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군지순례 23-3.(연천군 : 경순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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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7-03 07:31 조회1,590회 댓글0건본문
연천군지(상)/연천군지편찬위원회/2000.
▣ 경순왕릉(敬順王陵). pp664~665.
○소 재 지 :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
○지정번호 : 사적 제244호
--경순왕(敬順王)은 문성왕(文聖王)의 6대손으로 927년 후백제 견훤의 침공으로 경
애왕(景哀王)이 승하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신라의 마지막 왕이다. 오랫동안 잊
혀져 있다가 조선 영조때 다시 찾게 되었는데 신라왕릉 중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
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다. 능은 현재 민통선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점은
남방한계선 200m 전이기도 하다. 동향한 나지막한 구릉의 정상에 단독으로 위치하고
있는데 묘의 규모는 직경 660㎝, 높이 200㎝로서 32매의 호석을 두른 원형 봉분이며
곡장내에 있다. 묘 앞에는 410㎝의 간격을 두고 2단의 계체석을 갖추고 있으며 하단
의 계체석에 석물들이 놓여 있다.
--석물로는 상석, 묘비, 장명등, 석양 1쌍, 망주석 2기 등이 있다. 상석은 높이 23㎝,
너비 103㎝, 두께 44㎝이다. 묘비는 비좌와 비신을 갖추고 있는데 비좌는 높이 19㎝,
너비 90㎝, 두께 60㎝이다.
--비신은 월두형으로 높이 104㎝, 너비 47㎝, 두께 17㎝이다. 전면에 탄흔이 5개소
있는데 이중 1개소는 경(敬)자에 있으며, 좌측 상단 측면의 탄흔으로 파손이 있다.
장명등은 백색운모 화강암으로 높이 160㎝이며 4방에 화창석이 있다. 석양은 석호와
더블어 대개는 두쌍씩 있어야 하나 경순왕릉에는 석양만 1쌍이 있다. 좌의 것은 높
이 52㎝, 길이 123㎝로 돌이끼가 있으며 목 등에 탄흔이 있다. 우의 것은 높이 60㎝,
길이 115㎝로 돌이끼가 있으며 좌측 귀 파손 및 엉덩이 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
다. 망주석은 좌의 것이 높이 160㎝, 우의 것이 높이 145㎝이다.
향토사료집/연천문화원/1995
▣ 경순왕릉(敬順王陵). pp481~482.
○소 재 지 :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
○지정번호 : 사적 제244호
○지정년월일 : 1975. 6.25.
--경순왕( ? ~979)은 신라 제56대 왕으로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로 문성왕의 6대
손이며 아버지는 신흥대왕(新興大王)으로 추봉된 효종(孝宗)이고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927년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景哀王)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되고 난 다음, 견훤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정책과
신라의 민심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1년 왕건의
알현이 있었는데 수십일을 머물면서 왕건은 부하 군병들에게 정숙하여 조금도 범법
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왕경의 시녀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시랑과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935년 후백제
의 잦은 침공과 각 처의 군웅할거로 강토는 날로 줄어 들어 국가기능이 마비되자 신
하들과 더불어 고려에 항복할 것을 결정하고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
복하는 국서를 전하여 재위 8년의 신라 마지막 왕이 되었다. 이 때 큰 아들 마의태
자(麻衣太子)는 항복을 극력 반대하였고, 막내 아들 범공(梵空)은 화엄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그가 백료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차(香車)와 보마(寶馬)가 30
여리에 뻗쳤다. 항복 후 왕건에 의해 태자의 지위인 정승공(政丞公)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궁(柳花宮)을 하사 받았으며, 녹(祿) 1천석과 함께 경주를 식읍(食邑)으로 받아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되었고 왕건 태조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와 다시 결혼하였
다. 경순왕은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지 43년 후인 고려 경종 4년(979)에 돌아갔으며
경순(敬順)이란 시호를 받았다.
--경순왕릉은 조선건국이후 오래도록 실전되었던 것을 1748년(영조 24) 감사 김성운
과 첨정 김응호 등이 봉축하고 제사하였으나 6.25 이후 방치되었다가 1975년 사적으
로 지정되어 지금의 형태로 정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분은 원형의 호석을 두
른 높이 3m(2m?), 둘레 19.5m의 크기이고 곡장으로 보호받고 있으며 봉분 전면에는
4각의 대좌위에 서 있는 표석(105 × 48 × 17㎝)과 상석(103 × 44㎝), 네면에 4각 화
창과 팔각지붕형의 옥개를 얹은 장명등(160㎝)이 직선상에 놓여져 있고 장명등 좌우
에는 석양(石羊, 105 × 50㎝), 망주석(150㎝)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조선 후기의 양
식이며 화강암 재질이다. 표석 전면은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이라 되어
있고 뒷면은 5행으로 경순왕의 간략한 생애를 기술한 87자의 음기로 이루어져 있다.
건립연대는 1749년(영조 25)이다.
--또한 경순왕릉 좌측에는 1986년에 새로 건립된 1칸 규모의 비각과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형 지붕으로 된 재실이 있는데, 비각 안에는 경순왕의 신도비로 추
정되는 비가 있다. 이 비는 6.25 전까지 고랑포리 시가지에 있었으나 수복 전후 도로
변에 계속 방치되어 오던 것을 원당리 고랑포초등학교 교정에 옮겨 보호해 오다,
1986년 비각을 새로 건립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 보존하게 된 것이다. 대좌는
최근에 화강암으로 다시 마련하였고 비신은 높이 132㎝, 폭 66㎝, 두께 15㎝ 규모에
상단을 모죽임한 변성암 재질로 되어 있다. 비문은 심하게 마멸되어 전혀 판독이 불
가능한 상태이며 비신 중간과 하단의 일부분에서 10자 정도가 확인될 뿐이다.
--경순왕릉은 신라의 여러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걍기도 내에 있는 것으로 옛 고랑
포 나루터 뒤편의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곳에 잘 정비되어 있다.
연천군지(하)/연천군지편찬위원회/2000.
▣ 경순왕릉비(敬順王陵碑) pp766.
○소재지 : 장남면 고랑포리
○시 대 : 영조 25년(1749)
○규 모 : 총높이 120㎝, 비높이 105㎝, 폭 84㎝, 두께 17㎝
(경순왕릉비 탁본)
[원문]
--王新羅第五十六王後唐天成二年戊子代景哀王而立淸泰乙未遜國于高麗宋太平興國戊寅
--왕신라제오십육왕후당천성이년무자대경애왕이입청태을미손국우고려송태평흥국무인
麗景宗三年四月四日麗諡敬順以王禮葬于長湍古府南八里癸坐之原
려경종삼년사월사일려시경순이왕예장우장단고부남팔리계좌지원
[번역문]
--왕(경순왕)은 신라의 제56대 왕으로 후당 천성 2년(927, 고려 태조 10년) 무자에
경애왕의 뒤를 이어 청태 을미(935, 태조 18년)에 고려에 나라를 넘겨주었다. 송 태
평흥국 무인년(978), 즉 고려 경종 3년 4월 4일 훙거하니 시호는 경순이다. 왕(고려
경종)이 장단현 고부 남쪽 8리 계좌의 언덕에 예로써 장례지냈다.
지행순덕영모의열성상(至行純德英謨毅烈聖上) 23년 정묘(1749, 영조 23년) 월 일
고쳐 세움.
※ 실록기사에서 경순왕 묘와 관련하여 대표적인 기사는 아래와 같다.
(1)신라 경순왕의 묘를 수치(修治)하도록 명하고 하교 하기를 “지금 김일호(金一豪)
등의 비지(碑誌) 인본(印本)을 보건대, 그것이 경순왕의 묘임을 의심할 것이 없다. 1
천년 가까이 된 후 오늘날에 찾게 되었으니 기이하다고 말할만 하다. 전대의 다른
능과 비교하여 사면(事面)이 더욱 중대하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관심을 가지고
수치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미 치제(致祭)하였으니 비석을 세울 때에 역군(役軍) 또
한 돌보아 돕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보다 앞서 그의 자손이 진소하였기 때문에 이
런 명이 있었다.[『영조실록』권65, 영조 23년 4월20일(기묘) 참조]
(2)아울러 영조 24년(1748) 1월엔 신라 경순왕의 능도 고려 여러 왕릉의 예에 따라
수총군(守塚軍) 5인을 두도록 하였다.
[『영조실록』권67, 영조 24년 1월29일(갑인) 참조]
향토사료집/연천문화원/1995
▣ 고랑포리 경순왕릉관련 지명. pp467~469
○갈매울(갈마동) : 둔전골 동쪽에 있던 큰 마을. 공처 마루에서 뻗어나온 산의 형상
이 풍수지리설로는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이라 하여 붙
여진 마을 이름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곳이 장서면의 관송리 내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고, 6.25 전에는 안동 김씨 20호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성거산(聖居山, 98m) : 경순왕릉 위에 있는 산.
○경순왕릉(敬順王陵) : 지정문화재편 참조.
○능말골짜기 : 경순왕릉이 있는 골짜기. 고려시대에는 왕릉을 수호하던 능참봉이 살
았다 한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경순왕릉에 대한 귀한자료를 많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영환 -
▣ 김재익 -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경순왕릉(敬順王陵). pp664~665.
○소 재 지 :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
○지정번호 : 사적 제244호
--경순왕(敬順王)은 문성왕(文聖王)의 6대손으로 927년 후백제 견훤의 침공으로 경
애왕(景哀王)이 승하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신라의 마지막 왕이다. 오랫동안 잊
혀져 있다가 조선 영조때 다시 찾게 되었는데 신라왕릉 중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
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다. 능은 현재 민통선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점은
남방한계선 200m 전이기도 하다. 동향한 나지막한 구릉의 정상에 단독으로 위치하고
있는데 묘의 규모는 직경 660㎝, 높이 200㎝로서 32매의 호석을 두른 원형 봉분이며
곡장내에 있다. 묘 앞에는 410㎝의 간격을 두고 2단의 계체석을 갖추고 있으며 하단
의 계체석에 석물들이 놓여 있다.
--석물로는 상석, 묘비, 장명등, 석양 1쌍, 망주석 2기 등이 있다. 상석은 높이 23㎝,
너비 103㎝, 두께 44㎝이다. 묘비는 비좌와 비신을 갖추고 있는데 비좌는 높이 19㎝,
너비 90㎝, 두께 60㎝이다.
--비신은 월두형으로 높이 104㎝, 너비 47㎝, 두께 17㎝이다. 전면에 탄흔이 5개소
있는데 이중 1개소는 경(敬)자에 있으며, 좌측 상단 측면의 탄흔으로 파손이 있다.
장명등은 백색운모 화강암으로 높이 160㎝이며 4방에 화창석이 있다. 석양은 석호와
더블어 대개는 두쌍씩 있어야 하나 경순왕릉에는 석양만 1쌍이 있다. 좌의 것은 높
이 52㎝, 길이 123㎝로 돌이끼가 있으며 목 등에 탄흔이 있다. 우의 것은 높이 60㎝,
길이 115㎝로 돌이끼가 있으며 좌측 귀 파손 및 엉덩이 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
다. 망주석은 좌의 것이 높이 160㎝, 우의 것이 높이 145㎝이다.
향토사료집/연천문화원/1995
▣ 경순왕릉(敬順王陵). pp481~482.
○소 재 지 :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
○지정번호 : 사적 제244호
○지정년월일 : 1975. 6.25.
--경순왕( ? ~979)은 신라 제56대 왕으로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로 문성왕의 6대
손이며 아버지는 신흥대왕(新興大王)으로 추봉된 효종(孝宗)이고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927년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景哀王)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되고 난 다음, 견훤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정책과
신라의 민심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1년 왕건의
알현이 있었는데 수십일을 머물면서 왕건은 부하 군병들에게 정숙하여 조금도 범법
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왕경의 시녀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시랑과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935년 후백제
의 잦은 침공과 각 처의 군웅할거로 강토는 날로 줄어 들어 국가기능이 마비되자 신
하들과 더불어 고려에 항복할 것을 결정하고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
복하는 국서를 전하여 재위 8년의 신라 마지막 왕이 되었다. 이 때 큰 아들 마의태
자(麻衣太子)는 항복을 극력 반대하였고, 막내 아들 범공(梵空)은 화엄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그가 백료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차(香車)와 보마(寶馬)가 30
여리에 뻗쳤다. 항복 후 왕건에 의해 태자의 지위인 정승공(政丞公)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궁(柳花宮)을 하사 받았으며, 녹(祿) 1천석과 함께 경주를 식읍(食邑)으로 받아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되었고 왕건 태조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와 다시 결혼하였
다. 경순왕은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지 43년 후인 고려 경종 4년(979)에 돌아갔으며
경순(敬順)이란 시호를 받았다.
--경순왕릉은 조선건국이후 오래도록 실전되었던 것을 1748년(영조 24) 감사 김성운
과 첨정 김응호 등이 봉축하고 제사하였으나 6.25 이후 방치되었다가 1975년 사적으
로 지정되어 지금의 형태로 정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분은 원형의 호석을 두
른 높이 3m(2m?), 둘레 19.5m의 크기이고 곡장으로 보호받고 있으며 봉분 전면에는
4각의 대좌위에 서 있는 표석(105 × 48 × 17㎝)과 상석(103 × 44㎝), 네면에 4각 화
창과 팔각지붕형의 옥개를 얹은 장명등(160㎝)이 직선상에 놓여져 있고 장명등 좌우
에는 석양(石羊, 105 × 50㎝), 망주석(150㎝)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조선 후기의 양
식이며 화강암 재질이다. 표석 전면은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이라 되어
있고 뒷면은 5행으로 경순왕의 간략한 생애를 기술한 87자의 음기로 이루어져 있다.
건립연대는 1749년(영조 25)이다.
--또한 경순왕릉 좌측에는 1986년에 새로 건립된 1칸 규모의 비각과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형 지붕으로 된 재실이 있는데, 비각 안에는 경순왕의 신도비로 추
정되는 비가 있다. 이 비는 6.25 전까지 고랑포리 시가지에 있었으나 수복 전후 도로
변에 계속 방치되어 오던 것을 원당리 고랑포초등학교 교정에 옮겨 보호해 오다,
1986년 비각을 새로 건립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 보존하게 된 것이다. 대좌는
최근에 화강암으로 다시 마련하였고 비신은 높이 132㎝, 폭 66㎝, 두께 15㎝ 규모에
상단을 모죽임한 변성암 재질로 되어 있다. 비문은 심하게 마멸되어 전혀 판독이 불
가능한 상태이며 비신 중간과 하단의 일부분에서 10자 정도가 확인될 뿐이다.
--경순왕릉은 신라의 여러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걍기도 내에 있는 것으로 옛 고랑
포 나루터 뒤편의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곳에 잘 정비되어 있다.
연천군지(하)/연천군지편찬위원회/2000.
▣ 경순왕릉비(敬順王陵碑) pp766.
○소재지 : 장남면 고랑포리
○시 대 : 영조 25년(1749)
○규 모 : 총높이 120㎝, 비높이 105㎝, 폭 84㎝, 두께 17㎝
(경순왕릉비 탁본)
[원문]
--王新羅第五十六王後唐天成二年戊子代景哀王而立淸泰乙未遜國于高麗宋太平興國戊寅
--왕신라제오십육왕후당천성이년무자대경애왕이입청태을미손국우고려송태평흥국무인
麗景宗三年四月四日麗諡敬順以王禮葬于長湍古府南八里癸坐之原
려경종삼년사월사일려시경순이왕예장우장단고부남팔리계좌지원
[번역문]
--왕(경순왕)은 신라의 제56대 왕으로 후당 천성 2년(927, 고려 태조 10년) 무자에
경애왕의 뒤를 이어 청태 을미(935, 태조 18년)에 고려에 나라를 넘겨주었다. 송 태
평흥국 무인년(978), 즉 고려 경종 3년 4월 4일 훙거하니 시호는 경순이다. 왕(고려
경종)이 장단현 고부 남쪽 8리 계좌의 언덕에 예로써 장례지냈다.
지행순덕영모의열성상(至行純德英謨毅烈聖上) 23년 정묘(1749, 영조 23년) 월 일
고쳐 세움.
※ 실록기사에서 경순왕 묘와 관련하여 대표적인 기사는 아래와 같다.
(1)신라 경순왕의 묘를 수치(修治)하도록 명하고 하교 하기를 “지금 김일호(金一豪)
등의 비지(碑誌) 인본(印本)을 보건대, 그것이 경순왕의 묘임을 의심할 것이 없다. 1
천년 가까이 된 후 오늘날에 찾게 되었으니 기이하다고 말할만 하다. 전대의 다른
능과 비교하여 사면(事面)이 더욱 중대하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관심을 가지고
수치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미 치제(致祭)하였으니 비석을 세울 때에 역군(役軍) 또
한 돌보아 돕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보다 앞서 그의 자손이 진소하였기 때문에 이
런 명이 있었다.[『영조실록』권65, 영조 23년 4월20일(기묘) 참조]
(2)아울러 영조 24년(1748) 1월엔 신라 경순왕의 능도 고려 여러 왕릉의 예에 따라
수총군(守塚軍) 5인을 두도록 하였다.
[『영조실록』권67, 영조 24년 1월29일(갑인) 참조]
향토사료집/연천문화원/1995
▣ 고랑포리 경순왕릉관련 지명. pp467~469
○갈매울(갈마동) : 둔전골 동쪽에 있던 큰 마을. 공처 마루에서 뻗어나온 산의 형상
이 풍수지리설로는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이라 하여 붙
여진 마을 이름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곳이 장서면의 관송리 내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고, 6.25 전에는 안동 김씨 20호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성거산(聖居山, 98m) : 경순왕릉 위에 있는 산.
○경순왕릉(敬順王陵) : 지정문화재편 참조.
○능말골짜기 : 경순왕릉이 있는 골짜기. 고려시대에는 왕릉을 수호하던 능참봉이 살
았다 한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경순왕릉에 대한 귀한자료를 많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영환 -
▣ 김재익 -
▣ 김은회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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