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육백년사 (23) 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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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2-07-29 06:57 조회1,463회 댓글0건본문
【성 명】 허난설헌(許蘭雪軒)/허초희(許楚姬)
【생몰년】 1563(명종 18)∼1589(선조 22)
【본 관】 양천(陽川) 허(許)
【자·호】 경번(景樊), 난설헌(蘭雪軒)
【저서·작품】 《난설헌집(蘭雪軒集)》,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시인
1563(명종 18)∼1589(선조 22). 본관은 양천(陽川), 아명(兒名)은 허초희(許楚姬), 자는 경번(景樊), 자호(自號)는 난설헌(蘭雪軒)으로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다.
선조조(宣祖朝)의 명신(名臣)인 허엽(許葉)의 셋째 딸로서 강릉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인 허엽과 더불어 오빠인 허성(許筬) · 허봉(許풤)과 동생인 허균(許筠)과 함께 양천(陽川) 5문장가(文章家)로 불린다. 어려서부터 재예(才藝)가 뛰어나 여신동(女神童)이라 불렸고, 7살에 유명한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세인(世人)을 놀라게 했다. 14 · 15세 전후인 선조 10년(1587)경에 한살 많은 서당(西堂)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김성립은 직위가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그쳤으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거느리고 왜적에 대항하다 순절하였다.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명으로 알려져 있는 이달(李達)에게서 시를 배웠다고 하며, 시에는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난설헌은 문학적으로는 높은 재주를 지녔으나 시어머니인 송씨부인과 사이가 좋지 못했으며, 애지중지하던 남매(男妹)를 연차(年次)로 잃어 자식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남편과의 사이도 별로 좋지 못했다. 남편 김성립은 독서를 핑계로 외박이 잦았으며, 부인을 경원(敬遠)했다고 한다. 이수광(李邈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는 평생 부부 사이가 좋지 못해 난설헌의 시는 원망하는 작품이 많다고 했다.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은 난설헌을 평하여 시(詩)는 높으나 그 덕행은 시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여자가 시를 지으면 이름이 밖에 알려져 집안이 더럽혀진다는 생각에 난설헌은 죽으면서 자신의 원고를 모두 불태워 버렸으므로 아우인 허균이 자기 집에 있던 시편들과 기억에 남아 있던 것들을 모아 문집을 엮은 것이 현재까지 전하는 《난설헌집(蘭雪軒集)》이다. 묘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경수마을에 있다.
【참고문헌】 蘭雪軒集, 惺所覆厄 鶴山樵談, 許蘭雪軒의 文學(金明姬, 集文堂)
【관련항목】 김진(金振) 허균(許筠)
▣ 김재원 -
▣ 솔내 영환 -
▣ 김재익 -
▣ 태영/문 -
【생몰년】 1563(명종 18)∼1589(선조 22)
【본 관】 양천(陽川) 허(許)
【자·호】 경번(景樊), 난설헌(蘭雪軒)
【저서·작품】 《난설헌집(蘭雪軒集)》,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시인
1563(명종 18)∼1589(선조 22). 본관은 양천(陽川), 아명(兒名)은 허초희(許楚姬), 자는 경번(景樊), 자호(自號)는 난설헌(蘭雪軒)으로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다.
선조조(宣祖朝)의 명신(名臣)인 허엽(許葉)의 셋째 딸로서 강릉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인 허엽과 더불어 오빠인 허성(許筬) · 허봉(許풤)과 동생인 허균(許筠)과 함께 양천(陽川) 5문장가(文章家)로 불린다. 어려서부터 재예(才藝)가 뛰어나 여신동(女神童)이라 불렸고, 7살에 유명한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세인(世人)을 놀라게 했다. 14 · 15세 전후인 선조 10년(1587)경에 한살 많은 서당(西堂)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김성립은 직위가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그쳤으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거느리고 왜적에 대항하다 순절하였다.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명으로 알려져 있는 이달(李達)에게서 시를 배웠다고 하며, 시에는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난설헌은 문학적으로는 높은 재주를 지녔으나 시어머니인 송씨부인과 사이가 좋지 못했으며, 애지중지하던 남매(男妹)를 연차(年次)로 잃어 자식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남편과의 사이도 별로 좋지 못했다. 남편 김성립은 독서를 핑계로 외박이 잦았으며, 부인을 경원(敬遠)했다고 한다. 이수광(李邈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는 평생 부부 사이가 좋지 못해 난설헌의 시는 원망하는 작품이 많다고 했다.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은 난설헌을 평하여 시(詩)는 높으나 그 덕행은 시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여자가 시를 지으면 이름이 밖에 알려져 집안이 더럽혀진다는 생각에 난설헌은 죽으면서 자신의 원고를 모두 불태워 버렸으므로 아우인 허균이 자기 집에 있던 시편들과 기억에 남아 있던 것들을 모아 문집을 엮은 것이 현재까지 전하는 《난설헌집(蘭雪軒集)》이다. 묘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경수마을에 있다.
【참고문헌】 蘭雪軒集, 惺所覆厄 鶴山樵談, 許蘭雪軒의 文學(金明姬, 集文堂)
【관련항목】 김진(金振) 허균(許筠)
▣ 김재원 -
▣ 솔내 영환 -
▣ 김재익 -
▣ 태영/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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