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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12-17 04:55 조회1,550회 댓글0건본문
★김준민 金俊民 [?~1593]
조선 중기의 무신.
1583년(선조 16) 함북 병마절도사 ★이제신(李濟臣)과 함께 군관(軍官)으로 출전하여 호족(胡族)을 정벌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거제현령(巨濟縣令)으로 있으면서 관군이 패하여 흩어지자 의병을 이끌고 무계현(茂溪縣)에서 왜군인 ★모리[毛利輝元]의 부대를 격파하였다.
다음해 ★김천일(金千鎰)의 밑에서 진주성(晋州城)의 동문을 고수하려고 악전고투하다가 전사하였다. 전란이 끝난 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병조판서가 추증되고,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정기룡 鄭起龍 [1562~1622]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 곤양(昆陽)
호 : 매헌(梅軒)
별칭 : 자 경운(景雲), 시호 충의(忠毅), 초명 무수(茂壽)
활동분야 : 군사
자 경운(景雲). 호 매헌(梅軒). 시호 충의(忠毅). 초명 무수(茂壽). 곤양정씨(昆陽鄭氏)의 시조. 1580년(선조 13) 고성(固城)에서 향시에 합격하고, 1586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왕명으로 개명하였다. 1590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립(申砬)의 휘하에 들어가 훈련원 봉사(奉事)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별장(別將)으로 승진하여 우방어사 ★조경(趙儆)을 따라 종군, 거창(居昌)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금산(錦山)싸움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구출한 뒤 곤양의 수성장(守城將)이 되었다.
유병(遊兵)별장을 거쳐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왜군과 대치 ·격전 끝에 상주성을 탈환하였으며, 1593년 전공으로 회령부사(會寧府使)에 승진하고 이듬해 상주목사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토왜대장(討倭大將)이 되어 고령(高靈)에서 적장을 생포하는 한편 성주(星州) ·합천(陜川) ·초계(草溪) ·의령(宜寧) 등을 탈환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승진, 이어 경주(慶州) ·울산(蔚山)을 수복하였다. 1598년 명(明)나라 군대의 총병직(摠兵職)을 대행하여 영남 방면의 왜군 패잔병을 소탕하고 용양위(龍讓衛)부호군이 되고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재임되었다.
1601년 경상도방어사 ·김해부사 ·밀양부사를 거쳐 중도(中道)방어사에 오르고, 뒤에 용양위부호군 겸 오위도총부총관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겸 울산부사가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상호군(上護軍)에 승진, 1617년 3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올라 통영(統營)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상주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최경회 崔慶會 [1532~159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 해주(海州)
호 : 삼계(三溪) ·일휴당(日休堂)
별칭 : 자 선우(善遇), 시호 충의(忠毅)
활동분야 : 정치, 군사
출생지 : 전남 능주(綾州)
본관 해주(海州). 자 선우(善遇). 호 삼계(三溪) ·일휴당(日休堂). 시호 충의(忠毅). 능주(綾州) 출생. 1561년(명종 16) 진사(進士)가 되고, 1567년(선조 즉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영해군수(寧海郡守)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되어 금산(錦山) ·무주(茂州) 등지에서 왜병과 싸워 크게 전공을 세워 이듬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승진했다. 이 해 6월 제2차 진주성(晉州城) 싸움에서 9주야를 싸우다 전사했다. 좌찬성(左贊成)이 추증, 능주의 포충사(褒忠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에 배향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임계영 任啓英 [1528~1597]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 : 장흥(長興)
호 : 삼도(三島)
별칭 : 자 홍보(弘甫)
활동분야 : 군사
본관 장흥(長興). 자 홍보(弘甫). 호 삼도(三島). 1576년(선조 9) 별시문과에 급제,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000여 명의 의병을 규합, 남원에서 ★최경회(崔慶會)가 이끄는 의병과 합류하고 전라좌도의병장이 되었다. 이어 장수 ·거창 ·합천 ·성주 ·개령 등지에서 왜적을 대파했다.
왜군이 진주성(晉州城)을 포위하자 ★장윤(張潤)에게 의병 300명을 나누어 관군을 지원하게 했으며, 고성 ·거제 등지에서 왜적을 공격, 큰 전과를 거두었다. 화의가 성립된 후 양주목사(楊州牧使) 등을 지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객사했다. 병조참판 겸 의금부동지사에 추증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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