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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祖의 墨香을 찾아서] 37(김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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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11-03 02:16 조회1,7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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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祖의 墨香을 찾아서] 37(김정회)





41. 普亭 金正會 1903-1970



고창군청 홈

김정회(金正會)

호는 보정, 또는 연연당, 관향은 안동, 익원공 사형의 후손이고 회천 재종의 아들이다.

문학에 조예가 깊고 시서화에 능해 삼절이라 일컫기도 했다. 사람들이 추모비와 제명비를 고창 도산에 세웠다.



김정회고가

위치 : 위치 전북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151

전라북도 민속자료 : 제29호

지정년월일 : 1993.8.31 지정

1862년경에 지어진 이 김정회(1903-1970) 선생의 고가는 그의 고조때부터 살아온 집이다.

이는 조선조 상류 계층의 전형적인 가옥 형태로 안채, 사랑채, 그리고 행랑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간채, 사당, 안채를 중심으로 2동의 큰곳간돌은 자연석으로 되어 있다.

이중 용마루를 가진 팔각 지붕, 홑처마, 그리고 안마당보다 높이 자리잡고 있는 안채의 가옥 양식이 보통 다른 집에 비해 아주 색다르다.

안채 인근에 수채의 가옥이 있는데 그중 몇채는 한국 동란때 헐려 없어졌다.

보정, 김정회 선생은 조선 개축 공신인 익원공 김사형의 후예이며 대유학자이기도 하다. 한국 고등교육 기관의 하나인 현 성균관대학교의 전신인 경학원(명륜 전문학원)에서 경학을 가르쳤다.

보통때 그분은 매화,난초,국화를 즐겨 그렸지만 특히 대나무 그림은 아주 유명하다. 대학자로써,또 서예가로써 글씨와 그림은 지금도 세인으로 하여금 항상 진한 묵향을 느끼게 하고 있다.

보정, 김정회 선생은 상류 사회 출신이지만 많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었으며 덕행으로 많은 주위 사람들을 계도하였다. 선생이 타계한 후에도 두터운 덕망은 많은 향리 사람들에 의하여 계속 기리어 지고 있다.

문의전화 고창군청 문화체육과 (063)560-2224

소유자 김경식(063)564-4156

익원공파이신 보정(普亭) 김정회(金正會)(1903년∼1970년) 선생은 전북 고창 고장의 석학이요 예술인으로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에게 서화(書畵)를 배웠는데, 특히 난(蘭)과 죽(竹)은 일품으로 쳤다고 합니다.

보통때 그분은 매화,난초,국화를 즐겨 그렸지만 특히 대나무 그림은 아주 유명하다고 하며, 대학자로써,또 서예가로써 글씨와 그림은 지금도 세인으로 하여금 항상 진한 묵향을 느끼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화재청 홈

종 목 시도민속자료 29호 명 칭 고창김정회고가 (高敞金正會古家)

분 류 가옥 수 량 일곽 지정일 1993.08.31

소재지 전북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151

소유자 사유 관리자 김병수

일제시대의 대학자이자 서예가인 보정 김정회(1903∼1970)가 살던 옛 집이다. 철종 13년(1862)경에 지어 그의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살아온 집이라 한다.

현재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사랑채, 사당, 곳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면 6칸·옆면 3칸의 안채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후대에 양쪽에 각각 1칸씩 덧붙였다.

안마당보다 높이 자리잡고 있는 안채의 양식은 다른 집에 비하여 특이하다.

안채의 앞쪽에 위치한 사랑채는 앞면 4칸·옆면 3칸의 팔작지붕집이다.

안채와 사랑채에 비해 훨씬 뒤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행랑채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집이다.

안채의 양쪽으로 곳간채가 1동씩 있으며, 안채 뒤로는 사당이 있다.

조선 후기에 지은 전형적인 상류계층의 가옥이다.

<문화재명 고창김정회고가(高敞金正會古家)>

이 고가는 고창읍 도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 안채, 사랑채, 문간채, 행랑채 및 사당과 2동의 곳간으로 되어 있다.

안채는 잡석으로 쌓아올린 축대 위에 세워져 있는데,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八作)지붕 건물이다. 후에 동·서쪽에 각각 1칸씩을 덧붙였다. 주초는 자연석을 이용한 덤벙주초이고, 기둥은 방형과 두리기둥의 섞여 있으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사랑채는 안채의 앞에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동쪽 끝에 내문(內門)을 달아내었다.

행랑채는 사랑채의 동편에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행랑채의 건립 연대는 안채나 사랑채에 비해 훨씬 뒤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당은 안채의 뒤에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곳간채는 안채의 동쪽과 서쪽에 있는데, 동쪽 곳간은 정면 6칸, 측면 2칸이며, 서쪽 곳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보정(普亭) 김정회(金正會)(1903년∼1970년)는 이 고장의 석하이요 예술인으로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에게 서화(書畵)를 배웠는데, 특히 난(蘭)과 죽(竹)은 일품으로 친다.









디지털한국학 홈

김규진(金圭鎭) 1868-1933

김규진의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으로, 대나무 그림으로 유명하며, 산수, 화훼, 사군자에 두루 뛰어났고, 글씨는 여러 서체에 능했다. 일찍이 외삼촌 이희수(李喜秀, 1836-1909)에게서 글씨를 익혔고, 20대를 청나라에서 보냈으며 1915년엔 서화연구회를 세워 후학을 양성했다. 그는 또한 해강묵죽보(海岡墨竹譜)를 남길 만큼 묵죽에 많은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묵죽도 墨竹圖

김규진 (金圭鎭) 말기 사군자 창덕궁

이 <묵죽도>는 대련으로 한 폭은 중간이 부러진 굵은 대 옆으로 가는 새 줄기가 뻗어 있고, 또 한 폭은 긴 화면을 가는 줄기가 자유롭게 교차하면서 길고 가는 잎이 무리지어 달려 있다. 담묵으로 줄기를 그리고 농묵으로 죽간을 표시하였으며, 가는 가지에는 끝이 날카로운 댓잎이 있다. 앞들은 가지마다 농담을 달리하여 표현하여 화면 전체에 변화를 주었다. 강인한 대의 성격을 표현하려 한 듯 하다.



청산불노 靑山不老

김규진 (金圭鎭)

말기(1913년) 산수 비단에 담채 12.4 × 34.7㎝ 간송미술관

대나무 그림으로 유명한 김규진은 대나무 그림에 대한 명성으로 인해 그의 산수화가로서의 명성이 가리워진 점이 없지 않으나 중국풍이 짙은 산수와 더불어 1920년 창덕궁 벽화제작에 참여하여 <총석정절경(叢石亭絶景)>, <금강산만물초승경(金剛山萬物肖勝景)>과 같은 대작을 남기고 있다. 이 <청산불노>는 철저히 전통적인 기법을 따른 예로서 강을 사이에 두고 멀리 산이 있는 강 양안의 풍경을 습윤한 먹으로 표현하였다. 전형적인 남종문인화풍의 산수화라 할 수 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재이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재원 -

▣ 郡/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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