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군지순례 14-4.(의성군 : 사촌의 자랑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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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6-13 16:35 조회1,739회 댓글0건본문
▣ 만취당(晩翠堂) pp459∼460
---만취당은 점곡면 사촌리(沙村里) 한가운데에 자리한 동발 대청이다. 이 대청
의 배경은 자하산(紫霞山)이며, 이곳에서 6십리 남쪽에 솟은 의성의 명산 금성산
(金城山)이 안산이다. 낙동강의 지류 기천(沂川)이 완만하게 굽어 흐르는 언저리
200여m 북녘에 세워져 풍수설에 의해 명당이라고 이른다. 이 건물은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의 증손이며, 퇴계 문하의 고제(高弟)였던 만취당(晩翠堂) 김사원
(金士元)이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582년에 건조했다. 그는 1539년
이곳 사촌에서 태어나 퇴계선생에게 사사하며 도산(陶山)의 월란정사(月瀾精舍)에
서 수학하고 임진란 때는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의 의진에 참여 의성(義城)
정제장(整齊將)으로 활약한 바 있다. 난이 끝난 후에는 많은 이재민을 구휼하여
향중에서 "김씨 의창(金氏 義倉)"이라는 칭송을 받았고, 은의를 입힌 사람들의 사
례는 일체 사양하여, 이 고장 사람들이 오래 칭송하고 추모해 마지 않았는데,
1601년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누각의 구조는 정면 4간, 측면 2간으로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함께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가(私家)의
목조 건물로 꼽히고 있다. 창건 이후 줄곳 김씨 종가의 대청 겸 문중 집회소로
이용하다가 1727년에는 거실로 사용하기 위해 건물 뒤편 서쪽에 1간, 동쪽의 2간
의 방을 연결하여 지으니 그 양식이 여느 누대 정각과 달라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1764년에는 들보를 갈아 넣어 번와를 하는 등 크게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
고 있다.
---정조조에 영남의 학맥을 이은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의 기문에 의하면
「땅이 후미지고 산은 깊은데, 큰 선비와 운사(韻士 : 시인)가 노닐며 읊음이 무
릇 얼마였던고. 당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퇴계선생의 형 온계(溫溪) 이도헌(李
都憲 : 주, 도헌은 大司憲) 선생이 송은공을 문안 시주로 응수하다가 돌아갔고, 당
이 이루어짐에 서애(西涯) 류문충공(柳文忠公) 선생이 누대에 올라 면계했다. 여
헌(旅軒) 장문강공(張文康公) 선생은 일찍이 이곳을 거닐었음에 감개하고 돌아가
이 고을 사람을 만나면 만년송(萬年松)의 안부를 물었다. 또 이호은(李湖隱), 신란
재(申 齋=悅道), 류졸재(柳拙齋=元之), 김학사(金鶴沙=應祖), 김표은(金瓢隱=是
), 김지촌(金芝村=邦杰) 등 여러 선생이 이곳에서 읊조렸으니, 그 모두가 옛날
을 살피고 후인을 격려하려는 뜻이었다 . . . .」【원문은 생략】---현판 글씨는
만취당 김사원과 동문인 한석봉(韓石峯)이 썼다. 1971년 김덕화 경북지시가 내방
했을 때 보수비 60만원을 지원하여 일부 수리했고, 1983년 지방유형문화재 제169
호로 지정된 바 있다.
참고문헌 「의성의 전통」「의성문화」
▣ 장대서원 중건기(藏待書院 重建記) pp475∼476
---문묘(文廟)를 세워 선성(先聖)을 향사하고 향교(鄕校)를 세워 유생을 가르침은
수령방백(守令方伯)의 소임이요, 사당(祠堂)을 세워 선현을 받들고 서숙(書塾)을
차려 제자를 양성함은 향중 사림의 일이다.
---우리 고을 소주(韶州)는 명산대하의 자락을 벗어난 영남의 심장이요, 추노(鄒
魯)의 원향인 안동과 더불어 안의(安義)로 소칭되는 명향이며 현남(縣南)의 오동
산서록(梧棟山西麓)에 향양(向陽)한 명기는 향중 사선생(四先生)을 제향한 장대서
원(藏待書院)이 있는 곳이다.
---이 서원은 1610년 광해 무술에 오봉신지제(梧峯申之悌) 선생이 강서하고자 복
축(卜築)한 횡사( 舍)로서 오봉공 몰(歿)후 37년인 1662년 현종 임인에 경현사
(景賢祠)를 세워 선생을 향사하고 익년(翌年)에 경정이민성(敬亭李民宬) 선생을
병향했다. 1702년 숙종 임오에 사(祠)를 서원(書院)으로 추승하고 일향선현의 불
이이사(不二異祠)라는 사림의 취의(聚議)로 교전의 이산서원(尼山書院)에 예향하
던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 선생과 회당(悔堂) 신원록(申元祿) 선생을 함께 받
들면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청일(淸逸)로 후학을 계도한 송은(松隱) 선생, 효제
천실(孝悌踐實)로 조가(朝家) 작설(綽楔)의 영을 얻은 회당(悔堂) 선생, 석덕진순
(碩德眞純)으로 향사를 교회(敎誨)한 오봉(梧峯) 선생, 청고한 문장이 백세의 사종
(師宗)으로 일컬어진 경정(敬亭) 선생, 이는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 선생이 상
향 축문에서 칭송한 글이다. 이후 향사림에 의해 주생(酒牲)의 예를 올리다가
1868년 고종 무진 8월에 조령(朝令)으로 훼철(毁撤)되었다. 사현예손(四賢裔孫)의
주선으로 소략(疏 )한 강당과 초옥의 주사(廚舍) 일동(一棟)이 이루어지고 네모
진 원장(垣墻)안에 상석(床石)으로 설단(設壇)하여 행사를 실시함에 사림의 개연
추모지정은 금할 길 없었다. 생각하면 수류운공(水流雲空)의 역년이 재갑을 맞이
한 무진년의 어느날 당회를 열고 묘우중건의 뜻을 모아 회당공(悔堂公)의 후손
달섭(達燮)씨가 임사를 맡고 오봉공(梧峯公)의 예손 태근(泰根)씨가 현재(縣宰)로
재임시 구재(鳩財)와 보조로 사묘(祠廟)가 신성되었다.
---수년이 지난 병자매하(丙子梅夏)의 모일(某日) 회당공(悔堂公)의 초예(肖裔)
진돌(鎭乭)씨의 간사로 다시 당회를 열어 강당중건을 취의로 돈정(敦定)하여 기자
(基資)를 분담하고 여액 3천4백만원은 정해걸(丁海杰) 군수의 도움을 받았다. 아!
감회로워라 잡목과 돌담이 뒤엉킨 옛자리를 말끔히 정리하고 치석을 올려 기초를
다졌으며, 앞 뒤 원주(圓柱)의 사간반퇴(四間反退)의 부연(附椽)을 달아 추녀끝이
하늘을 받치고 날아갈 듯 선명하다. 동서양실(東西兩室)은 온돌이요 가운데는 대
청이며, 전면반퇴는 마루로 연했다. 자오(子午)의 향배가 밝으며 동온하정의 이수
에 적합하다. 당(堂)의 공준을 앞둔 어느날 문자로서 사실을 기술하라 향부로(鄕
父老) 명이 창회(昌會)에게 전해 졌다
---천식(淺識)이라 외람된 줄 알면서도 관계문헌을 상고하여 본말을 밝히고 이풍
세변한 뒷날의 자료에 공하고자 삼가 기문을 쓴다.
---------------------------1996년 병자(丙子) 중양절(重陽節)
---------------------후학(後學) 안동(安東) 김창회(金昌會) 근기(謹記)
▣ 후산정사기(後山精舍記) pp484∼485
---산은 높고 웅장함보다 영기가 서려야 이름이 있고 물은 깊고 맑음보다 용(龍)
이 서식(棲息)하므로 세상에 알려진다. 대개 유수한 산천과 명미한 풍광은 선현의
얼이 깃드므로 더욱 빛을 발한다. 고로 중국의 무이(武夷)는 회암부자(晦菴夫子)
의 정사가 있으므로 천하에 드러났고 청량(淸凉)과 도산(陶山)은 퇴계선생(退溪先
生)께서 장수하여 해동이학(海東理學)의 진원지로 널리 알려졌다.
여기 후산정사(後山精舍)는 선조(先祖) 만취당선생(晩翠堂先生)의 위패를 봉안하
고 일향의 사림과 후손들이 모여 춘추향(春秋享)을 올리던 곳으로 자하산(紫霞山)
남록(南麓) 향양(向陽)한 비탈에 청향노회(靑香老檜)가 백년의 상설(霜雪)을 무릅
쓰고 울연(蔚然)히 둘러섰고 와구(瓦丘)와 서림(西林)이 샛바람을 막아 한결 아늑
한 자리에 천년의 이끼가 덮힌 창연한 고가는 뜻있는 행객의 금회(襟懷)를 여미
게 한다.
---선조(先祖)께서는 1539년 중종(中宗) 기해(己亥) 교남고사(嶠南高士) 송은(松
隱) 선생의 증손으로 출생하시니 천성이 자인 관후하시고 일찍이 가학(家學)에
유염(濡染)되었다.
---22세시에는 존고종숙(尊姑從叔)인 겸암(謙菴) 柳선생 운룡(雲龍)과 더불어 계
문(溪門)에 부급(負 )하니 선생께서 손수 무이관선재시(武夷觀善齋詩, 부급하방
래(負 何方來) 금조차동석(今朝此同席) 일용무여사(日用無餘事) 상간구노력(相看
俱努力))를 써서 내리시고 군능유오차의(君能喩吾此意) 하심에 선조(先祖)께서는
가슴깊이 새겨들은 후(後), 과업(科業)의 뜻을 버리고 위기의 학문에 전심하였다.
동문 성재금(惺齋琴)선생 난수(蘭秀), 간재이(艮齋李)선생 덕홍(德弘)과 같이 때로
는 선생을 모시고 청량산(淸 山) 연대사(蓮臺寺)와 만월암(滿月菴), 월란암(月
菴)을 내왕하며 십재청익(十載請益)으로 15회에 환( )한 문답을 도산전서(陶山全
書)에 남겨 탁연히 고제(高弟)가 되었으며 임란(壬亂)을 당하여는 향사림(鄕士林)
의 추대(推戴)로 의성정재장(義城整齋將)이 되어 활약(活躍)하시고 휼민시혜(恤民
施惠)의 자성(慈性)은 향방(鄕邦)에 알려져 원근(遠近)의 기민(飢民)들이 운집(雲
集)하였다고 행장(行狀)에 기록되었다. 만년(晩年)에는 사훈(師訓)인 신언행(愼言
行), 근독서(勤讀書), 무농상(務農桑)을 좌우명(座右銘)으로 삼고 생활하시다가
1601년 신축 63세로 천수(天壽)를 다하셨다. 차(嗟)흡다.!
---오늘날 내외 운잉(雲仍)의 번연(繁衍)함이 모두가 선조의 종덕여음(種德餘蔭)
이리라. 아! 선조가 역책(易 )하신이 146년이 지난 1747년 정묘(丁卯)에 선생의
고산경행(高山景行)의 참뜻을 존모(尊慕)하여 재사(齋舍)를 세우고 기묘(己卯)에는
묘우(廟宇)가 완성되어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봉안절차(奉安節次)를 정하고
후산정사(後山精舍)라 칭하였다. 계사(癸巳)에는 주사(廚舍)를 짓고 을미(乙未)에
는 원장(垣墻)을 설치하여 그 해 10월 20일 사림(士林)과 내외자손이 모인 가운데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백여년간 춘추향화(春秋香火)를 올리다가 1868년 무진(戊
辰) 국령(國令)에 의해 묘우(廟宇)는 헐려 유지(遺趾)만 남고 정사(精舍)는 현존하
니 후손들의 개연추모(慨然追慕)의 감회(感懷)가 무궁(無窮)하다. 어느때 복설(復
設)이 있기를 바라고 누변(累變)하는 창상(滄桑)과 작금을 달리하는 세태에 전후
사(前後事)를 징(徵)하고자 선조의 실기를 상고하여 전말을 약기(略記)한다.
---------------------서기 1980년(경신(庚申)) 모춘절(暮春節)
--------------------------후손(後孫) 창회(昌會) 근기(謹記)
▣ 사촌 서림(沙村 西林) pp506∼507
---점곡면(點谷面) 사촌리(沙村里) 서쪽에 길이 약 800m, 폭 40여m의 숲이 있다.
이 숲에는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 약 10종의 노거수(老巨樹)가 울창하
게 솟아 있으니, 수령은 300년에서 600년 사이, 나무 높이는 대개 15m∼20m 정
도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 전 고려 말기, 안동김씨 입향 시조 감목공(監牧
公) 자첨(子瞻)이 안동으로부터 이곳 사촌(沙村)으로 이거할 때 마을 서편 긴 평
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심은 방풍림이다. 까닭에 소유주는 안동김씨
문중으로 되어 있다. 계절에 따라 그 경관은 바뀌어 지지만 가을철의 단풍은 특
히 절경을 이루고, 철따라 새와 짐승들이 우짓고 노닐며, 한여름에는 농부들이 일
손을 멈추고 짙은 녹음 아래 낮잠을 즐기기도 한다. 이 숲은 또한 임진란 수습
공신이며 퇴계의 학통을 승계한 석학 서애(西厓) 류성용(柳成龍)의 출생지라는 전
설이 있다.
---1972년 내무부에서 발간한 「보호수지(保護樹誌)」에는 이 숲의 회나무, 상수
리나무가 거수목으로 등재되어 있고, 또한 경상북도 지정 보호림 1등급 9-75호로
등록된 바 있다. 1972년에는 홍수의 피해를 막고자 사천(沙川) 양쪽에 축대공사를
했으며 길손과 마을 사람들의 휴식을 위해 벤치시설도 갖추었다. 한편 점곡초등
학교 자연관찰원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학생들의 야영훈련 교육의 집회행사, 예비
군, 민방위대, 훈련 교장으로도 제공된다. 1986년 면장 김사수(金沙秀)씨의 주선으
로 사적비(事蹟碑 : 金昌會 撰)를 세웠다.
▣ 사촌 서림사적비(沙村 西林事蹟碑) pp530∼531)
■소재지 :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서림내)
---이 비석은 경상북도 보호림 1등급 9-75호로 지정된 사촌 서림의 조성 경위와
연대를 밝혔으며 현재의 관리상태를 기록하였다.
■사촌 서림사적비문(沙村 西林事蹟碑文)
---동해를 바라보며 남쪽으로 내리 뻗은 태백산맥이 보현산(普賢山)에서 멈추었
고 그 일지(一枝)가 서북으로 거슬러서 솟재(鼎嶺)가 우뚝하다. 이곳에서 발원한
기수(沂水)가 협곡을 따라 장장 팔십리를 관류하여 대천을 이루고 다시 서북으로
구비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이 언저리에 주회 수십리의 옥야(沃野)가 펼쳐졌고
여기에 자리잡은 사촌은 영남의 명기로 널리 알려졌다. 높은 산, 깊은 물은 천작
으로 설화를 남겼고, 고목과 노거수림은 인작으로서 연유가 있다. 거듭되는 창상
에 후손을 찾을 수 없는 라씨(羅氏), 손씨(孫氏)의 뒤를 이어 고려 충렬왕 때 도
원수 충렬공 김방경의 5세손 함길도 감목관 자첨공(高麗 忠烈王 때 都元帥 忠烈
公 金方慶의 5世孫 咸吉道 監牧官 子瞻公)이 서기 1392년(태조 원년 임신) 안동
(安東) 회곡(檜谷)으로부터 이곳에 입향하여 세전의 기지를 닦았다. 이후 서편의
허를 막기 위해 조림한 가로숲은 대곡천을 중심으로 양안에 자리하여 남북 1㎞,
동서 40m에 걸쳐 둘레 3∼4m, 높이 15∼20m 정도의 태고연한 수목이 울연히 들
어섰다. 주종을 이루는 수종은 상수리와 괴화나무, 느티나무 등이나 그 외 수십종
의 잡목이 자생하고 있으며 산토끼, 다람쥐 등 야생조수가 사시로 서식하고 후조
외(왜)가리는 매년 우수 무렵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새끼를 부화하고 백로와 추분
사이에 남쪽으로 가버린다. 대개 으슥한 바위나 고목, 거수에는 전설과 토속 신앙
이 깃들어 있듯이 여기에도 임란(壬亂)의 치란명상이며 송은(松隱) 김광수(金光
粹) 선생의 외손자이신 서애(西厓) 류성용(柳成龍) 선생의 출생지라는 전설과 사
촌리의 연중 무사 안녕을 비는 성황신(城隍神)을 이곳에 봉안한 바 있었는데 영
정조(英正祖) 시대의 유학자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선생에게 현몽하여 기령
산(奇靈山)에 이안했다.(축문 령자조령 시봉서림 난피풍우 현몽천사 . . . . . 이하
략. 祝文 靈自鳥嶺 始奉西林 難避風雨 顯夢川沙 . . . . . 以下 略) 지금도 천고의
비밀을 간직한 채 무제평원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삼동에는 삭풍을 막아 동리를
보호하고 춘하에는 계절풍을 막아 농작물의 피해를 줄이며 성하에는 벌레와 모기
가 없는 녹음 아래서 농부들이 땀을 식히고 오수를 즐긴다. 옛날에는 지나가는
운사(韻士)들이 시상을 일으켰고 어린 시절 여기에서 뛰놀던 이향객(離鄕客)에게
는 향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세사가 변천함에 따라 새마을 다리가 놓여지고
인마의 내왕이 차량의 통행으로 바꿔지니 왕사는 한갓 추억으로 남을 뿐이다. 서
기 1972년에 경상북도 보호수 1등급 9∼75호로 지정되고 자연보호정책의 일환으
로 행정기관이 관리에 힘쓰고 있다. 이에 선조(先祖)의 슬기와 원대한 경륜에 감
복하고 그 사적을 후인에게 전하고자 점곡면장 김사수(金沙秀)씨의 주관으로 재
일(在日) 김희학(金熙鶴), 희범(熙範)의 협찬을 받아 이 사적비(事蹟碑)를 세운다.
- - - - - - - - - - - - - - - - - -1986년 3월 20일
- - - - - - - - - - - - - - - - - - 金 昌 會 글 짓고
- - - - - - - - - - - - - - - - - - 柳 時 洵 글씨 쓰다
▣ 김정중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글 감사드립니다.
▣ 김주회 - 감사합니다. 윤만 종친님! 시군지는 어디에서 구하시는지요? 궁금합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재익 - 사촌에 관심 감사 합니다.
▣ 김영환 -
▣ 태영/문 -
---만취당은 점곡면 사촌리(沙村里) 한가운데에 자리한 동발 대청이다. 이 대청
의 배경은 자하산(紫霞山)이며, 이곳에서 6십리 남쪽에 솟은 의성의 명산 금성산
(金城山)이 안산이다. 낙동강의 지류 기천(沂川)이 완만하게 굽어 흐르는 언저리
200여m 북녘에 세워져 풍수설에 의해 명당이라고 이른다. 이 건물은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의 증손이며, 퇴계 문하의 고제(高弟)였던 만취당(晩翠堂) 김사원
(金士元)이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582년에 건조했다. 그는 1539년
이곳 사촌에서 태어나 퇴계선생에게 사사하며 도산(陶山)의 월란정사(月瀾精舍)에
서 수학하고 임진란 때는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의 의진에 참여 의성(義城)
정제장(整齊將)으로 활약한 바 있다. 난이 끝난 후에는 많은 이재민을 구휼하여
향중에서 "김씨 의창(金氏 義倉)"이라는 칭송을 받았고, 은의를 입힌 사람들의 사
례는 일체 사양하여, 이 고장 사람들이 오래 칭송하고 추모해 마지 않았는데,
1601년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누각의 구조는 정면 4간, 측면 2간으로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함께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가(私家)의
목조 건물로 꼽히고 있다. 창건 이후 줄곳 김씨 종가의 대청 겸 문중 집회소로
이용하다가 1727년에는 거실로 사용하기 위해 건물 뒤편 서쪽에 1간, 동쪽의 2간
의 방을 연결하여 지으니 그 양식이 여느 누대 정각과 달라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1764년에는 들보를 갈아 넣어 번와를 하는 등 크게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
고 있다.
---정조조에 영남의 학맥을 이은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의 기문에 의하면
「땅이 후미지고 산은 깊은데, 큰 선비와 운사(韻士 : 시인)가 노닐며 읊음이 무
릇 얼마였던고. 당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퇴계선생의 형 온계(溫溪) 이도헌(李
都憲 : 주, 도헌은 大司憲) 선생이 송은공을 문안 시주로 응수하다가 돌아갔고, 당
이 이루어짐에 서애(西涯) 류문충공(柳文忠公) 선생이 누대에 올라 면계했다. 여
헌(旅軒) 장문강공(張文康公) 선생은 일찍이 이곳을 거닐었음에 감개하고 돌아가
이 고을 사람을 만나면 만년송(萬年松)의 안부를 물었다. 또 이호은(李湖隱), 신란
재(申 齋=悅道), 류졸재(柳拙齋=元之), 김학사(金鶴沙=應祖), 김표은(金瓢隱=是
), 김지촌(金芝村=邦杰) 등 여러 선생이 이곳에서 읊조렸으니, 그 모두가 옛날
을 살피고 후인을 격려하려는 뜻이었다 . . . .」【원문은 생략】---현판 글씨는
만취당 김사원과 동문인 한석봉(韓石峯)이 썼다. 1971년 김덕화 경북지시가 내방
했을 때 보수비 60만원을 지원하여 일부 수리했고, 1983년 지방유형문화재 제169
호로 지정된 바 있다.
참고문헌 「의성의 전통」「의성문화」
▣ 장대서원 중건기(藏待書院 重建記) pp475∼476
---문묘(文廟)를 세워 선성(先聖)을 향사하고 향교(鄕校)를 세워 유생을 가르침은
수령방백(守令方伯)의 소임이요, 사당(祠堂)을 세워 선현을 받들고 서숙(書塾)을
차려 제자를 양성함은 향중 사림의 일이다.
---우리 고을 소주(韶州)는 명산대하의 자락을 벗어난 영남의 심장이요, 추노(鄒
魯)의 원향인 안동과 더불어 안의(安義)로 소칭되는 명향이며 현남(縣南)의 오동
산서록(梧棟山西麓)에 향양(向陽)한 명기는 향중 사선생(四先生)을 제향한 장대서
원(藏待書院)이 있는 곳이다.
---이 서원은 1610년 광해 무술에 오봉신지제(梧峯申之悌) 선생이 강서하고자 복
축(卜築)한 횡사( 舍)로서 오봉공 몰(歿)후 37년인 1662년 현종 임인에 경현사
(景賢祠)를 세워 선생을 향사하고 익년(翌年)에 경정이민성(敬亭李民宬) 선생을
병향했다. 1702년 숙종 임오에 사(祠)를 서원(書院)으로 추승하고 일향선현의 불
이이사(不二異祠)라는 사림의 취의(聚議)로 교전의 이산서원(尼山書院)에 예향하
던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 선생과 회당(悔堂) 신원록(申元祿) 선생을 함께 받
들면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청일(淸逸)로 후학을 계도한 송은(松隱) 선생, 효제
천실(孝悌踐實)로 조가(朝家) 작설(綽楔)의 영을 얻은 회당(悔堂) 선생, 석덕진순
(碩德眞純)으로 향사를 교회(敎誨)한 오봉(梧峯) 선생, 청고한 문장이 백세의 사종
(師宗)으로 일컬어진 경정(敬亭) 선생, 이는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 선생이 상
향 축문에서 칭송한 글이다. 이후 향사림에 의해 주생(酒牲)의 예를 올리다가
1868년 고종 무진 8월에 조령(朝令)으로 훼철(毁撤)되었다. 사현예손(四賢裔孫)의
주선으로 소략(疏 )한 강당과 초옥의 주사(廚舍) 일동(一棟)이 이루어지고 네모
진 원장(垣墻)안에 상석(床石)으로 설단(設壇)하여 행사를 실시함에 사림의 개연
추모지정은 금할 길 없었다. 생각하면 수류운공(水流雲空)의 역년이 재갑을 맞이
한 무진년의 어느날 당회를 열고 묘우중건의 뜻을 모아 회당공(悔堂公)의 후손
달섭(達燮)씨가 임사를 맡고 오봉공(梧峯公)의 예손 태근(泰根)씨가 현재(縣宰)로
재임시 구재(鳩財)와 보조로 사묘(祠廟)가 신성되었다.
---수년이 지난 병자매하(丙子梅夏)의 모일(某日) 회당공(悔堂公)의 초예(肖裔)
진돌(鎭乭)씨의 간사로 다시 당회를 열어 강당중건을 취의로 돈정(敦定)하여 기자
(基資)를 분담하고 여액 3천4백만원은 정해걸(丁海杰) 군수의 도움을 받았다. 아!
감회로워라 잡목과 돌담이 뒤엉킨 옛자리를 말끔히 정리하고 치석을 올려 기초를
다졌으며, 앞 뒤 원주(圓柱)의 사간반퇴(四間反退)의 부연(附椽)을 달아 추녀끝이
하늘을 받치고 날아갈 듯 선명하다. 동서양실(東西兩室)은 온돌이요 가운데는 대
청이며, 전면반퇴는 마루로 연했다. 자오(子午)의 향배가 밝으며 동온하정의 이수
에 적합하다. 당(堂)의 공준을 앞둔 어느날 문자로서 사실을 기술하라 향부로(鄕
父老) 명이 창회(昌會)에게 전해 졌다
---천식(淺識)이라 외람된 줄 알면서도 관계문헌을 상고하여 본말을 밝히고 이풍
세변한 뒷날의 자료에 공하고자 삼가 기문을 쓴다.
---------------------------1996년 병자(丙子) 중양절(重陽節)
---------------------후학(後學) 안동(安東) 김창회(金昌會) 근기(謹記)
▣ 후산정사기(後山精舍記) pp484∼485
---산은 높고 웅장함보다 영기가 서려야 이름이 있고 물은 깊고 맑음보다 용(龍)
이 서식(棲息)하므로 세상에 알려진다. 대개 유수한 산천과 명미한 풍광은 선현의
얼이 깃드므로 더욱 빛을 발한다. 고로 중국의 무이(武夷)는 회암부자(晦菴夫子)
의 정사가 있으므로 천하에 드러났고 청량(淸凉)과 도산(陶山)은 퇴계선생(退溪先
生)께서 장수하여 해동이학(海東理學)의 진원지로 널리 알려졌다.
여기 후산정사(後山精舍)는 선조(先祖) 만취당선생(晩翠堂先生)의 위패를 봉안하
고 일향의 사림과 후손들이 모여 춘추향(春秋享)을 올리던 곳으로 자하산(紫霞山)
남록(南麓) 향양(向陽)한 비탈에 청향노회(靑香老檜)가 백년의 상설(霜雪)을 무릅
쓰고 울연(蔚然)히 둘러섰고 와구(瓦丘)와 서림(西林)이 샛바람을 막아 한결 아늑
한 자리에 천년의 이끼가 덮힌 창연한 고가는 뜻있는 행객의 금회(襟懷)를 여미
게 한다.
---선조(先祖)께서는 1539년 중종(中宗) 기해(己亥) 교남고사(嶠南高士) 송은(松
隱) 선생의 증손으로 출생하시니 천성이 자인 관후하시고 일찍이 가학(家學)에
유염(濡染)되었다.
---22세시에는 존고종숙(尊姑從叔)인 겸암(謙菴) 柳선생 운룡(雲龍)과 더불어 계
문(溪門)에 부급(負 )하니 선생께서 손수 무이관선재시(武夷觀善齋詩, 부급하방
래(負 何方來) 금조차동석(今朝此同席) 일용무여사(日用無餘事) 상간구노력(相看
俱努力))를 써서 내리시고 군능유오차의(君能喩吾此意) 하심에 선조(先祖)께서는
가슴깊이 새겨들은 후(後), 과업(科業)의 뜻을 버리고 위기의 학문에 전심하였다.
동문 성재금(惺齋琴)선생 난수(蘭秀), 간재이(艮齋李)선생 덕홍(德弘)과 같이 때로
는 선생을 모시고 청량산(淸 山) 연대사(蓮臺寺)와 만월암(滿月菴), 월란암(月
菴)을 내왕하며 십재청익(十載請益)으로 15회에 환( )한 문답을 도산전서(陶山全
書)에 남겨 탁연히 고제(高弟)가 되었으며 임란(壬亂)을 당하여는 향사림(鄕士林)
의 추대(推戴)로 의성정재장(義城整齋將)이 되어 활약(活躍)하시고 휼민시혜(恤民
施惠)의 자성(慈性)은 향방(鄕邦)에 알려져 원근(遠近)의 기민(飢民)들이 운집(雲
集)하였다고 행장(行狀)에 기록되었다. 만년(晩年)에는 사훈(師訓)인 신언행(愼言
行), 근독서(勤讀書), 무농상(務農桑)을 좌우명(座右銘)으로 삼고 생활하시다가
1601년 신축 63세로 천수(天壽)를 다하셨다. 차(嗟)흡다.!
---오늘날 내외 운잉(雲仍)의 번연(繁衍)함이 모두가 선조의 종덕여음(種德餘蔭)
이리라. 아! 선조가 역책(易 )하신이 146년이 지난 1747년 정묘(丁卯)에 선생의
고산경행(高山景行)의 참뜻을 존모(尊慕)하여 재사(齋舍)를 세우고 기묘(己卯)에는
묘우(廟宇)가 완성되어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봉안절차(奉安節次)를 정하고
후산정사(後山精舍)라 칭하였다. 계사(癸巳)에는 주사(廚舍)를 짓고 을미(乙未)에
는 원장(垣墻)을 설치하여 그 해 10월 20일 사림(士林)과 내외자손이 모인 가운데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백여년간 춘추향화(春秋香火)를 올리다가 1868년 무진(戊
辰) 국령(國令)에 의해 묘우(廟宇)는 헐려 유지(遺趾)만 남고 정사(精舍)는 현존하
니 후손들의 개연추모(慨然追慕)의 감회(感懷)가 무궁(無窮)하다. 어느때 복설(復
設)이 있기를 바라고 누변(累變)하는 창상(滄桑)과 작금을 달리하는 세태에 전후
사(前後事)를 징(徵)하고자 선조의 실기를 상고하여 전말을 약기(略記)한다.
---------------------서기 1980년(경신(庚申)) 모춘절(暮春節)
--------------------------후손(後孫) 창회(昌會) 근기(謹記)
▣ 사촌 서림(沙村 西林) pp506∼507
---점곡면(點谷面) 사촌리(沙村里) 서쪽에 길이 약 800m, 폭 40여m의 숲이 있다.
이 숲에는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 약 10종의 노거수(老巨樹)가 울창하
게 솟아 있으니, 수령은 300년에서 600년 사이, 나무 높이는 대개 15m∼20m 정
도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 전 고려 말기, 안동김씨 입향 시조 감목공(監牧
公) 자첨(子瞻)이 안동으로부터 이곳 사촌(沙村)으로 이거할 때 마을 서편 긴 평
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심은 방풍림이다. 까닭에 소유주는 안동김씨
문중으로 되어 있다. 계절에 따라 그 경관은 바뀌어 지지만 가을철의 단풍은 특
히 절경을 이루고, 철따라 새와 짐승들이 우짓고 노닐며, 한여름에는 농부들이 일
손을 멈추고 짙은 녹음 아래 낮잠을 즐기기도 한다. 이 숲은 또한 임진란 수습
공신이며 퇴계의 학통을 승계한 석학 서애(西厓) 류성용(柳成龍)의 출생지라는 전
설이 있다.
---1972년 내무부에서 발간한 「보호수지(保護樹誌)」에는 이 숲의 회나무, 상수
리나무가 거수목으로 등재되어 있고, 또한 경상북도 지정 보호림 1등급 9-75호로
등록된 바 있다. 1972년에는 홍수의 피해를 막고자 사천(沙川) 양쪽에 축대공사를
했으며 길손과 마을 사람들의 휴식을 위해 벤치시설도 갖추었다. 한편 점곡초등
학교 자연관찰원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학생들의 야영훈련 교육의 집회행사, 예비
군, 민방위대, 훈련 교장으로도 제공된다. 1986년 면장 김사수(金沙秀)씨의 주선으
로 사적비(事蹟碑 : 金昌會 撰)를 세웠다.
▣ 사촌 서림사적비(沙村 西林事蹟碑) pp530∼531)
■소재지 :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서림내)
---이 비석은 경상북도 보호림 1등급 9-75호로 지정된 사촌 서림의 조성 경위와
연대를 밝혔으며 현재의 관리상태를 기록하였다.
■사촌 서림사적비문(沙村 西林事蹟碑文)
---동해를 바라보며 남쪽으로 내리 뻗은 태백산맥이 보현산(普賢山)에서 멈추었
고 그 일지(一枝)가 서북으로 거슬러서 솟재(鼎嶺)가 우뚝하다. 이곳에서 발원한
기수(沂水)가 협곡을 따라 장장 팔십리를 관류하여 대천을 이루고 다시 서북으로
구비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이 언저리에 주회 수십리의 옥야(沃野)가 펼쳐졌고
여기에 자리잡은 사촌은 영남의 명기로 널리 알려졌다. 높은 산, 깊은 물은 천작
으로 설화를 남겼고, 고목과 노거수림은 인작으로서 연유가 있다. 거듭되는 창상
에 후손을 찾을 수 없는 라씨(羅氏), 손씨(孫氏)의 뒤를 이어 고려 충렬왕 때 도
원수 충렬공 김방경의 5세손 함길도 감목관 자첨공(高麗 忠烈王 때 都元帥 忠烈
公 金方慶의 5世孫 咸吉道 監牧官 子瞻公)이 서기 1392년(태조 원년 임신) 안동
(安東) 회곡(檜谷)으로부터 이곳에 입향하여 세전의 기지를 닦았다. 이후 서편의
허를 막기 위해 조림한 가로숲은 대곡천을 중심으로 양안에 자리하여 남북 1㎞,
동서 40m에 걸쳐 둘레 3∼4m, 높이 15∼20m 정도의 태고연한 수목이 울연히 들
어섰다. 주종을 이루는 수종은 상수리와 괴화나무, 느티나무 등이나 그 외 수십종
의 잡목이 자생하고 있으며 산토끼, 다람쥐 등 야생조수가 사시로 서식하고 후조
외(왜)가리는 매년 우수 무렵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새끼를 부화하고 백로와 추분
사이에 남쪽으로 가버린다. 대개 으슥한 바위나 고목, 거수에는 전설과 토속 신앙
이 깃들어 있듯이 여기에도 임란(壬亂)의 치란명상이며 송은(松隱) 김광수(金光
粹) 선생의 외손자이신 서애(西厓) 류성용(柳成龍) 선생의 출생지라는 전설과 사
촌리의 연중 무사 안녕을 비는 성황신(城隍神)을 이곳에 봉안한 바 있었는데 영
정조(英正祖) 시대의 유학자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선생에게 현몽하여 기령
산(奇靈山)에 이안했다.(축문 령자조령 시봉서림 난피풍우 현몽천사 . . . . . 이하
략. 祝文 靈自鳥嶺 始奉西林 難避風雨 顯夢川沙 . . . . . 以下 略) 지금도 천고의
비밀을 간직한 채 무제평원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삼동에는 삭풍을 막아 동리를
보호하고 춘하에는 계절풍을 막아 농작물의 피해를 줄이며 성하에는 벌레와 모기
가 없는 녹음 아래서 농부들이 땀을 식히고 오수를 즐긴다. 옛날에는 지나가는
운사(韻士)들이 시상을 일으켰고 어린 시절 여기에서 뛰놀던 이향객(離鄕客)에게
는 향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세사가 변천함에 따라 새마을 다리가 놓여지고
인마의 내왕이 차량의 통행으로 바꿔지니 왕사는 한갓 추억으로 남을 뿐이다. 서
기 1972년에 경상북도 보호수 1등급 9∼75호로 지정되고 자연보호정책의 일환으
로 행정기관이 관리에 힘쓰고 있다. 이에 선조(先祖)의 슬기와 원대한 경륜에 감
복하고 그 사적을 후인에게 전하고자 점곡면장 김사수(金沙秀)씨의 주관으로 재
일(在日) 김희학(金熙鶴), 희범(熙範)의 협찬을 받아 이 사적비(事蹟碑)를 세운다.
- - - - - - - - - - - - - - - - - -1986년 3월 20일
- - - - - - - - - - - - - - - - - - 金 昌 會 글 짓고
- - - - - - - - - - - - - - - - - - 柳 時 洵 글씨 쓰다
▣ 김정중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글 감사드립니다.
▣ 김주회 - 감사합니다. 윤만 종친님! 시군지는 어디에서 구하시는지요? 궁금합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재익 - 사촌에 관심 감사 합니다.
▣ 김영환 -
▣ 태영/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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