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육백년사 (19) 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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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2-07-29 06:29 조회1,560회 댓글0건본문
【성 명】 김희수(金希壽)
【생몰년】 1475(성종 6)∼1527(중종 22)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몽정(夢禎), 유연재(悠然齋)
【저서·작품】 〈계주문(戒酒文)〉(글씨), 〈영상김수동비(領相金壽童碑)〉(글씨), 〈영상성희안비(領相成希顔碑)〉(글씨)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1475(성종 6)∼1527(중종 2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몽정(夢禎), 호는 유연재(悠然齋)로 악정(樂正) 김숙연(金叔演)의 아들이며 관찰사김자행(金自行)의 손자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 2년(1507)에 참봉(參奉)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이듬해에 권벌(權)· 이희증(李希曾) · 김영(金瑛) · 윤인경(尹仁鏡) 등과 함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의 김종직(金宗直)의 억울함을 청했지만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또 왕이 덕치정치(德治政治)를 하자면 신하의 간언(諫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충언하기도 하였다. 그뒤 중종 4년(1509)에는 정자(正字) · 박사(博士)에 이어 지평(持平) · 검상(檢詳) 등을 지냈으며 1514년에는 장령(掌令)이 되었다. 중종 12년(1517)에는 집의(執義) 등을 지냈으며 1520년에는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고 이듬해에는 좌부승지가 되었다. 중종 19년(1524)에는 도승지를 거쳐 이듬해에는 대사헌이 되고 1526년에는 경상도 관찰사로 제수되었다. 중종 22년(1527)에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해서(楷書)를 잘 썼다. 글씨로 〈계주문(戒酒文)〉 · 〈영상김수동비(領相金壽童碑)〉 · 〈영상성희안비(領相成希顔碑)〉 등이 있으며 동래(東萊)의 낙안서원(樂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光海君日記, 國朝人物考, 名世叢攷
【관련항목】 김노 (金魯)
▣ 김재원 -
▣ 솔내 영환 -
▣ 태영/문 -
▣ 김항용 -
【생몰년】 1475(성종 6)∼1527(중종 22)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몽정(夢禎), 유연재(悠然齋)
【저서·작품】 〈계주문(戒酒文)〉(글씨), 〈영상김수동비(領相金壽童碑)〉(글씨), 〈영상성희안비(領相成希顔碑)〉(글씨)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1475(성종 6)∼1527(중종 2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몽정(夢禎), 호는 유연재(悠然齋)로 악정(樂正) 김숙연(金叔演)의 아들이며 관찰사김자행(金自行)의 손자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 2년(1507)에 참봉(參奉)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이듬해에 권벌(權)· 이희증(李希曾) · 김영(金瑛) · 윤인경(尹仁鏡) 등과 함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의 김종직(金宗直)의 억울함을 청했지만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또 왕이 덕치정치(德治政治)를 하자면 신하의 간언(諫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충언하기도 하였다. 그뒤 중종 4년(1509)에는 정자(正字) · 박사(博士)에 이어 지평(持平) · 검상(檢詳) 등을 지냈으며 1514년에는 장령(掌令)이 되었다. 중종 12년(1517)에는 집의(執義) 등을 지냈으며 1520년에는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고 이듬해에는 좌부승지가 되었다. 중종 19년(1524)에는 도승지를 거쳐 이듬해에는 대사헌이 되고 1526년에는 경상도 관찰사로 제수되었다. 중종 22년(1527)에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해서(楷書)를 잘 썼다. 글씨로 〈계주문(戒酒文)〉 · 〈영상김수동비(領相金壽童碑)〉 · 〈영상성희안비(領相成希顔碑)〉 등이 있으며 동래(東萊)의 낙안서원(樂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光海君日記, 國朝人物考, 名世叢攷
【관련항목】 김노 (金魯)
▣ 김재원 -
▣ 솔내 영환 -
▣ 태영/문 -
▣ 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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