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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발간사 07 (1778무술보 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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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7-11 07:23 조회1,5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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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발간사 07 (1778무술보 序)





대종회 서고정리를 하면서 문중의 족보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지만 구분이 잘 안돼서 이참에 족보도 공부할겸 족보간행 등 문중사에 헌신하신 선조님들의 행적을 찾아 정리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문중의 최초의 最古의 족보는 지금으로부터 422년전인 임진왜란 12년전, 선조13년, 1580년에 간행한 경진보입니다. 그로부터 160년이 지난 영조15년, 1739년에 기미보를 발간하였습니다.



1580년 경진보 간행에는

(제)김익과 손자 김방, 아들 윤선

(제)김곽과 아들 김제현

(분파?)김오

(익)김억령, 김찬, 김환 등이 참여하였고,



1739 기미보 간행에는

(분파?)김성유와 족질 김권

(제)김남정

(제)김한장

(안)김집

(익)김우태

(부)김중우와 아들 김유,김식

(부)김흡 등이 참여하였습니다.







이어서 1580경진보후 160년후에 1739기미보를 발간하고, 기미보후 40년후인 정조2년 1778년에 무술보를 발간하게 됩니다.



1778년 무술보 발간에는

분파?) 南門+困(남곤)

분파?) 永綏(영수)

(군사) 光國

(안렴) 得顯

분파?) 樂豊 등이 참여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 족보 발간사



---무술보 (정조2 1778)

7. ●무술보 서

숭정기원후3 무술(세번째 무술년) 5월 하순(仲夏下澣) ---후손 가선대부 행 승정원 etmd지 겸 경연참찬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상서원정 光國 근서





주역에 말하되 "물건이 커진 연후에야 볼 만하다" 하더니 그것은 오직 우리 김씨를 두고 한 말이다.



하늘이 우리 金姓을 점지할 때 실로 金櫃(금궤) 속에서 異人이 탄생하신지 어느덧 1천년이 되는 동안에 35차나 왕위를 선양하는 미덕이 있었으나



급기야 국운이 다함에 있어 민생이 도탄에 빠짐을 참아 보지 못하고 宋京의 賓(빈)이 된 제가 드디어 5백년이 되었다.



累代를 지나서 이조에 이르니 파의 흐름이 멀어져도 벼슬은 끊임없이 이어내려 왔으며 수 많은 자손들이 오래도록 더욱 번성하여 傍孫과 支孫과 外孫들이 두루 국내에 퍼졌으니 무릇 그런즉 臨海僻村(임해벽촌)이라도 衣冠하고 行勢하는 사람은 누가 김씨의 子孫이 아니겠는가?









아! 장하고 또 크도다. 오직 우리 충렬공 선조께서는 하늘이 智勇을 주셔서 나라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충성으로 말하면 하늘을 감동시켰고 威風으로 말하면 中華와 오랑캐를 움직였으니 그 위대한 공적은 다만 당세에서 미개함을 면하게 했을뿐만 아니라 百世를 두고도 하나님은 至仁하시도다.



그 報應으로 말하면 어찌 자손이 億일 뿐이며 福祿이 百일 뿐일까?









이로 인하여 肖孫(초손) 名人들이 속출하여 香火祭祀(향화제사)는 永世토록 변함이 없으니 세간에서 감깐동안 전하다가 잠깐동안에 끊어지고 별안간 盛했다가 졸지에 망하는 자를 본다면 그 길고 짧은 것과 얕고 깊은 것이 과연 어떠한가.



비록 世態가 문란하며 風紀가 쇠퇴하고 도덕군자와 문장재사가 옛적 성현에게는 미치지 못해도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충렬공의 遠孫이라고 하는 자는 귀천을 막론하고 포악한 자는 절대로 없고 謹拙(근졸)한 자가 많았으며



殘疾(잔질)한 자가 나지 않고 장수하는 자가 많으니 이는 선조께서 積德을 하고 길이 하나님께 기원하고 후손에게 음덕을 내리신 것이며, 고금을 통해서 후손을 위해 힘쓰신 것을 우리 선조의 자손들은 분명히 알 것이다.



전대에 이렇게 이루신 바는 다름이 아니라 어질고 후하심이오 충성과 효도하신 까닭이다.



집에서는 詩禮(시례)로서 근본을 삼고 조정에 나가서는 風節로써 노력하사 하늘이 주신 仁에 변함이 없음으로 영세불변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니 어진 분의 후손됨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그 혹시나 香火의 綿爀(면혁=대대로 빛나는 것)과 혈통의 내려옴을 생각지도 아니하고 世德을 실추시켜서 자포자기하거나 立身事君함에 다시 분수를 다하려 하지 않고 공을 잊고 사만 따라서 쓸데없는 名義뿐이라면 충렬공께서 "나의 후손들에게 뒤에 오는 報應이 장차 어찌될까?" 고 말씀하실 것이다.









아!! 선조의 典型은 날로 멀어지고 인재는 희소해지니 잘못되게 날뛰지 말며 마음으로 맹서하고 스스로 분발하여 선조 위업을 따라서 우리 왕조를 도움으로써 우리의 後裔(후예)를 旺盛(왕성)하게 하면 힘차게 달리지 못하더라도 얼마나 그 庶民의 면함을 얻을 것이다.



무릇 우리 족보를 같이한 여러분들은 각자 힘을 써야 할 것이다.









지나간 己未년에(=1739) 譜事가 잘 완성되어 兩年 동안에 9질이 훌륭하게 되어 千派百支가 上洛으로 歸宗하고 始林으로 소급하지 않음이 없으니 매우 성대한 일이었다.



그것이 어느덧 40년이 되는 동안에 자손이 번성하고 變遷(변천)이 많아서 불가불 때를 맞추어 상의하려던 바 후손 ★南門+困(남곤) ★永綏(영수)가 먼저 그 실마리를 말하고 불초손 ★光國이 그 의논을 널리 통고하니 이제야 각도에서 여러파의 收單이 차례로 구름같이 모여서 힘이 크고 일이 많아서 공을 이루기가 어렵더니



종인 ★得顯과 ★樂豊이 전심으로 工役을 관장하면서 考證을 仔詳히 하고 제본은 오직 勤實을 취해서 7개월만에 20권이 완성되니 이는 실로 우리 김씨의 다행한 일이다.









그 凡例같은 데는 삭제와 加添이 없지는 않았으나 舊譜의 큰 뜻을 잃지 않기 위해서 配位는 四祖(부,조,증,외조)를 갖추니 內外黨이 뚜렷하고 선남후녀로 本孫과 支孫의 계통이 확실하게 되었다.



부록의 번잡한 史家의 전해온 의문을 싫어하지 않고 기록함은 후대에 이로 미루어 闡明(천명)하기 바라는 바이다.



漏單(누단)이 된 것은 가혹하지 않게 추후로 기다리고 역매어 두었다가 스스로 그 先世에 서 끊어지게 해 두었다.









諸家方註가 혹은 몹시 간략함을 위주로 하고 혹은 길게 늘어 놓기도 한데 이르러서는 자기 조상의 일을 위해서 각자의 손으로써 낸 것이니 지적함을 기다리지 않아도 그 뜻을 가히 알 것이다.



그밖에 착한 일로 표창을 받고 악한 일로 罰誅(벌주)를 당한 일은 자연히 필자에게 달린 것이니 비록 同源之親이라 할지라도 감히 조금의 용서가 없고 책을 펴서 한번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연히 효심이 일어나고 몸에 사무치도록 두려움을 알 것이니 그 世道에 다행함이 어찌 도움이 적겠는가



돌이켜 그 업적을 찬양하고 그 과정을 서술함에 불초(=光國)는 실로 그 적임자가 못 되나 하루라도 나이 많다고 해서 여러 종친이 끈질기게 부탁하고 놓지 않으니 불초(=光國)는 같은 門事에 의리로 보더라도 감히 글이 좋지 못하다고 사양할 수 없어 役事를 하게 되어 洗 (세수)하고 詳考해서 위와 같이 그 사실을 기록하노라







숭정기원후3 무술(세번째 무술년) 5월 하순(仲夏下澣) ---후손 가선대부 행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상서원정 光國 근서









★南門+困(남곤)

★永綏(영수)

★光國

★得顯

★樂豊



군사) 김준원(金俊元) - 김추(金樞) - 김수기(金壽基) - 김담(金湛) - ★김광국(金光國)

안렴) ★김득현(金得顯) - 김기(金玘=1754생, 1790진사), 김하(金瑕)









<조선조방목>

군사) ★김광국(金光國)

영조(英祖)11년(1735년), 증광시(增廣試) 병과20(丙科20)

>>> 인적사항

생년(生年) 1709년, 기축

자(字) 대관(大觀)

호(號)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담(金湛)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수기(金壽基)

증조부(曾祖父) 김추(金樞)

외조부(外祖父) 최린(崔潾)

처부(妻父) 황응태,안윤규(黃應泰,安允揆)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통덕랑(通德郞)

품계(品階)

관직(官職)





<디지털한국학>

군사) ★김광국(金光國)

1685(숙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대관(大觀). 승지 준원(俊元)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담(湛)이다.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41년 지평이 되었다.

이듬해 정언을 거쳐 장령·필선·헌납을 역임하고 1755년에 서장관이 되었다.

이듬해 사간에 이어 1759년에 승지, 1760년에 황주목사, 1766년에 회양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

1769년 도승지가 되고 이어 병조참판이 되었다.

1779년(정조 3) 내의원의관이 되었다.

편저로는 《간독 簡牘》이 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李元根〉







<서울600년사>

한글(한자)이름 (군사) ★김광국 (金光國)



기원기준 A.D



자 대관(大觀)

출생년 1685(숙종 11)

사망년 미상

시 대 조선후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간독(簡牘)》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관련항목

이력사항



1685(숙종 1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대관(大觀)으로 승지 김준원(金俊元)의 현손이며 김담(金湛)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남부 회현방 장동(충무로1가 · 회현동 2가 지역)에 살았다. 영조 11년(1735)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 · 장령(掌令)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치고 1755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사간 · 승지 · 황주 목사 등을 차례로 역임한 후 1769년 도승지에 올랐으며, 이어 병조 참판까지 지냈다. 편저로 《간독(簡牘)》이 있다.





<안동김씨 홈페이지>

29.표제/저작사항 六忍齋文集 / ★金光國 著 판사항 木板本 발행사항 奉化 : 盤泉書堂, 1932 형태사항 5卷2冊 : 四周雙邊, 半廓 19.3 x 16.3 cm. 10行20字, 注雙行, 內向二葉花紋~魚尾 ; 32.0 x 21.4 cm 주기사항 序: 玄蛇(?)...權璉夏跋: 金瀅模 분류기호 조선총독부고서분류표 -> 古朝46 청구기호 한古朝46-가1159 자료있는곳 고전운영실



13. <先輩手束>. ★金光國 (복사 생략)

청구기호 奎 10308--1-4

서명/저자 先輩手柬 / ★金光國(朝鮮) 編.

판사항 寫本.

출판사항 [刊地未詳] : [刊者未詳] ; [英祖26年(1750)] :

형태사항 4帖 , ; 34.8×29 cm..

주기사항 卷首: 歲舍庚午(1750)…賓南題.

인기 印: ★金光國印.

사부분류 集部 書簡類

M/F번호 M/F77-16-C

광화일번호 SGP-187-024065

마스터번호 24001







<사마방목>

안렴) 김기(金玘) / 正祖 14 增廣 進士



【시험년도】 정조(正祖) 14 (1790) 증광(增廣) 진사(進士)

【합격등위】 3등 0069

【본인성명】 김기(金玘)

【본인 자】 이옥(而玉)

【본인생년】 갑술(甲戌) 1754

【본인본관】 안동(安東) 김(金)

【본인거주】 경(京)

【본인구존】 영감하(永感下)

【본인전력】 유학(幼學)

【본인과목】 이부(二賦)

【부친성명】 ★김득현(金得顯)

【부친품계】 통덕랑(通德郞)

【안항(제)】 김하(金瑕)







▣ 郡/김태영 -

▣ 김태서 -

▣ 김정중 -

▣ 솔내 영환 -

▣ 김항용 -

▣ 김재이 - -

▣ 김윤만 -

▣ 김재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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