彦璣)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동생 사정과 함께 화왕산(火旺山)의 곽
망우당(郭忘憂堂) 의진(義陣)에서 활약하였고 아들 한(澣)과 같이 진보로 전거하
였다. 사정은 호를 후송재(後松齋)라 하였고 사숙계문(私淑溪門)으로 수학하였으
며 곽망우당(郭忘憂堂) 의진(義陣)에서 적신성서의 피끊는 시를 남겨 세상에 알려
졌다. 사후에는 지평에 추증되었고 도담사(道潭祠)에 제향하였다. 그 후에도 사마
문무와 문집학설을 남긴 후손이 번다하나 다 기록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거슬러 생각하면 입향후 이십대 열갑자(十甲子)에 이른 오늘날 세수인경의 범
절을 지키며 대과 십삼원 소과 이십팔원이 배출되고 문한도 빈빈하며 유맥(濡脈)
이 상승하여 교남벌족으로 원근에 알려지니 이찌 비양( 讓)의 덕을 닦은 현조의
여음이 아니리요?
---바야흐로 세도의 변천은 금석을 달리하여 농경사회는 산업사회로 정신문화는
물질문화로 집성대촌은 이산전거로 옮겨지는 것은 시대의 순리라, 다만 이 시기
를 당하여 내세의 후진에게 근원을 찾게하고 숭조(崇祖)의 정신을 함양하여 처심
적려의 생각을 기르고자 선조의 체취가 서린 유서깊은 서림에 추원비(追遠碑)를
세워 이 곳을 찾는 후손에게 고향의 상념을 심어주고 우리의 내력을 영세에 전하
고자 후손 사수(沙秀)씨 등의 주선으로 문원의 성력을 모아 비석을 세우면서 삼
가 명하노니
매봉산에 내린 용(龍)이 서림(西林)에와 머무르고
유심(幽深)하다 沂水濫觴(기수람상) 이 강산에 응했도다.
영철(潁哲)할사 선조님이 조기길지(肇基吉地) 하셨으며
비양(卑讓)으로 덕을 삼고 성경(誠敬)으로 수분(守分)했네.
명창정궤(明窓淨 ) 밝은 뜻은 지고렴사(志高廉士) 길렀으며
청화(淸和)로운 몸가짐은 유방백세(遺芳百世) 이아닌가
함양훈도(涵養薰陶) 깊은 훈회(訓誨) 시례가성(詩禮家聲) 아름답고
번연(繁衍)할사 운잉(雲仍)이여 천세상전(千世相傳) 하옵고져
- - - - - - - - - - - - - - - - - - - 西紀 1992年 壬申 梅雨節
- - - - - - - - - - - - - - - - - - - 後 孫 昌 會 謹撰
- - - - - - - - - - - - - - - - - - - 義城後人 金九稷 謹書
▣ 김정중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 김주회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영환 -
▣ 태영/문 -
---pp532∼534)
■ 소재지 : 점곡면 사촌리
---태백(太白)은 동쪽을 휘감았고 소백(小白)은 서북을 둘러섰다. 황지에서 발원
한 낙수(洛水) 천리의 연변에는 옥야가 전개되고 鴻儒碩德(홍유석덕)이 연달아 배
출되니 세인들은 영남을 가리켜 인재의 부고(府庫)라 하였다. 여기 소주(韶州)의
북촌 사진리(沙眞里)는 명산대하의 지맥지류가 알맞게 배분되어 산광수색은 명미
하고 기름진 전토가 수리에 연하여 백세전손의 훌륭한 기지로 알려진 곳이다.
---차(嗟)흡다. 우리 감목선조(監牧先祖) 휘(諱) 자첨(子瞻)께서는 분파조이신 도
평의공(都評議公) 휘(諱) 구정(九鼎)의 아들이시며 고려조의 훈업상신(勳業相臣)인
충렬공(忠烈公) 대조(大祖)의 5세손으로 천성이 호매하고 고지원식의 탁견이 있어
안동회곡(安東檜谷)에서 세거하다가 조선조가 개국됨에 시류에 알맞은 유신의 뜻
으로 청전세업을 버리고 사촌(沙村)에 조기하니 곧 조선의 개국년대였다. 조정에
서는 전조명신의 후손 예우로 감목관(監牧官)에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도광양덕
(韜光養德)의 처세와 영세를 내다보는 경륜으로 서림을 조성한 선조는 창업보다
어려운 수성의 요체를 전지자손(傳之子孫)하여 오늘의 우리를 이땅에 살게하니
모두가 석과불식의 업보일 것이다.
---맏아드님 휘(諱) 효온(孝溫)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올라 사직을 역임하
였으나 세조의 찬위를 보고 은거불사하고 문과동방인 박팽년(朴彭年) 최항(崔恒)
과 심교가 깊었다.
---둘째 휘 효항(孝恒)은 사정의 벼슬을 하였으나 문헌무징(文獻無徵)으로 상고
치 못하고 청송화현(靑松花峴)으로 개기정거하여 청명직절(淸名直節)로 수분하고
현재에 이른다. 효온의 아드님 휘 극해(克諧)는 생원과 문과에 등제하여 북평사
(北評事)와 지례현감(知禮縣監)을 지냈으며 청백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아드님 휘
광수(光粹)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태학(太學)에서 공부하던 중 사우간에 중망이 높
았으나 연산조의 사화로 시정의 불리함을 보고 낙향하여 영귀정(詠歸亭)을 짓고
존현양사(尊賢養士)에 힘쓴 일사로서 세칭 송은선생(松隱先生)이라 하였다.
---사후에는 사림의 공의로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으며 그 청고한 인격
을 독행군자요 소안백발의 지상선인이라고 외손 서애선생(西厓先生) 류성용(柳成
龍)은 기록하였다.
---둘째 휘 광복(光復)은 충순위를 역임하고 효우로 처신하여 백씨(伯氏) 송은
(松隱)선생과 함께 연방고(聯芳稿)를 남겼다. 그 후 아들 언걸(彦傑)과 같이 김해
덕산리에서 전손 세거하며 문물이 상승하고 일향의 문족이 되었다. 송은선생의
아들 휘 당( )은 기자전(箕子殿) 참봉(參奉)이시고 그 아드님 세우(世佑)는 통례
원인의(通禮院引儀)이시다. 인의공께서는 세 아들을 두었으니 휘 사원(士元) 사형
(士亨) 사정(士貞)으로 모두가 일방의 망사가 되었다.
---사원의 호는 만취당(晩翠堂)으로 퇴도고제(退陶高弟)이며 도산(陶山)의 월란암
(月瀾菴)에서 위기의 학문에 전심하여 선생의 심허를 받았으며 임란을 당하여는
구국의 일념으로 창의하여 정제장(整齊將)이 되고 후덕심인으로 진활류민하니 김
씨의창(金氏義倉)이라 별칭하였다. 사후에는 후산사에 제향하였으며 사형은 호를
독수헌(獨秀軒)이라 했고 문과에 올라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유일재(惟一齋)선생
김언기(金彦璣)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동생 사정과 함께 화왕산(火旺山)의 곽
망우당(郭忘憂堂) 의진(義陣)에서 활약하였고 아들 한(澣)과 같이 진보로 전거하
였다. 사정은 호를 후송재(後松齋)라 하였고 사숙계문(私淑溪門)으로 수학하였으
며 곽망우당(郭忘憂堂) 의진(義陣)에서 적신성서의 피끊는 시를 남겨 세상에 알려
졌다. 사후에는 지평에 추증되었고 도담사(道潭祠)에 제향하였다. 그 후에도 사마
문무와 문집학설을 남긴 후손이 번다하나 다 기록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거슬러 생각하면 입향후 이십대 열갑자(十甲子)에 이른 오늘날 세수인경의 범
절을 지키며 대과 십삼원 소과 이십팔원이 배출되고 문한도 빈빈하며 유맥(濡脈)
이 상승하여 교남벌족으로 원근에 알려지니 이찌 비양( 讓)의 덕을 닦은 현조의
여음이 아니리요?
---바야흐로 세도의 변천은 금석을 달리하여 농경사회는 산업사회로 정신문화는
물질문화로 집성대촌은 이산전거로 옮겨지는 것은 시대의 순리라, 다만 이 시기
를 당하여 내세의 후진에게 근원을 찾게하고 숭조(崇祖)의 정신을 함양하여 처심
적려의 생각을 기르고자 선조의 체취가 서린 유서깊은 서림에 추원비(追遠碑)를
세워 이 곳을 찾는 후손에게 고향의 상념을 심어주고 우리의 내력을 영세에 전하
고자 후손 사수(沙秀)씨 등의 주선으로 문원의 성력을 모아 비석을 세우면서 삼
가 명하노니
매봉산에 내린 용(龍)이 서림(西林)에와 머무르고
유심(幽深)하다 沂水濫觴(기수람상) 이 강산에 응했도다.
영철(潁哲)할사 선조님이 조기길지(肇基吉地) 하셨으며
비양(卑讓)으로 덕을 삼고 성경(誠敬)으로 수분(守分)했네.
명창정궤(明窓淨 ) 밝은 뜻은 지고렴사(志高廉士) 길렀으며
청화(淸和)로운 몸가짐은 유방백세(遺芳百世) 이아닌가
함양훈도(涵養薰陶) 깊은 훈회(訓誨) 시례가성(詩禮家聲) 아름답고
번연(繁衍)할사 운잉(雲仍)이여 천세상전(千世相傳) 하옵고져
- - - - - - - - - - - - - - - - - - - 西紀 1992年 壬申 梅雨節
- - - - - - - - - - - - - - - - - - - 後 孫 昌 會 謹撰
- - - - - - - - - - - - - - - - - - - 義城後人 金九稷 謹書
▣ 김정중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 김주회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영환 -
▣ 태영/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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