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방경) 일화(2) : 류경의 구명(求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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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7-01 18:35 조회1,763회 댓글0건본문
안동김씨와 문화류씨
☞ 옮긴이 주(註) : 류경(柳璥 ; 희종 7년(1211)~충렬왕 15년(1289), 79세)은 자가 천
년(天年) 장지(藏之). 문화 류씨로 공권(公權)의 손자. 문과 급제. 세자부. 찬성사 판
전리사사(贊成事 判典理司事)에 이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 김방경 열전의 기록.(고려사 권제104. 열전 제17)
--어떤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달로화적 석말천구(石抹天衢)에게 투서를 하였는
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제안공(齊安公) 왕숙(王淑)과 김방경(金方慶) 등 43명이 반
역을 음모하고 다시 강화로 들어가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석말천구가 왕숙과 김방경 등을 가두어 놓고 재상들을 시켜 연합 심문하게
하였는데 류경이 그들의 무죄를 역설하여 구원해 주었으므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류경(柳璥)의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 류경 열전의 기록(고려사 권제105. 열전 제18)
◉ 어떤 사람이 달로화적 석말천구(石抹天衢)의 숙소에 무명의 투서를 하였는데 거
기에 이르기를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왕의 총애를 잃게 되니 여자 무당을 시켜 공
주를 저주토록 하였으며 또 제안공(齊安公) 왕숙(王淑)과 중찬 김방경(金方慶) 및 이
창경. 이분희. 박항. 이분성 등 43명이 반역하여 다시 강화도에 들어가려 음모한다.”
라고 하였다.
--이에 공주는 정화궁주를 잡아 가두고 석말천구 역시 왕숙. 김방경 등을 체포하였
고 곧 재상들을 불러 합석 문초케 하였다.
--석말천구가 갑자기 말하기를 “봄철이 벌써 가까워 왔으니 여러분은 봄맞이 시를
짓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는데 김구는 다만 “예! 예”할 뿐이었다.
--류경이 개연히 말하기를 “왕비와 수상이 모두 감옥에 갇혀 있는데 지금이 어찌 시
를 읊조리고 있을 때인가?라고 하였더니 석말천구가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석말천구가 또 공주에게 암시해서 여러 죄수들을 친히 문초하도록 하니 공주가 그
의 말을 따르려 하였다.
--류경이 여러 재상들과 함께 공주를 뵙자 청하고 무릎을 꿇은 채로 앞으로 나가서
말하기를 “근년에 권력있는 신하들이 나라의 명맥을 틀어잡고 만일 어떤 사람이 죄
를 지었다고 고발하는 일이 생기면 그것의 사실여부와 경중 여부를 물어보지도 않고
즉시 죽이는 것이 마치도 풀베기라도 하는 듯이 쉽사리 해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공포에 떨고 있어 목숨을 보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하늘이 도와서 이런 무리들을 모두 없애 치웠고 또 공주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 와서 다스리게 하였으므로 저희들은 다시는 이전과 같은 화단이 일어나지 않
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러한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새로 얻었
다는 그 무명의 투서에 대해서는 제가 그 시비를 가려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물들이 그 전처럼 똑똑하지도 못하고 관군(몽골군)이 사방에 주
둔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달아나겠습니까? 또 이름도 밝히지 않은 글에 어찌 믿음성
이 있겠습니까? 만약 그것을 믿고 죄를 준다면 저희들 가운데 한두 사람도 내일에는
또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굳이 힘을 다하여 왕실의 일을 돌보
겠습니까?
--정화궁주가 공주를 저주하였다는 것 역시 쉽게 판명할 수 있는 일입니다. 공주께
서 우리 임금에게 시집온 뒤 나라 사람들이 안심하고 모두 황제의 은덕에 감사하여
뼈에 사무치게 느끼고 있는 터인데 그가 만약 사적 감정으로 공주를 저주하였다손
치더라도 신이 영검이 있다면 은덕을 배반한 화가 반드시 자기의 몸에 도로 내려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류경이 말하던 시초부터 눈물. 콧물이 섞여 흘러내리고 그 말이 아주 절절하였기
때문에 부근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쏟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옮긴이 주 : 공주는 충렬공할아버지 등을 석방시키고 이어 정화궁주도 석방하였다)
◉ 또 위득유(韋得儒). 노진의(盧進義)라는 자들이 김방경 등이 반역음모를 한다고
무고한 일이 있었다. 원수 흔도(忻都)가 왕과 공주에게 말하여 김방경을 고문하자고
요청하였으므로 왕이 장차 그것을 허락할 모양이었다.
--이 때 류경이 나아가 말하기를 “저는 변방 구석진 곳에서 태어나고 생장하여 아직
귀국의 제도가 어떠한지를 모릅니다마는 우리나라의 법에서는 먼저 고발한 자를 잡
아가두고 그 다음에 피고를 잡아들여 왕에게 말씀들인 뒤에야 문초하며 고발한 것이
사실이라면 고발한 자에게 상을 주며 거짓이라면 그만한 죄를 제가 도로 당합니다.
그런데 지금 고발한 자는 잡아오지도 않고 당장 피고를 고문하려고 하니 이치가 그
렇게 되어서 쓰겠습니까?”라고 하니 흔도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이 사실에 관
해서는 김방경 열전에 기록되었다.(2002. 7. 1)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재익 -
▣ 김항용 -
▣ 김영환 -
▣ 김발용 -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 김주회 - 류경이라는 분은 우리 충렬공 할아버지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옮긴이 주(註) : 류경(柳璥 ; 희종 7년(1211)~충렬왕 15년(1289), 79세)은 자가 천
년(天年) 장지(藏之). 문화 류씨로 공권(公權)의 손자. 문과 급제. 세자부. 찬성사 판
전리사사(贊成事 判典理司事)에 이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 김방경 열전의 기록.(고려사 권제104. 열전 제17)
--어떤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달로화적 석말천구(石抹天衢)에게 투서를 하였는
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제안공(齊安公) 왕숙(王淑)과 김방경(金方慶) 등 43명이 반
역을 음모하고 다시 강화로 들어가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석말천구가 왕숙과 김방경 등을 가두어 놓고 재상들을 시켜 연합 심문하게
하였는데 류경이 그들의 무죄를 역설하여 구원해 주었으므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류경(柳璥)의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 류경 열전의 기록(고려사 권제105. 열전 제18)
◉ 어떤 사람이 달로화적 석말천구(石抹天衢)의 숙소에 무명의 투서를 하였는데 거
기에 이르기를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왕의 총애를 잃게 되니 여자 무당을 시켜 공
주를 저주토록 하였으며 또 제안공(齊安公) 왕숙(王淑)과 중찬 김방경(金方慶) 및 이
창경. 이분희. 박항. 이분성 등 43명이 반역하여 다시 강화도에 들어가려 음모한다.”
라고 하였다.
--이에 공주는 정화궁주를 잡아 가두고 석말천구 역시 왕숙. 김방경 등을 체포하였
고 곧 재상들을 불러 합석 문초케 하였다.
--석말천구가 갑자기 말하기를 “봄철이 벌써 가까워 왔으니 여러분은 봄맞이 시를
짓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는데 김구는 다만 “예! 예”할 뿐이었다.
--류경이 개연히 말하기를 “왕비와 수상이 모두 감옥에 갇혀 있는데 지금이 어찌 시
를 읊조리고 있을 때인가?라고 하였더니 석말천구가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석말천구가 또 공주에게 암시해서 여러 죄수들을 친히 문초하도록 하니 공주가 그
의 말을 따르려 하였다.
--류경이 여러 재상들과 함께 공주를 뵙자 청하고 무릎을 꿇은 채로 앞으로 나가서
말하기를 “근년에 권력있는 신하들이 나라의 명맥을 틀어잡고 만일 어떤 사람이 죄
를 지었다고 고발하는 일이 생기면 그것의 사실여부와 경중 여부를 물어보지도 않고
즉시 죽이는 것이 마치도 풀베기라도 하는 듯이 쉽사리 해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공포에 떨고 있어 목숨을 보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하늘이 도와서 이런 무리들을 모두 없애 치웠고 또 공주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 와서 다스리게 하였으므로 저희들은 다시는 이전과 같은 화단이 일어나지 않
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러한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새로 얻었
다는 그 무명의 투서에 대해서는 제가 그 시비를 가려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물들이 그 전처럼 똑똑하지도 못하고 관군(몽골군)이 사방에 주
둔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달아나겠습니까? 또 이름도 밝히지 않은 글에 어찌 믿음성
이 있겠습니까? 만약 그것을 믿고 죄를 준다면 저희들 가운데 한두 사람도 내일에는
또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굳이 힘을 다하여 왕실의 일을 돌보
겠습니까?
--정화궁주가 공주를 저주하였다는 것 역시 쉽게 판명할 수 있는 일입니다. 공주께
서 우리 임금에게 시집온 뒤 나라 사람들이 안심하고 모두 황제의 은덕에 감사하여
뼈에 사무치게 느끼고 있는 터인데 그가 만약 사적 감정으로 공주를 저주하였다손
치더라도 신이 영검이 있다면 은덕을 배반한 화가 반드시 자기의 몸에 도로 내려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류경이 말하던 시초부터 눈물. 콧물이 섞여 흘러내리고 그 말이 아주 절절하였기
때문에 부근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쏟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옮긴이 주 : 공주는 충렬공할아버지 등을 석방시키고 이어 정화궁주도 석방하였다)
◉ 또 위득유(韋得儒). 노진의(盧進義)라는 자들이 김방경 등이 반역음모를 한다고
무고한 일이 있었다. 원수 흔도(忻都)가 왕과 공주에게 말하여 김방경을 고문하자고
요청하였으므로 왕이 장차 그것을 허락할 모양이었다.
--이 때 류경이 나아가 말하기를 “저는 변방 구석진 곳에서 태어나고 생장하여 아직
귀국의 제도가 어떠한지를 모릅니다마는 우리나라의 법에서는 먼저 고발한 자를 잡
아가두고 그 다음에 피고를 잡아들여 왕에게 말씀들인 뒤에야 문초하며 고발한 것이
사실이라면 고발한 자에게 상을 주며 거짓이라면 그만한 죄를 제가 도로 당합니다.
그런데 지금 고발한 자는 잡아오지도 않고 당장 피고를 고문하려고 하니 이치가 그
렇게 되어서 쓰겠습니까?”라고 하니 흔도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이 사실에 관
해서는 김방경 열전에 기록되었다.(2002. 7. 1)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재익 -
▣ 김항용 -
▣ 김영환 -
▣ 김발용 -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 김주회 - 류경이라는 분은 우리 충렬공 할아버지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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