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방송일시 : 2002년 8월 10일 (토) 20:00-21:00 KBS 1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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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2-08-13 21:47 조회1,506회 댓글0건본문
VCR 2> 명을 요리한 광해군...
-차 트래킹 7" (앞의 스튜디오멘트 물리고...)(조금 보다가)
-17세기초 명에 파병된 대명지원군은 어떻게
-마을 팬 9" 되었을까..?중국 번시시 번시현..이곳에서
대명지원군의 행적을 찾을 수 있다.
-비석으로 걸어가고 3"
-앉으면 비석 보이고 7" -이 마을의 이름은 박가보...
조선에서 건너온 박씨들이 많이 모여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주머니 찾아들어가고...현장음 살리고
------------------
*현장음
-성이 박씨입니까...
네 박씨입니다..우리 어머니도 박씨입니다.
---------------------------
-박이라고 쓰는 아주머니 8" -그러나 여느 조선족과는 달리 아주머니는
박씨가 언제 어떻게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기억하
지못하고 있다.
------------------
*아주머니 인터뷰
왜 조선족인지는 모른다.
그냥 박씨는 조선족이라고 하니까
또 호구에도 조선족으로 등록되어 있으니까
조선족인 줄 알고 있다.
-----------------
-걸어나가고 7" -그러나 마을엔 이들이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임을
증명해주는 또다른 흔적이 남아있었다.
---------------------
-손으로 가리키며 아주머니 설명
원래 조선에서 온 사람들이 저기에서 살았는데
나중에 가오리팡즈라고 불렀다.
왜 고려방이라고 불렀는지는 어렸을 때 들어서 잘 모르겠고
옛날부터 어르신들이 그냥 그렇게 불렀다.
------------------------------
-족보 할아버지 찾아가는 13" -그렇다면 박씨들은 언제 이곳으로 건너와
정착하게된걸까?
박씨의 유래를 알고있다는 할아버지를 찾았다.
-할아버지 얼굴 5" -이 할아버지 역시 박씨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집안내력이 상세히 적힌 족보를
가지고 있었다.
-족보 꺼내오는 (윗멘트에 이 그림
조금 걸려도 상관없을 듯) 14" (보고...)
-펼치고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이 종이는 제사때 쓰는
족보라고 한다...
(조금 쉬고)
-박문삼대종친 7" -(박문..현장음 듣고)
-족보내용 4" 족보엔...모두 11대가 기록되어있었다...
-풀에 그림 보이게 5" 그러니까 이곳에 박씨가 처음 정착한 건..
삼,사백년전...조선중기가 되는 셈이다.
-조선의 신 타이트 5" (보고)
---------------
*인터뷰 ( 중국테이프 2 4219)
1619년 원래 신빈에서 왔고
1631년 쯤에 지금 이곳으로 왔다.
--------------------
-족보 펼치고 14" (페이지 넘길 때)
-1619년이라면 조선군이 중국에 파병되던
바로 그 해다.
(좀 보다가...해당 페이지 펼쳐지면)
-족보엔 박씨의 유래에 대한 보다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었다.
(보고)
----------------
*인터뷰(중국테이프 3 10255)
명조말년 1619년...후금 누루하치와 명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자 조선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강홍립장군이 만여명을 이끌고 명나라를 도왔는데
그 지원병중 한명이 저희 조상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모두 포로가 됐는데 나중에 중국에 남게되었습니다.
------------------------
-마을 분위기... 20" -중국 번시현의 박씨촌에 모여사는 사람들은
광해군때...파병되었던 대명지원군의
후손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길래
만여명의 조선군이 포로가 되어 이곳에 남게된걸까?
-차 트래킹 7" (흘리고)
-신빈시전경 5" -중국 신빈현..
-성 외경 4" 이곳은 후금의 첫도읍지였다.
-성으로 걸어들어가고 10" -시내엔 후금이 건국할 당시...세웠던
성이 그대로 남아있다.
당시 후금의 지도자였던 누르하치는
-성팬 궁궐 11" 이곳에 머물며 명과의 전쟁을 지휘하고 있었다.
(보다가)
-궁궐 6" -압록강을 건너와 명나라군대와 합류한 조선군의
공격목표는 바로 이 성이었다.
-C.G.붉은선네개 20" -명나라군대는 네 방향으로 나눠...
후금의 도읍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C.G...파란선 올라간다 -그 중 조선의 지원군은
남동쪽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현장 팬 7" -이곳이 당시 조선군의 전투현장이다...
이 고개만 넘으면 후금의 도읍인 신빈이다.
-숲으로... 16" (보다가)
-그러나 당시 조선군은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않는다..
(한호흡 쉬고)
-명나라군과 합류한 조선군은 명나라군을 지원
-나무 팬 11" 하기위해 후방에 남아있었다.그런데 전방에 나갔던
명나라군이 후금에게 크게 패하고 돌아온다.
그러자 조선군은 뜻밖의 행동을 보인다..곧바로
후금에 투항의사를 밝히고 12,000여명의 병사들이
모두 후금에 투항한다.
-------------
*인터뷰
명과 청은 두 번의 전쟁을 했는데 그때마다 명은
조선에 파병을 요구했다. 조선은 강홍립을 원수로 하여
한 개 부대를 파견했는데 조선군대는 이번 전투에 힘을 제대로
쏟지않았다. 즉 전쟁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않아 바로 투항했다.
-------------------
-차 트래킹 8" -과연 조선군은....전투에 참여할 의사가
없었던 것일까?
-진주강씨 사무실외경 4" -당시 대명지원군의 총책임자는 강홍립이란
-유지 꺼내오고 8" 인물이었다. 강홍립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의문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
*유지 펼치며
강홍립장군의 순검사라는 교집니다.
지금 국내외적으로 단 하나밖에 없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겁니다.
-----------
-교지 줌인 11" -순검사라면..지금의 국방부 특별검찰단으로
군부대를 감사하는 역할이다.
그런데 강홍립의 이력은 이것만이 아니다.
------------
*후손 인터뷰
강홍립장군께서는 원래 문과에 급제한 문관이었습니다.
근데 중국 서장관으로 다녀오시면서 국제적 감각을 가졌으리라 보이고
또한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하시면서 당시 국경지대인 후금의 정세를
잘 아시고 문무를 같이 겸비한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
-족보의 강홍립 이력을 c.g.로 23" -(표지 넘기는 것 보다가 강홍립 페이지넘길 때)
족보에 기록된 강홍립의 이력은 두페이지를
넘어간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서장관...
지금으로치면 외교관이다.
그렇다면 광해군이 강홍립을 선택한 건
유창한 중국말과 외교적인 감각을 높이 샀기때문은
아닐까?
---------------
*한명기인터뷰
광해군은 당시 왜란이 끝난지 얼마 되지않은 상황에서
또다시 10000여명의 군대를 전쟁터로 보낸다는 것이
사회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단한 부담이라고 생각했지요
따라서 가능하면 그 전쟁에 말려들지않으려고 시도했었고
결국 명의 압력에 밀려 어쩔수없이 참전하게된 경우에도
최후까지 강홍립이라고 하는 인물을 전쟁터로 보내
명나라군사와 협상으로..전쟁에 깊이 발을 들이지않으려고
강홍립을 정한걸로 생각된다.
-------------
-선양시내에서 궁으로 11" -광해군이 대명지원군파병을 달갑게 여기지않은데엔
-궁앞의 자전거 탄 사람들 6" 이유가 있다.
-당시 패망의 기운이 짙었던 명에 비해
후금은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성 팬 24" -현재 선양시내엔
후금의 누르하치가 세운 고궁이 남아있다.
원래 명나라 땅이던 선양을 점령한 후금은
이곳을 새로운 도읍으로 정하고
화려한 왕궁의 면모를 갖추게된다.
-대정전 14" -지금도 옛모습 그대로 보존되어있는 고궁은
당시 후금의 세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짐작케한다,
-황제자리로 줌인 8" -명의 쇠퇴와 후금의 부상..
광해군은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국제정세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
*한명기인터뷰(14 4110)...이 부분 살릴 수 있을까..앞과는 맞지않는데...)
광해군은 이미 아버지 선조를 따라 의주로 피난 갔을 무렵..
------ 실록의 이야기를 보면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떠오르고
있는 상황에 대해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파악하는 부분이 도처에
보인다. 따라서 대륙정세의 변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예민하게 주시해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서울 동관왕묘 풀 5" -그런데...광해군이 명을 배신했다고
비난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건물 팬 9"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중국식사당인
동묘...
-관우상 16" -중국의 장수인 관우를 모신 사당으로
흔히 관왕묘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서울한복판에 관우의 사당이 세워진게
된 건...당시 조선과 명의 독특한 관계 때문이다.
----------------
*인터뷰
이 동묘가 건립되게된 건 임진왜란이 끝나고 중국황제가
보낸 칙서에 당시 조선에 지원병으로 왔던 명군이 왜군을
물리친 건 관우의 혼백이 많이 도와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당을 짓고 모시라는 칙서를 받고
3년공사 끝에 이 건물을 짓게되었다.
---------------
-임진왜란 지도 26" -명의 요구대로 관왕묘를 짓게된 배경엔
임진왜란이 있다.
1592년...조선을 침공한 일본은
무서운 속도로 조선을 점령해갔다...
부산에 상륙한 지...불과 20여일만에
일보은 한성을 점령하고...한반도 최북단까지 올라갔다.
-평양성탈환도 팬 16" -다급해진 조선은 명에 지원군 파병을 요청했고...
한반도최북단까지 밀고올라온 일본군이 명나라까지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명나라는 지원군을 파병한다.
-탈환도두번째커트 틸업 12" 조명연합군이 전과를 거둔 건...평양성에서였다.
평양성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틸업(세번째커트) 20"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고..
왜군은 남쪽으로 밀리게된다.
(조금 보고)
-틸업....(세번째 컷) 20" 그러나 평양성탈환이후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명나라덕분에 나라를
다시 찾게 되었다는 생각을 갖게된다.
이른바 재조지은이라는 것이다.
--------
*신병주 인터뷰
재조지은이라는 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국란을 맞이해서
이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줌으로써 조선이 다시 이렇게 건설할 수 있는
------- 왕실이라든가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며아라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켜야된다는 논리가 상당히 파급되어갔다.
-------------
-관왕묘 4" -관왕묘가 세워진 건 이러한 사회분위기
때문이었다.
-현판 12" -당시 관왕묘공사를 명령하기위해
중국황제는 직접 글씨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관우상 줌아웃 16" -이렇듯.광해군 집권당시
조선의 명나라에 대한 사대는 어느때보다 심했다..
중립외교를 펴려했던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비난을 받게된 건
이러한 분위기때문이었다.
-------------------------------------------------------------------------------------
<스튜디오 3>광해군...명의 파병요청을 받아들이지않다
#관왕묘 외경앞에서....
-서울 한복판에 삼국지의 주인공인 관우의 사당이 있다는 걸 아는 분은
그리 많지않을텐데요..
그런데 이러한 관왕묘가 서울에만 세워진 게 아닙니다.
안동과 성주등 당시 명나라 군사가 머물렀던 곳은 어디에나 관왕묘가 건립되었습니다.
더구나...당시 조선은 전쟁으로인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명나라군사들은 관왕묘를 세우는데...조선의 물자를 조달했고...조선의 백성을 동원해
노동을 시켰습니다.
이 관왕묘의 존재는 당시 조선과 명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명에 대해 의외의 정책을 폅니다.
명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지않고...조선에 유리하도록...외교정책을 펼칩니다.
앞서 본 대명지원군 파병 문제가 바로 그 중의 하납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의 급박한 정세속에서...
명과 후금사이에 놓인 광해군의 고민은 끊이질않는데요...
이후 광해군은 어떤 외교정책을 펼칠까요?
-------------------------------------------
▣ 김재원 -
▣ 김윤만 -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 郡/김태영 -
-차 트래킹 7" (앞의 스튜디오멘트 물리고...)(조금 보다가)
-17세기초 명에 파병된 대명지원군은 어떻게
-마을 팬 9" 되었을까..?중국 번시시 번시현..이곳에서
대명지원군의 행적을 찾을 수 있다.
-비석으로 걸어가고 3"
-앉으면 비석 보이고 7" -이 마을의 이름은 박가보...
조선에서 건너온 박씨들이 많이 모여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주머니 찾아들어가고...현장음 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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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음
-성이 박씨입니까...
네 박씨입니다..우리 어머니도 박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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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라고 쓰는 아주머니 8" -그러나 여느 조선족과는 달리 아주머니는
박씨가 언제 어떻게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기억하
지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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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 인터뷰
왜 조선족인지는 모른다.
그냥 박씨는 조선족이라고 하니까
또 호구에도 조선족으로 등록되어 있으니까
조선족인 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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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나가고 7" -그러나 마을엔 이들이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임을
증명해주는 또다른 흔적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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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가리키며 아주머니 설명
원래 조선에서 온 사람들이 저기에서 살았는데
나중에 가오리팡즈라고 불렀다.
왜 고려방이라고 불렀는지는 어렸을 때 들어서 잘 모르겠고
옛날부터 어르신들이 그냥 그렇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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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할아버지 찾아가는 13" -그렇다면 박씨들은 언제 이곳으로 건너와
정착하게된걸까?
박씨의 유래를 알고있다는 할아버지를 찾았다.
-할아버지 얼굴 5" -이 할아버지 역시 박씨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집안내력이 상세히 적힌 족보를
가지고 있었다.
-족보 꺼내오는 (윗멘트에 이 그림
조금 걸려도 상관없을 듯) 14" (보고...)
-펼치고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이 종이는 제사때 쓰는
족보라고 한다...
(조금 쉬고)
-박문삼대종친 7" -(박문..현장음 듣고)
-족보내용 4" 족보엔...모두 11대가 기록되어있었다...
-풀에 그림 보이게 5" 그러니까 이곳에 박씨가 처음 정착한 건..
삼,사백년전...조선중기가 되는 셈이다.
-조선의 신 타이트 5"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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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중국테이프 2 4219)
1619년 원래 신빈에서 왔고
1631년 쯤에 지금 이곳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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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펼치고 14" (페이지 넘길 때)
-1619년이라면 조선군이 중국에 파병되던
바로 그 해다.
(좀 보다가...해당 페이지 펼쳐지면)
-족보엔 박씨의 유래에 대한 보다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었다.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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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중국테이프 3 10255)
명조말년 1619년...후금 누루하치와 명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자 조선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강홍립장군이 만여명을 이끌고 명나라를 도왔는데
그 지원병중 한명이 저희 조상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모두 포로가 됐는데 나중에 중국에 남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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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분위기... 20" -중국 번시현의 박씨촌에 모여사는 사람들은
광해군때...파병되었던 대명지원군의
후손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길래
만여명의 조선군이 포로가 되어 이곳에 남게된걸까?
-차 트래킹 7" (흘리고)
-신빈시전경 5" -중국 신빈현..
-성 외경 4" 이곳은 후금의 첫도읍지였다.
-성으로 걸어들어가고 10" -시내엔 후금이 건국할 당시...세웠던
성이 그대로 남아있다.
당시 후금의 지도자였던 누르하치는
-성팬 궁궐 11" 이곳에 머물며 명과의 전쟁을 지휘하고 있었다.
(보다가)
-궁궐 6" -압록강을 건너와 명나라군대와 합류한 조선군의
공격목표는 바로 이 성이었다.
-C.G.붉은선네개 20" -명나라군대는 네 방향으로 나눠...
후금의 도읍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C.G...파란선 올라간다 -그 중 조선의 지원군은
남동쪽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현장 팬 7" -이곳이 당시 조선군의 전투현장이다...
이 고개만 넘으면 후금의 도읍인 신빈이다.
-숲으로... 16" (보다가)
-그러나 당시 조선군은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않는다..
(한호흡 쉬고)
-명나라군과 합류한 조선군은 명나라군을 지원
-나무 팬 11" 하기위해 후방에 남아있었다.그런데 전방에 나갔던
명나라군이 후금에게 크게 패하고 돌아온다.
그러자 조선군은 뜻밖의 행동을 보인다..곧바로
후금에 투항의사를 밝히고 12,000여명의 병사들이
모두 후금에 투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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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명과 청은 두 번의 전쟁을 했는데 그때마다 명은
조선에 파병을 요구했다. 조선은 강홍립을 원수로 하여
한 개 부대를 파견했는데 조선군대는 이번 전투에 힘을 제대로
쏟지않았다. 즉 전쟁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않아 바로 투항했다.
-------------------
-차 트래킹 8" -과연 조선군은....전투에 참여할 의사가
없었던 것일까?
-진주강씨 사무실외경 4" -당시 대명지원군의 총책임자는 강홍립이란
-유지 꺼내오고 8" 인물이었다. 강홍립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의문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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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 펼치며
강홍립장군의 순검사라는 교집니다.
지금 국내외적으로 단 하나밖에 없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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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지 줌인 11" -순검사라면..지금의 국방부 특별검찰단으로
군부대를 감사하는 역할이다.
그런데 강홍립의 이력은 이것만이 아니다.
------------
*후손 인터뷰
강홍립장군께서는 원래 문과에 급제한 문관이었습니다.
근데 중국 서장관으로 다녀오시면서 국제적 감각을 가졌으리라 보이고
또한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하시면서 당시 국경지대인 후금의 정세를
잘 아시고 문무를 같이 겸비한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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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의 강홍립 이력을 c.g.로 23" -(표지 넘기는 것 보다가 강홍립 페이지넘길 때)
족보에 기록된 강홍립의 이력은 두페이지를
넘어간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서장관...
지금으로치면 외교관이다.
그렇다면 광해군이 강홍립을 선택한 건
유창한 중국말과 외교적인 감각을 높이 샀기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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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인터뷰
광해군은 당시 왜란이 끝난지 얼마 되지않은 상황에서
또다시 10000여명의 군대를 전쟁터로 보낸다는 것이
사회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단한 부담이라고 생각했지요
따라서 가능하면 그 전쟁에 말려들지않으려고 시도했었고
결국 명의 압력에 밀려 어쩔수없이 참전하게된 경우에도
최후까지 강홍립이라고 하는 인물을 전쟁터로 보내
명나라군사와 협상으로..전쟁에 깊이 발을 들이지않으려고
강홍립을 정한걸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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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시내에서 궁으로 11" -광해군이 대명지원군파병을 달갑게 여기지않은데엔
-궁앞의 자전거 탄 사람들 6" 이유가 있다.
-당시 패망의 기운이 짙었던 명에 비해
후금은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성 팬 24" -현재 선양시내엔
후금의 누르하치가 세운 고궁이 남아있다.
원래 명나라 땅이던 선양을 점령한 후금은
이곳을 새로운 도읍으로 정하고
화려한 왕궁의 면모를 갖추게된다.
-대정전 14" -지금도 옛모습 그대로 보존되어있는 고궁은
당시 후금의 세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짐작케한다,
-황제자리로 줌인 8" -명의 쇠퇴와 후금의 부상..
광해군은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국제정세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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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인터뷰(14 4110)...이 부분 살릴 수 있을까..앞과는 맞지않는데...)
광해군은 이미 아버지 선조를 따라 의주로 피난 갔을 무렵..
------ 실록의 이야기를 보면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떠오르고
있는 상황에 대해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파악하는 부분이 도처에
보인다. 따라서 대륙정세의 변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예민하게 주시해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서울 동관왕묘 풀 5" -그런데...광해군이 명을 배신했다고
비난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건물 팬 9"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중국식사당인
동묘...
-관우상 16" -중국의 장수인 관우를 모신 사당으로
흔히 관왕묘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서울한복판에 관우의 사당이 세워진게
된 건...당시 조선과 명의 독특한 관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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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 동묘가 건립되게된 건 임진왜란이 끝나고 중국황제가
보낸 칙서에 당시 조선에 지원병으로 왔던 명군이 왜군을
물리친 건 관우의 혼백이 많이 도와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당을 짓고 모시라는 칙서를 받고
3년공사 끝에 이 건물을 짓게되었다.
---------------
-임진왜란 지도 26" -명의 요구대로 관왕묘를 짓게된 배경엔
임진왜란이 있다.
1592년...조선을 침공한 일본은
무서운 속도로 조선을 점령해갔다...
부산에 상륙한 지...불과 20여일만에
일보은 한성을 점령하고...한반도 최북단까지 올라갔다.
-평양성탈환도 팬 16" -다급해진 조선은 명에 지원군 파병을 요청했고...
한반도최북단까지 밀고올라온 일본군이 명나라까지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명나라는 지원군을 파병한다.
-탈환도두번째커트 틸업 12" 조명연합군이 전과를 거둔 건...평양성에서였다.
평양성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틸업(세번째커트) 20"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고..
왜군은 남쪽으로 밀리게된다.
(조금 보고)
-틸업....(세번째 컷) 20" 그러나 평양성탈환이후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명나라덕분에 나라를
다시 찾게 되었다는 생각을 갖게된다.
이른바 재조지은이라는 것이다.
--------
*신병주 인터뷰
재조지은이라는 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국란을 맞이해서
이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줌으로써 조선이 다시 이렇게 건설할 수 있는
------- 왕실이라든가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며아라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켜야된다는 논리가 상당히 파급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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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왕묘 4" -관왕묘가 세워진 건 이러한 사회분위기
때문이었다.
-현판 12" -당시 관왕묘공사를 명령하기위해
중국황제는 직접 글씨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관우상 줌아웃 16" -이렇듯.광해군 집권당시
조선의 명나라에 대한 사대는 어느때보다 심했다..
중립외교를 펴려했던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비난을 받게된 건
이러한 분위기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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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3>광해군...명의 파병요청을 받아들이지않다
#관왕묘 외경앞에서....
-서울 한복판에 삼국지의 주인공인 관우의 사당이 있다는 걸 아는 분은
그리 많지않을텐데요..
그런데 이러한 관왕묘가 서울에만 세워진 게 아닙니다.
안동과 성주등 당시 명나라 군사가 머물렀던 곳은 어디에나 관왕묘가 건립되었습니다.
더구나...당시 조선은 전쟁으로인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명나라군사들은 관왕묘를 세우는데...조선의 물자를 조달했고...조선의 백성을 동원해
노동을 시켰습니다.
이 관왕묘의 존재는 당시 조선과 명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명에 대해 의외의 정책을 폅니다.
명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지않고...조선에 유리하도록...외교정책을 펼칩니다.
앞서 본 대명지원군 파병 문제가 바로 그 중의 하납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의 급박한 정세속에서...
명과 후금사이에 놓인 광해군의 고민은 끊이질않는데요...
이후 광해군은 어떤 외교정책을 펼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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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원 -
▣ 김윤만 -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 郡/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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