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담공 김시양 선조님 낙관(칼러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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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2-08-23 06:56 조회1,560회 댓글0건본문
<하담공 김시양 선조님 낙관(칼러판) 소개>
1, 출전 : <槿域印藪>(국회도서관 간. 1968. 313P)
2. 조사일 : 2002. 7. 19
김시양(金時讓) 1581(선조14)∼1643(인조21).
조선의 문신.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 비안현감(比安縣監) 인갑(仁甲)의 아들. 1605년(선조3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숭문원 정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주서를 거쳐 예조 좌랑으로 지제교를 겸하다가 1610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1611년(광해군3)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가 되어 지방향시를 주관할 때 임금을 비방하는 시제를 출제했다 하여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寧海)로 이배(移配) 되었다. 1623년 인조 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와 예조정랑(禮曹正郞)·병조정랑·수찬 (修撰)·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이듬해(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 난이 평정된 후 응교(應敎)로 문학(文 學)을 겸임, 이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경상감사로 있을 때 경상좌도와 우도의 전결(田結)이 일치하지 않음을 상소하여 균일하게 정비하였으며,정묘호란(丁卯胡亂:1627) 후 서북 지방의 경비가 중요시 되자 1629년(인조7)에 특히 평안도 관찰사 겸 체찰부사로 발탁되었다. 1631(인조9) 병조판서에 올라 팔도 도원수(八道都元帥)·사도 체찰사(四道 體察使) 등을 겸임하여 척화(斥和)를 주장했다.
그 후 강화 유수(江華留守)·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34년(인조12)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호조판서, 세자좌부빈객, 강화유수를 거쳐 1641년(인조19)「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개수(改修)할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겸 판춘추관사(判春秋館事)로서 이에 참여했다. 그러나 안질(眼疾)로 맹인(盲人)이 되었으므로 중도에 사직하였다.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인조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1643년(인조 21)에 충주 하담리의 사제에서 별세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 회령(會寧)의 향사(鄕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숙종때(1691. 숙종 17년) 忠翼을 시호로 받았다.
저서:<忠翼公 荷潭先生 遺稿>(<부溪紀聞>, <荷潭破寂錄>, <紫海筆談> 등이 수록)
▣ 김주회 - 올리시는 데로 복사해서 편집하기도 숨이 가쁩니다. 정말 대단한 자료입니다.
▣ 김재원 -
▣ 김태서 - 수고하셨습니다.
▣ 김윤만 -
▣ 郡/김태영 -
▣ 김영윤 -
▣ 태영/문 -
▣ 김정중 -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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