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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보는 안동(2) 하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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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영환 작성일02-07-18 18:05 조회1,8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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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



하회마을 유적지

하회마을은 전래의 문화유산이 보존된 마을이다. 마을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된 마을로서, 엘리자베스 2세의 방문을 계기로 더욱 널리 알려 졌으며, 국보, 보물등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유형/무형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징비록등은 임진란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며, 탈과 고택 등은 민속문화에 관한 중요한 자료입니다.









종목 분류 명칭

국보 132호 원고본 징비록

국보 121호 민속 공예류 하회탈 및 병산탈

보물 160호 활자본류기타 류성룡종손가문적11종 22점

보물 460호 고문서류기타 서애유물 3종 27점

보물 306호 / 414호 고가 안동양진당 / 충효당

사적 260호 서원(사적) 병산서원

중요민속자료 122호 민속마을 하회마을

중요민속자료 84-91호, 177호 정사 / 가옥 정사-원지정사 / 빈연정사 / 겸암정사 / 옥연정사 가옥-남촌댁 / 북촌댁 / 주일재 / 작전고택 / 하동고택

중요무형문화재 69호 연극 하회별신굿탈놀이

보호수 노거수 삼신당 느티나무

비지정 문화유산 화천서원 / 정려각 / 상봉정 / 기타 고택 / 서낭당 등













위 치 :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낙동강이 태극모양으로 돌아 흐른다 하여 하회(河回), 혹은 물도리강이라 하며 풍수상 태극형 연화부수형에 속하는 길지라 한다.

조선초 공조전서를 지낸 류종혜 선생이 하회마을에 터를 잡은 후 풍산 류씨가 60여년간 세거하여 왔다.

조선중기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 선생과 임진왜란시 영의정으로 국난극복에 큰 공을 세우신 서애 류성룡 선생 형제분으로 인하여 마을이 널리 알려졌다.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외침을 한번도 겪지 않아 상류층의 기와집으로부터 민가의 초가토담집에 이르기까지 전통고가와 민속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하회마을은 전국유수의 풍산유씨 동족마을이며, 그 터전은 낙동강의 넓은 강류가 마을 전체를 동.남.서 방향으로 감싸도는 명지이기도 하다.

유씨가 집단마을을 형성하기전에는 대체로 허씨, 안씨 등이 유력한 씨족으로 살아왔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는데. 1635년(인조13)의 <동원록>에도 삼성(蔘姓)이 들어 있기는 하나 이미 유씨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이전에 유시등의 기반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유씨의 인향조는 8세 전서 종혜씨로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과 같은 유씨의 동족기반은 종흥조 유문룡, 유성룡 형제시대에 이룩된 것이다.

유운룡은 시조에서 14대의 종손이며 유성룡은 시손인데 모두 문중의 거봉이어서 이 두 계손들을 경암파, 서애파로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에서 유서 깊고 규모가 갖추어진 가옥으로서 보물 또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들은 모두 풍산읍씨의 소유인데, 특히 그 중에서도 유운룡과 유성룡의 유적이 중추를 이루고 있어 유씨 동족마을의 형성시기와 역사적 배경을 짐작할 수가 있다.



징비록(국보 132호)



임진왜란때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를 겸임하였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선생이 임진왜란때의 상황을 벼슬을 떠나 귀향하였을 때 기록한 것으로, 저자는 임진란의 쓰라린 체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한다는 민족적 숙원에서 책명을「징비록(懲毖錄)」으로 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임진왜란 전의 일본과의 교린관계를 비롯하여, 전란(戰亂)에 임한 국민적 항쟁과 명나라의 구원 및 바다의 제패에 대한 당시의 전황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수 있어, 임진왜란사를 연구함에 있어서는 가장 대표적인 기본 역사자료가 된다.

필사본 징비록은 조수익공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을때 필자 손자의 요청으로 인조 25년에 16권책으로 간행하였으며, 또한 이것은 숙종 21년 일본 교토 야마토야에서도 간행되어 1712년에는 조정에서 징비록의 일본유출을 금할 정도로 귀중한 사료로 평가 받았다.



류성룡종손가문적(보물 160호)



임진왜란때 도체찰사(都體察使:왕 대신 군무를 총괄 직책이며 재상이 겸직)로 임금을 호종하면서 군무를총괄하여 전란에 큰 공을 세운 류성룡(柳成龍)선생이 자필로 기록한 임진왜란에 관한 문헌과 수집한 각종자료들이며, 임진왜란의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지정된 목록(目錄)은 다음과 같다.



1. 진사록(辰巳錄) 3책(보물 160-1호)

2. 난후잡록(亂後雜錄) 2책(보물 160-2호)

3. 근폭집(芹曝集) 2책(보물 160-3호)

4. 중흥헌근(中興獻芹) 1책(보물 160-4호)

5. 군문등록(軍門謄錄) 1책(보물 160-5호)

6. 정원전교(政院傳敎) 2책(보물 160-6호)

7. 정조어제당장서화첩제문(正祖御製唐將書畵帖題文) 부채제공발 (附蔡濟恭跋) 2책(보물 160-7호)

8. 당장시화첩(唐將詩畵帖) 1책(보물 160-8호)

9. 당장서첩 (唐將書帖) 2책(보물 160-9호)

10. 서애구주대통력(西厓具注大統曆) 갑진년 1책(보물 160-10호)

11. 서애구주대통력(西厓具注大統曆) 병오년 1책(보물 160-10호)

12. 서애구주대통력(西厓具注大統曆) 갑자년 1책(보물 160-10호)

13. 서애구주대통력(西厓具注大統曆) 병신년 1책(보물 160-10호)

14. 서애구주대통력(西厓具注大統曆) 정유년 1책(보물 160-10호)

15. 호성공신교서(扈聖功臣敎書)

16. 두루마리(보물 160-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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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룡종손가문적(보물 160호)



진사록(160-1)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는 일기나 초고본 등을 모아엮은『조선사료총간』중에도 실려 있어,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난후잡록(160-2)

류성룡선생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귀향한 후, 임진란을 회고하며 그 승패와 전쟁의 자취 등을 자필로 기록한 것이다.



근폭집(보물 160-3)

징비록」가운데 제3권부터 제7권까지의 군국기무 10조 및 소차(疏箚:상소문과 간단한 형태의 상소문) 약간편을 간추려 편찬한 것이다.



중흥헌근(160-4)

징비록」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것을 일부만 간추려 복사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군문등록(160-5)

군대의 업무에 관한 공문을 모아 엮은 책으로, 선조 28년∼선조 29년의 2년간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 업무는 체찰사가 주관하는 일이어서 책머리에 도체찰사군문등록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1책으로 복사본이다.



정원전교(160-6)

임진왜란 때 선조가 당시 영의정이며 도체찰사이던 류성룡선생에게 내린 전교를 모아 엮은 책이다. 1592년 7월 27일부터 1593년 2월 1일까지 그 기간동안 내린 전교문을 등사한 것이며, 그 내용은 명나라에서 보내온 구원병에 대한 접대, 군량조달문제, 왜병 토벌에 대한 작전방략문제, 왜병의 선왕능침발굴에 대한 문제 등에 대해 왕의 의견을 내리고 선후책을 상의한 것이다.



정조어제당장서화첩제문 부채제공발(160-7)

이것은 정조임금이 류성룡선생의 후손들에게 명하여「당장시화첩」을 들여다보고 여기에 그 소감을 기록한 것이다. 부록으로 채제공의 발문을 함께 수록하였다.



당장시화첩(160-8)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구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들의 시와 그림을 모아서 하나의 첩으로 엮어만든 것이다.



당장서첩(160-9)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구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들의 글씨와 편지 등을 모아서 하나의 첩으로 엮어만든 것이다.



류성룡비망기입대통력(160-10)

이것은 당시에 사용하던 달력인 대통력에 류성룡선생이 주요사항 등을 해당날짜 아래에 적어넣은 것으로, 역사적 자료로도 중요하지만, 또한 관상감(觀象監)에서 발행한 오래된 역서라는 점과, 인쇄에 사용한 관상감활자를 연구하는 데에도 귀중한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



호성공신교서(160-11)

공신록권이란 나라에서 공이 있는 신하에게 공신으로 임명하는 증서를 말하는데, 이 교서는 임진왜란 때에 선조임금을 모시고 의주까지 따라갔던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록권이다.













류성룡종손가유물(보물 460호)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 - 선생의 종손가에 전해오는 선생에 관계된 유물로서,

- 선생이 직접 사용하던 유물 :보물 460-1호

- 선생 모부인(母夫人)의 곤문기(昆文記):보물 460-2호

- 선생에게 내린 조정의 문서 :보물 460-3호

3종으로 분류되며, 현재 이 유물들은 모두 종손가의 유물전시관인

영모각에서 일반인들에게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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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종손가유물(보물 460호)



* 보물 460-1호 *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이 직접 사용하던 갑주, 혁, 상아홀, 갓끈, 관자, 유서통, 동국지도 서애선생 수택본 등이다.



1) 갑주(甲胄:갑옷과 투구) 1구(具)

임진왜란 중 도체찰사로서 전지에서 착용하였던 것이다. 갑옷은 철편을 가죽끈으로 연결한 것이며, 투구에는 앞면에 반월형 가림이 있고 네 쪽의 철편을 연결하여 만들었으며 비교적 보존이 좋으나, 갑옷은 손상이 심하여 원상을 알 수 없다.



2) 혁화(革靴) 1족

두꺼운 가죽을 측면에 대고 바닥은 5중(重)으로 하여 꿰맨 가죽신이며, 일부에 손상은 있으나 원형이 잘 남아 있다.



3) 상아홀(象牙笏) 1개

홀(笏)이란 신하들이 임금을 뵐 때나 종묘사직에 제사지낼 때 예를 갖추기 위해 두 손을 모아서 쥐던 패를 말하며, 여기에 왕명을 메모하기도 하였다.



4) 갓끈 4종

전립(戰笠:군인이 쓰는 벙거지)용과 입자(笠子:갓)용이 있는데, 위계에 따라 다르게 꾸며져 있다. 호박(琥珀) 갓끈(길이 86㎝, 73聯), 골제(骨製) 갓끈(길이 85.5㎝, 회백색 72聯), 오칠목제(烏漆木製)갓끈(길이 84㎝, 74聯), 밀화(蜜花) 갓끈(길이 84㎝, 담홍색 구슬 302聯)의 4종(種)이다.



5) 관자(貫子) 2종

망건에 달아 망건 줄을 꿰는 작은 고리를 관자라 하며, 품계에 따라 다른 관자를 달았다. 정3품까지는 옥관자, 2품은 금관자, 1품은 다시금 옥관자를 쓰게되어 재상이 되는 것을「환옥(還玉)」이라 하였다.



6) 유서통(諭書筒) 1개

국왕이 체찰사 등에게 중대한 사명을 내릴 때의 지령서를 유서라고 하였으며, 유서를 넣는 통을 유서통이라 하였다. 왕대의 마디 부근을 자른 양 끝에는 장식을 박고 끈을 매었고 중심을 타원형(길이 14㎝)으로 오려내고 자물쇠를 만들어 달았다. 유서통 졌느냐?라는 속담이 있는데 그 의미는 유서통을 전달하는 사람이 도중에서 어느 것에도 걸릴 것이 없는 과정을 비유한 것이기도 하다.



7) 동국지도서애선생수택본(東國地圖西厓先生手澤本) 1점

아래 왼편이 모두 손상되어 있으며 현재 삼수, 갑산, 단천, 길주, 명천, 경성(鏡城), 부령, 종성, 은성, 경원의 각 면과 아오지의 편면만이 남아 있어 완본은 아닌 것 같다. 각 면이 한지에 담채로 그려져 있다. 크기 61㎝×36㎝.



* 보물 460-2호 *

서애선생모부인곤문기(西厓先生母夫人昆文記) 1두루마리

서애 선생이 32세 때에 선친이 별세하여 유산이 선생의 모부인(母夫人)인에게 상속되었으며, 그로부터 20년 후에 모부인은 시댁과 친정의 제위토와 접빈용토지를 우선 분재(分財)하고 나머지 유산을 자녀에게 공평하게 분재한다는 뜻을 밝혔는데 이것이 그 기록이다. 크기는 가로 362㎝, 세로 67.2㎝로 한지에 행서체로 쓰였으며, 여러 곳이 벌레로 인해 훼손되었는데, 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재주모정경부인김씨(財主母貞敬夫人金氏) 방형묵인(方形默印)

증가옹오촌질종사랑전영능참봉이보 (證家翁五寸姪從仕郞前英陵參奉李輔)

수결(手決)

삼촌질기자전참봉김응남(三寸姪箕子殿參奉金應南) 수결(手決)

필집사촌손유학신민(筆執四寸孫幼學申 ) 수결(手決)



* 보물 460-3호 *

조정에서 류성룡(柳成龍)선생에 내린 고문서들이며 공신녹권(功臣錄券), 교지(敎旨), 제문(祭文) 등 총14종이다. 이 문서들은 류성룡 선생 개인사와 가계사, 그리고 조선시대 공문서 양식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1) 광국공신녹권(光國功臣錄券)

1두루마리 한석봉서(韓石峯書)라고 전하는 42.9㎝×115㎝의 긴 두루마리이다. 비단에 붉은 줄을 치고 해서(楷書)로 썼고 류성룡선생은 삼등에 기록되었다. 일자는 1590년 8월이다.



2) 광국공신과록권(光國功臣科祿券) 2매

1605년 1606년에 내린 2장의 공신과록권(功臣科祿券)이다. 록(祿)은 대미(大米:쌀) 5석(石:용량의 단위로 10말), 소미(小米:좁쌀) 1석, 태(太:콩) 2석으로 되어 있다.



3) 노비하사교지(奴婢下賜敎旨) 2매

1606년과 1638년의 2매이다.



4) 도체찰사교서(都體察使敎書) 1매

1592년에 내린 교서(敎書)



5) 문충공시호교지(文忠公諡號敎旨) 1매

1627년 7월20일에 내린 교지(敎旨)



6) 판중추부사교지(判中樞府事敎旨) 1매

1593년 2월 24일에 내린 교지(敎旨)



7) 호성공신교지(扈聖功臣敎旨) 1매

1604년 6월에 선생이 받은 교지(敎旨)



8) 풍원부원군교지(豊原府院君敎旨) 1매

1603년 10월 7일의 교지(敎旨)



9) 영의정교지(領議政敎旨) 1매

1592년 5월 2일의 교지(敎旨)



10) 증정경부인교지(贈貞敬夫人敎旨) 1매

류성룡선생의 부인에게 내린 1596년 10월 9일의 교지(敎旨)



11) 불윤비답(不允批答) 3매

류성룡(柳成龍)선생의 정사(呈辭)는 1595년 이후 무수히 있었으나 그 중 1597년 9월, 1599년 2월, 1601년 1월에 있었던 정사(呈辭)에 대한 불윤비답(不允批答)이다.





양진당 (보물 제3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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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의 하회마을 입향조(入鄕祖)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 공(公)이 13세기 입향 당시에 처음 자리잡은 곳에 지어진 건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 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하여, 고려말 건축양식과 조선중기 건축양식이 섞여 있다. 하회마을에서는 드물게 정남향(正南向)의 집이며 99칸으로 전해오지만,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

문간채와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고, 口자 형의 안채와 그 북쪽의 사랑채를 一자 형으로 배치하였으며, 오른편 북쪽에는 2개의 사당(祠堂)이 있는데, 정면의 큰 사당은 입암 류중영 선생의 불천위(不遷位: 공신이나 대학자 등의 탁월한 자에게만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를 말하며, 불천위로 인정되면 4대조까지 올리는 제사의 관행을 깨고 후손 대대로 제사를 올린다.) 사당이며, 작은 사당은 겸암 류운룡 선생의 불천위 사당이다.



충효당(忠孝堂) 보물 제4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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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선생이 초가삼간에서 돌아가신 후, 선생의 문하생과 사림이 장손(長孫) 졸재(拙齋) 원지(元之)공을 도와서 지었고, 증손자 의하(宜河)공이 확장한 조선중엽의 전형적 사대부(士大夫) 집으로서,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52칸이 남아있다.

충효당 내에는 영모각이 별도로 건립되어 서애선생의 귀중한 저서와 유품 등이 전시되고 있으며, 바깥마당에 엘리자베스2세의 방문기념식수가 있다.





































▣ 솔내 영환 - 양진당, 충효당, 클릭하시면 사진 볼수 있습니다.

▣ 김윤만 -

▣ 김정중 - 여기는 많이 덥습니다 기온이 34도. 잘계시지요? 뵈올 날을 기다립니다

▣ 김재이 - 잘보았습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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