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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발간사 08 (1825을유보 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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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7-13 06:25 조회1,9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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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발간사 08 (1825을유보 序)









대종회 서고정리를 하면서 문중의 족보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지만 구분이 잘 안돼서 이참에 족보도 공부할겸 족보간행 등 문중사에 헌신하신 선조님들의 행적을 찾아 정리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문중의 최초의 最古의 족보는 지금으로부터 422년전인 임진왜란 12년전, 선조13년, 1580년에 간행한 경진보입니다. 그로부터 160년이 지난 영조15년, 1739년에 기미보를 발간하고, 기미보후 39년후인 정조2년 1778년에 무술보를 발간하였습니다.





1580년 경진보 간행에는

(제)김익과 손자 김방, 아들 윤선

(제)김곽과 아들 김제현

(분파?)김오

(익)김억령, 김찬, 김환 등이 참여하였고,





1739 기미보 간행에는

(분파?)김성유와 족질 김권

(제)김남정

(제)김한장

(안)김집

(익)김우태

(부)김중우와 아들 김유,김식

(부)김흡 등이 참여하였습니다.





1778년 무술보 발간에는

분파?) 南門+困(남곤)

분파?) 永綏(영수)

군사) 光國

(안렴) 得顯

분파?) 樂豊 등이 참여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1580庚辰譜후 160년후에 1739己未譜를 발간하고, 기미보후 40년후인 정조2년 1778년에 戊戌譜를 발간하고, 무술보후 48년후인 순조25년 1825년에 乙酉譜를 발간하게 됩니다.



1825년 을유보 발간에는

분파?) 禹元 선조님께서 발간을 주관하시고 또한 序文을 지었습니다.









▣ 족보 발간사



---을유보 (순조25 1825)

8. ●을유보 서

상지 즉조 25년 을유 5월하순 (仲夏下澣) ---통정대부 행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 겸 오위장 불초손 禹元 근서



산의 祖宗은 곤륜산이니 가지를 나누어 萬山이 되었고, 물의 조종은 동해니 모든 흐름이 한 곳으로 돌아 나가니 山海經의 한권 책이 없다면 산을 말하는 자 무엇으로써 그 맥을 찾으며, 물을 보는 자 어찌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겠는가?



대개 씨족에 족보가 있는 것도 또한 이와 유사한 일이니 무릇 아름답고 장한 일이로다. 오직 우리 始林의 김씨는 그 시초에 ★太輔公이 탄생하사 신라를 계승하다가 ★경순왕이 禪位하고



원조에 있어 본관을 이관할 때 ★상락군이 중시조가 되었으니 집에서 전해온 충효와 대대로 이어온 勳烈은 세 번 족보의 서문과 발문에서 선인들의 서술로 갖추어졌으니 또다시 비재천학한 후손으로서 찬양해서 빛낼 것이 없으나



예전에 우리 世譜는 만력 庚辰년(=1580)에 비로소 출판되었고 그전에는 없었다. 충렬공의 자손된 사람은 모두 10여세가 되고 비록 집안에 家牒이 있다해도 전연 계통이 없으니 어느 조상에 어느 후손이 있고 어느 파는 어느 세대에서 갈렸는지를 분별하기 어려움이 실로 大族閥의 험이었다.



그래서 己卯년(=?)에 명현 정언공 ★ (익)이 가첩을 보수해서 계통을 명백히 고쳐서 족보 한권을 편성하니 이것이 족보의 시작이었다.









庚辰년(=1580)에서 己未년(=1739)까지 160년이 되는 동안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두 난을 겪어서 公私문헌이 모두 소실되고 남은 것이 없어 족보가 없을 때와 같더니,



이때에 종중 선각자이신 도정공 ★성유와 지평공 ★권과 대사간공 ★유가 정성과 노력을 다하여 辛亥년(=?1730)에 비로소 통문을 내고 수단을 모아 9년만에 9책이 완성되었다.



문숙공(=제갑) 후손 ★한장과 익원공 후손 ★우태도 참여하여 힘이 컸다.





그후 40년이 지난 戊戌년(=1778)에 통사공 ★영수와 참찬관 ★광국이 또 重刊을 하니 지금은 무술년에서 또 50년이 가까웠고,



족보의 기록을 열람하면 당시의 청년들이 半數는 죽고, 어린애들이 어느덧 자라서 혹은 어른이 되어 손자나 증손을 보게 되었으니 죽은 사람의 기일과 묘소, 산 사람의 생년과 주소 수명의 장단과 관직의 유무와 누구와 혼인한 것과 文武에 등과급제한 것을 장차 무엇으로 詳考하며 믿을 것인가? 족보를 닦을 시기는 그러한 때를 고려해서 하면 좋을 것이다.









망령스럽게 각파 모모 종친들과 더불어 重刊할 것을 상의하니 본래 선인들의 공적에는 감히 비교해서 의논할 수는 없으나 그것을 후세에 전하는 길은 마찬가지다.







己卯년(=1819) 겨울부터 乙酉년(=1825)) 여름까지 6년동안 고생을 해서 30책이 완성되었으니 周小史의 系世하는 의의와 漢太史(=?) 世家의 例가 다시 여기에서 밝혀졌고, 그는 가히 여러 집안에서 위임한 뜻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아름답도다!! 우리 김씨는 2천년 동안 큰 선비와 장한 임금이 대대로 이어오고 있으며, 수억의 자손들이 면면히 끊어지지 않고 내려왔으니 원래 선인들께서 積德을 하여 후손들이 복을 받는 것이다.



무릇 우리의 여러 종친들이 모두 우리 조상을 뵙듯이 이 족보를 보게 되면 비록 천리 밖에 있어도 서로 대해서 昭穆(소목)을 따지는 것 같으며, 한번도 만나본 일이 없어도 구면과 같이 소원함이 없을 것이다.









그런즉 이 족보의 성취가 어찌 온 문중의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간혹 자기의 편견을 고집하여 두 갈래로 갈라져서 하나로 합하지 못하는 것은 구태여 홀로 그 무슨 심정일까?





戊戌譜 序文에 "수단이 빠진 것은 까다롭게 하지 말고 후일을 기다려 그대로 두었다가 자연히 그 선대에서 끊어지게 맡겨 두어라" 고 했으니, 나도 또한 그렇게 말하는 바이다.









序文에 이르러서는 우리 보책중에 전후 저술이 다 본손 외에는 없음으로 여러분의 의논으로 나에게 미루어 맡기니 나의 不文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고 또 내가 주관한 일이라서 굳이 사양도 못하고 그 과분함을 망각하고 목욕재계하고 위와 같이 기록하노라









상지 즉조 25년 을유 5월 하순

통정대부 행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 겸 오위장 불초손 ★禹元 근서







★禹元 ?











▣ 김윤만 -

▣ 김태서 -

▣ 김항용 -

▣ 김정중 -

▣ 솔내 영환 - 감사합니다.

▣ 김재익 -

▣ 郡/김태영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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