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익공(김시양) 친필 서찰(2) 번역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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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2-07-18 04:53 조회1,538회 댓글0건본문
*지난 4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견한 충익공(휘 時讓. 제학공파) 선조님의 친필 서찰을 우리 문중의 한학자이신 김익수(제학공파. 제주도 문화재위원) 선생님께 번역 의뢰, 정리하였기에 이제 소개해 올립니다.
*김시양(金時讓) 1581(선조14)∼1643(인조21).
조선의 문신.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 비안현감(比安縣監) 인갑(仁甲)의 아들. 1605년(선조3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숭문원 정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주서를 거쳐 예조 좌랑으로 지제교를 겸하다가 1610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1611년(광해군3)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가 되어 지방향시를 주관할 때 임금을 비방하는 시제를 출제했다 하여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寧海)로 이배(移配) 되었다. 1623년 인조 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와 예조정랑(禮曹正郞)·병조정랑·수찬 (修撰)·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이듬해(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 난이 평정된 후 응교(應敎)로 문학(文 學)을 겸임, 이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경상감사로 있을 때 경상좌도와 우도의 전결(田結)이 일치하지 않음을 상소하여 균일하게 정비하였으며,정묘호란(丁卯胡亂:1627) 후 서북 지방의 경비가 중요시 되자 1629년(인조7)에 특히 평안도 관찰사 겸 체찰부사로 발탁되었다. 1631(인조9) 병조판서에 올라 팔도 도원수(八道都元帥)·사도 체찰사(四道 體察使) 등을 겸임하여 척화(斥和)를 주장했다.
그 후 강화 유수(江華留守)·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34년(인조12)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호조판서, 세자좌부빈객, 강화유수를 거쳐 1641년(인조19)「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개수(改修)할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겸 판춘추관사(判春秋館事)로서 이에 참여했다. 그러나 안질(眼疾)로 맹인(盲人)이 되었으므로 중도에 사직하였다.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인조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1643년(인조 21)에 충주 하담리의 사제에서 별세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 회령(會寧)의 향사(鄕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숙종때(1691. 숙종 17년) 忠翼을 시호로 받았다.
저서:<忠翼公 荷潭先生 遺稿>(<부溪紀聞>, <荷潭破寂錄>, <紫海筆談> 등이 수록)
가. 荷潭公 諱 時讓 親筆 書札(2)-수신자 미상
1)발견일 : 2002. 4. 2)발견자 : 金恒鏞
3)소장처 : 국사편찬위원회 4)번역인 : 金益洙
5)潤文人 : 金恒鏞
나. 한문 원문
前奉一書未知得達否. 三嶺把守 乃是都檢察傳令意是. 朝廷指揮一意奉行而重爲, 體府所責惶恐犯罪. 至於夫馬整然, 差員差令亦承體府傳令, 及從事文移屬之. 而似蒼黃失措被責, 卽爲停罷耳. 絡遠地絶不得信體. 體府意旨事事失宜動, 被讓責亦極問竭. 凡干分朝處盈幸. 詳覽告便得周旋如何之非. 兄相愛之至老, 安聽如是 . 謹拜上狀.
丁卯二月十一日 時讓
다. 번역문
전에 보낸 한 통의 편지는 잘 도착했는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삼령(三嶺)을 파수한다는 것은 바로 모든 것을 샅샅히 살펴 전령대로 한다는 뜻이옵니다. 조정에서 지휘한 모든 뜻대로 봉행하고 또한 거듭 하였습니다마는 체찰부의 책임에 있어 죄를 범하지나 않았나 황공하기만 합니다.
부역마(夫役馬)에 이르기까지 질서정연하였으며, 관원을 임명하고 사령을 임명하는 것 역시 체찰부의 전령대로 따랐으며, 종사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문서에 있는 대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마 바쁜 나머지 잘못 처리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책임을 지게 되면 즉시 정직(停職)되거나 파면될 뿐입니다. 먼 곳이라 연락이 끊겨 체찰부의 소식을 들을 수 없습니다. 체찰부에서 왕지(王旨)를 받드는 뜻이 일마다 잘못되면 의당 소동이 날 것이고, 시양(時讓)에게 책임을 지우면 또한 엄한 문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조정의 조처에 간여하여 분별해주시면 큰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만…….
아뢰는 말씀을 자세히 살피시어 어떠한 것이 잘못되었는지 주선해 주시기 바랍니다.
형과 늙도록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걱정스러운 말씀을 들려 드리게 되었는지 야속하옵니다.
삼가 글월을 올리나이다.
정묘 (丁卯. 인조5년. 1627. 공 47세). 2월 21일 시양(時讓)
*주 : 1627년은 공이 경상도 관찰사에 부임한 지 2년 째 되는 해임..
▣ 김윤만 - 대단한 발굴 그리고 번역. 이 모두 우리 문중의 홍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수고하셨습니다.
▣ 김태서 -
▣ 솔내 영환 -
▣ 김발용 -
▣ 김정중 -
▣ 김주회 - 시양 선조님의 조용하고 겸손하고 해탈을 하신 듯한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항용 종친님의 벅찬 발견과 익수 종친님의 소중한 번역에 제 가슴도 두근두근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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