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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姓地탐방-괴산군 소수면 수리편(참고자료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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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1-05 01:39 조회1,8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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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공(휘錫) 3자 휘友甲 후손자료 모음







▣ 안동김씨 게시판



우갑(友甲) 參奉公

-시양(時亮) 判官公

----계(系) 判官公

----약(約)

----기(紀) 參判公

----강(綱) 嘉善公

----신(紳) 生員公

----뉴(紐) 縣監公

----서(緖) 宣傳公

----집(실사+集)

----전(전)

----엄(실사+奄)

----성(실사+成)

-시망(時望)

-시상(時尙) 僉正公

----대건(大乾) 判官公

----대곤(大坤) 判官公



錫(제학공 6대손)-友甲(3자)-紀(3자)-鼎興(3자)-允之-來徵-龍著-範一-致健-由顯-箕年-寅浩-相天-萬應.(휘 鼎應의 11대 종손) )



錫(제학공 6대손)-友甲(3자)-紀(3자)-鼎臣-允孚-海徵-礪著- -天健-由岳-學年-履浩-相一-鏞應-泰珪-瀅植(2자). 형인 源植은 참판공(휘 기)의 13대 종손)







▣ 괴산군지(1990)

12. 金時亮(김시량 1554(명 9)∼1617(광해 9))

---자는 汝明(여명), 본관은 안동이며 우갑의 아들이며 부사 시약의 종형이다. 벼

슬은 음 군자감 판관이며, 어려서부터 孝友(효우)가 탁이하였고 齊家(제가)에 엄

하여 儒林(유림)의 표증이 되었다. 그의 묘는 문광면 대장동에 있다.

(문헌 : 家文譜(가문보))







▣ 괴산군지(1990)

14. 金約(김약). 金紀(김기) 형제.

---약의 자는 士守(사수). 기의 자는 正叔(정숙)이니 공릉 참봉 우갑의 손자이며

군자감 판관 시량의 자이며, 구암 충갑. 의재 제갑의 종손이다. 기는 1616년(광해

군 8) 무과에 급제하여 첨사가 되었으며, 증 병조참판이 되었다. 효행사실 구읍지

(문헌 : 괴산군지)







▣ 괴산군지(1990)

15. 金大乾(김대건)

---의재 김제갑의 조카 時尙(시상)의 아들이다.

(문헌 : 괴산군지)







▣ 괴산군지(1990)

17. 金鼎臣(김정신 1609∼1699)

---본관은 안동이며 첨사 기의 아들이다.(문헌 : 괴산군지)







▣ 괴산군지(1990)

19. 金允孚(김윤부 1653∼?)

---자는 克休(극휴), 김정신의 아들로 부모가 병들자 대변을 맛보고 병세를 진단

하였으며, 단지 주혈하여 위급한 상태를 면하였고 또 목욕재개하여 부모의 병을

대신해 줄 것을 하늘에 기도하였다. 마침내 부모상을 당하니 전후 12년간을 여막

에 거처하였으며 풍설이나 뇌우가 심할 때에는 묘위에 엎드려 울며 「자식이 이

곳에서 지키니 염려마소서」하고 고하니 그의 출천지대효를 극찬하였다.

(문헌 : 괴산군지)







▣ 괴산군지(1990)

21. 金應徵(김응징 1692∼ ? )

---자는 景遇( 경우), 본관은 안동 윤부의 아들이다.(문헌 : 괴산군지)







▣ 괴산군지(1990)

22. 金 珌(김 필 1745∼ ? )

---자는 必玉(필옥) 응징의 손자이다. 고조이래 4세를 계승하는 孝友一家(효우일

가)에 태어나 친환에 착지함이 4번에 이르니 열손가락 가운데 성한 것이 없고 전

후 9년 거상에 피눈물에 젖어 두눈의 시력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

(문헌 : 괴산군지)







▣ 괴산군지(1990)

178. 金圭年(김규년 1812∼1884)

---자는 禎瑞(정서), 본관 안동, 진사 우갑의 10세손이다. 고종조에 진사하였으나

영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문사들과 교우함으로써 평생을 지냈다.

(문헌 : 괴산군지)







▣ 괴산군지(1990)

195. 金相一(김상일 1852∼1935)

---자는 景明(경명), 호는 ()山(()산). 金鳳山人본(금봉산인), 본관은 안동으로 진

사 김규년의 손자이다. 울진. 용궁. 예천. 함평. 청풍 등 여러 고을 군수를 역임하

여 선정을 베풀었고 벼슬이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괴산군 용관읍 남쪽에 선정비

가 세워졌고 괴산군 소수면 수리에도 송덕비가 세워졌다.(문헌 : 괴산군지)



▣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 사감정(四感亭)

【관리번호】 367-920-261-134

【지정사항】 <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 정·각(정자)

【유적위치】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유적 분포지도 참조



【소 재 지】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수리 522

【시 대】 근대

【관 리 자】

【유적내용】

소수면사무소에서 마주보이는 마을 뒤 구릉에 위치한다.

조선말(朝鮮末) 고종(高宗)때 울진, 용궁, 예천, 함평, 청풍, 장수의 6읍(邑)을 역재 선치(歷宰 善治)한 김상일(金相一)이 그 출생년월일시의 사주(四柱)가 고종황제와 동일한 인연으로 특별히 몽은(蒙恩)한 바 있음을 심감(深感)하여 1933년 김상신(金相愼), 김상현(金相賢)과 함께 건힙한 것으로서 사감정(四感亭)의 이름은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정내(亭內)에는 ‘사감정(四感亭)’, ‘영모재(永慕齋)’의 현판이 있고 건물구조는 단층 정방형(單層 正方形)의 목조와가(木造瓦家)로서 건평 4평의 건물이며 송판으로 마루가 놓여져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다.

【참고문헌】 충청북도, 1982, <<문화재지>>, 173.

【비 고】







▣ 괴산군지(1990)

197. 金恒默(김항묵 1860∼1937)

---초명은 龍浩(용호), 자는 應王(응왕), 호는 石淵(석연) 안동 진사 김우갑의 11

세손이며, 영년의 아우이다.筮仕(서사)로 고종황제의 심임을 받아 벼슬이 가선대

부 시종원 부경(참판)에 이르렀다. 당시 일제 의 침략으로 국운이 점차 쇠퇴함을

울분강계하여 벼슬을 버리고 괴산군 칠성면 성산에 우거하면서 유명한 선비들과

시문으로 자적하였다. 그가 살던 집은 현재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문헌 : 조선상여승람)







▣ 괴산군지(1990)

198. 金東浩(김동호 1860∼1921)

---자는 振宗(진종), 호는 荷一(하일), 본관은 안동이며 진사 김우갑의 11세손이

며 김영년의 아들이다. 蔭仕(음사)로 벼슬이 비서원 비서감승에 이르렀다. 서장관

으로 민병석판서를 따라 청나라 북경에 들어가 고명한 서예가 翁方綱體(옹방강

체)를 배운바 있어 당대 명필가로 명성을 떨쳤고 현재 그의 유품이 많이 남아있

다.(문헌 : 조선상여승람)







▣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 괴산 김기응 가옥(槐山 金璣應 家屋)

【관리번호】 367-860-360-238

【지정사항】 중요민속자료 제136호

【유적종류】 고가

【유적위치】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유적 분포지도 참조



【소 재 지】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율원리 907-10

【시 대】 근대

【관 리 자】 개인(김기응)

【유적내용】

조선 후기의 양반 가옥으로서 그 건물양식은 병렬식 평면형이다. 바깥채의 중앙에 솟을대문을 두고 좌우로 ㄱ자의 건물에 마굿간, 곳간, 머슴방과 부엌 등을 배치하여 외곽을 구성하였으며 그 안에 외정(外庭)을 두어 공간을 만들고, 내장(內墻)을 쌓아 안채와 사랑채를 구획하고 사랑채에는 ㄱ자의 건물에 광과 변소 등을 배치하였다.

사랑채는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방을 배치하는 남부형의 가옥구조에 사랑방에 침방(寢房)을 붙인 변형 건물이다. 이 고가는 안채와 사랑채는 본래의 건물이지만 중간채는 화재로 뒤에 중건한 것이며 바깥채도 안채에 비하여 시대적 차이가 있다.

【참고문헌】 충청북도, 1982, <<문화재지>>.

【비 고】 1984년 1월 10일 중요민속자료 제136호 지정



▣ 문화재청 홈

종 목 중요민속자료 136호

명 칭 괴산김기응가옥 (槐山金璣應家屋)

분 류 가옥

수 량 일곽

지정일 1984.01.10

소재지 충북 괴산군 칠성면 율원리 907-10

시 대 조선시대 후기

소유자 김기응

관리자 김기응



낮은 동산을 배경으로 양지바르고 터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집으로 칠성고택이라고도 부른다. 안채는 조선 후기(1800년대 초반)에 지은 것이라고 하며 사랑채, 중문채, 대문채 등은 나중에 지은 것들이다.



대문채, 중문채, 사랑채, 행랑채, 안채, 광채, 헛간채로 구성되어 있는 규모가 매우 큰 집이다. 기다란 바깥행랑채 대문을 들어서면 바깥마당이고 그 왼편에 광채가 있다. 광채 위쪽으로 중문간채가 있고 오른쪽에는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헛간채, 오른쪽에 다시 중문이 있어 이곳을 들어서면 안행랑채와 안채가 있다.



안채는 ㄷ자형 평면으로 남도식 배치방법을 띠고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안방, 부엌(찬방 포함)을 두었으며 오른쪽에 건넌방을 놓았다. 안방과 건넌방 앞에 툇마루를 만들었는데 건넌방 앞까지 설치해 통로로 이용한 점이 특이하며, 한쪽 옆면 전체를 부엌으로 크게 만든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사랑채는 ㄱ자 모양으로 안채 쪽에서부터 부엌, 아랫사랑방, 꺾어져 큰사랑방, 대청, 건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큰사랑 옆으로는 누마루를 마련하였고 건넌방까지 툇마루를 달았다. 나머지 건물들은 20세기초에 지은 것들로 바깥행랑채는 11칸 크기에 광, 방, 헛간 등이 배치되어 있다. 광채는 6칸으로 양 끝에 온돌을 설치하였다.



집을 지은 기법이 옛 법식을 잘 따르고 있으며 크고 작은 공간구성의 배열 또한 짜임새 있게 갖추고 있는 양반집으로, 우리나라 전통 상류주택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



<문화재명 괴산김기응가옥(槐山金璣應家屋)>

들을 앞에 두고 길에 면한 길다란 행랑채의 가운데 우뚝 선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깥마당에 이른다. 바깥마당 서쪽에는 또 하나의 광채가 길게 배치되고 동쪽은 공간감을 형성키 위해 앞의 행랑채가 뒤로 머리를 꼬부렸다. 한대(臺) 높게 마련된 사랑공간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면서 왼쪽에 바깥마당으로 향한 문간채 중문을 ㄹ자로 꺾어 들어서면 가운데 마당이 나타난다. 가운데 마당 서쪽에는 중문간채가 꼬리를 돌려서 ㄴ자로 앉았다. 다시 안채 맞은편에 배치된 광채의 서쪽간 내문(內門)을 들어서면 안마당에 다다른다. 안채는 안마당을 둘러싸서 ㅁ형으로 배치되고 사랑채는 안 광채 앞에 중문간채와 나란히 배치되는데 ㅗ자 모양으로 만들어서 꽁지를 안채 동쪽 날개와 맞춰 오른쪽을 막고 서쪽은 뒤광채와의 사이에 담장을 둘러 샛마당을 구성했다. 사랑마당은 사랑채 앞에 마련되었는데 바깥마당 보다 한 대 정도 높으며 후원(後園)은 사랑채 동쪽에 조성되었다. 샛마당과 안마당, 사랑후원과 안마당, 가운데(중)마당과 사랑마당 사이에는 각각 샛문이 기묘하게 만들어져서 각 공간의 폐쇄감을 높였다. 특히 사랑마당과 바깥마당을 일각대문으로 연결하여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는 별당형식의 공간구성을 보인 점이 흥미롭다. 이와 같이 이 집은 크고 작은 공간들이 여러 가지 형태의 대문들로 연결되어 아름다운 공간율동을 구성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정남향(자좌오간(子坐午間))집이다.



안채는 19세기 초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남도방식의 공간구성을 하였다. 곧 몸채 서쪽 귀에 세로로 긴 3간 부엌을 두고 도리간으로 2간 안방, 2간 대청, 건넌방의 차례로 배치했다. 안방과 건넌방 앞까지의 사이는 툇마루를 시설했는데 건넌방 앞에도 두어서 통로로 이용하는게 특이하다. 대청 앞에는 문없이 바로 마당으로 개방했으며 안방과 대청 사이는 분합문으로 구분했다. 부엌 상부에는 뒤의 2간만 다락을 만들고 서쪽으로 헛기둥을 내밀어서 살강을 설치했다. 살강 위에는 밖으로 비를 막기 위해 따로 눈썹지붕을 해서 이은게 재미있다. 안방과 건넌방 뒤쪽 역시 헛기둥을 세워 반침을 만들었으며 웃방과 대청 사이에는 쪽마루를 깔았다. 서쪽 날개에는 부엌 앞에 구들을 시설했으며 동쪽 날개에는 간반(間半) 크기의 작은사랑, 작은부엌(상부 다락), 광으로 구성되었다. 건넌방과 작은사랑 동쪽에도 조그만 쪽마루가 깔렸다.



구조(構造)는 몸채가 1고주5량(대청 중앙은 긴보 5량), 날개는 3량으로 처리했고 지붕은 골기와 합각(合閣)인데 날개 앞까지 합각을 만든 것이 특색이다. 댓돌은 외벌대 자연석(自然石)이고 네모꼴 높은주초이며 네모기둥이다. 도리는 납도리인데 종도리와 처마도리에만 장혀를 받치고 중도리에는 없다. 외진주 상부에는 단이(보아지)로 대들보를 보강(補强)했으며 대공은 동자주를 했는데 대청(大廳) 중앙만 사다리꼴이다.



사랑채는 1900년(年) 전후(前後)에 지어졌다고 추정되며 특이한 평면구성을 보인다. 서쪽에 건넌사랑을 두고 대청, 좌우 2간(間)의 큰사랑, 맨 동쪽에 약간 높혀 누마루를 시설했다.



큰사랑과 건넌사랑까지의 앞퇴에는 툇마루를 깔고 대청(大廳)은 전면으로 개방(開放)되었다. 건넌사랑과 윗사랑방은 각각 대청으로 불발기 분합문(分閤門)을 달아 틀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큰사랑은 윗사랑, 샛사랑으로 구분되는데 샛사랑 뒤로 꺾어져서 아랫사랑방을 두었다. 꼬리 맨 뒷부분이 사랑부엌이다. 큰사랑의 각방은 미닫이문으로 구분될 뿐 개방(開放)이 가능하다. 건넌사랑 뒤에는 헛기둥을 세워 반침을 만들고 대청, 윗사랑, 아랫사랑 뒤쪽으로는 쪽마루가 놓였다.



구조는 몸채가 1고주5량이고 꼬리는 3량으로 처리했으며 지붕은 골기와 ·합각지붕 ·겹처마인데 꼬리부분은 박공지붕으로 처리되었다. 댓돌은 화강암 장대석 외벌대이고 네모꼴 높은주초, 네모기둥이며 장혀받친 납도리집이다. 안채와 다른 점은 대들보를 받치는 단이(보아지)가 없는 점이다.



나머지 건물은 20세기(世紀) 초(初)에 지어졌으며 모두 맞걸이 3량구조의 박공지붕집이다. 안의 광채는 대문간과 3개의 광으로 구성된 바 모두 빈지널로 벽을 했다. 중문간채는 모두 9간(間)인데 전면에는 대문간과 헛간을, 꼬리쪽은 구들이 배치(配置)되며 행랑채는 11간(間)으로 가운데 솟을대문과 양옆의 광들과 구들+대청으로 이루어졌다. 바깥 광채는 6간(間)인데 양 끝에 구들이 배치(配置)되고 나머지는 광으로 구성되었다.



사랑채의 합각(合閣)에는 전돌로 완자무늬를 아로새겼으며 샛마당 광채 벽에는 사랑에서 바라볼 수 있게 수복(壽福)무늬와 팔각형 겹곡두무늬가 상긋법으로 그려져 있고 기타 담장의 문양도 화문담으로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집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둑담도 인상적(印象的)이다.







▣ 괴산군지(1990)

25. 金相翊(김상익 1852∼1933)

---본관은 안동으로 괴산군 소수면 수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고종조 의금부도사를

역임하였다. 1910년 경술 한일합방으로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현직을 버리

고 일가족을 이끌고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용화리 늘티 장바위로 낙향하였다.

---당시 이곳 일대가 항일의병 양병의 본거지로 총책을 맡은 한봉수 의병대장과

손잡고 슬하에 장남 세응, 차남 한응, 3남 정응, 4난 성응, 5남 낙응 등 5형제와

온 가족이 피복제조 세탁과 무기제작 수리 그리고 고향인 수리에 추수해 놓은 수

백석의 양곡을 陸 (육태)로 운반하여 군량으로 보급하고 밤에는 독립운동 낮에

는 왜병과 拉奪(납탈) 등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 수백석지기 재산을 소진하고 고

향에 돌아와 호구지책에 급급하면서도 여생을 후회없이 마쳤다. 1945년 8월15일

해방후 4남 성응이 독립유공자의 유족이며 독립유공자라하여 충청북도 초대 내무

부장에 취임한 바 있으며 6.25동란때 이로 인하여 납치되어 피살당하였다.

(문헌 : 공적비문)



▣ 도정반세기(이승우, 1996)

<미군정청 출범>

(1945년) 9월 14일 하지 중장의 군정 시정방침이 발표되고 19일에는 군정청이라는 공식 명칭이 선포되었다.

충북도청에서도 10월 하순쯤에 미 군정 체제가 잡혀가기 시작했다. 우선 군정 법령으로 도 기구를 개혁하고 11월초에 충청북도 군정청이 들어서게 되었다. 도 군정장관으로 머피 중령이 임명되고 부군정장관에는 더피 중령이 부임했다. < 중 략 >

1946년 2월 15일자로 한국인 도지사에 윤하영 목사가 선임되었다. 윤지사는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부임 당시 57세 (1889년생) 였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수학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신의주에서 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해방을 맞이하여 신의주 자치회 부회장에 추대돼 잠시 일하다가

월남후 미 군정청 여론조사과장,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한 다음 충북지사로 부임했던 출중한 종교지도자였다.

충북지사 재임 3년간의 행적이나 일화에 관하여는 오늘날까지도 심심찮게 화제에 오르내리고 있는데 한결같이 인격과 덕망이 훌륭했던 청빈한 도백이었다는 찬사로 칭송받았던 분이다.

내무부장에는 애국지사이며 덕망가였던 金聲應 씨 (전 서울대 교수 金泰吉 박사의 선친) 가 보임되었는데, 그는 행정경력은 없었지만 일제시대에 항일운동가였으며 지방 주민들로부터 두터운 존경을 받고 있었던 덕망가였다. 그는 두루마기를 입고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근무했었다고 한다.

경찰부장에 선임된 박노태 씨와 김영규 씨도 마찬가지로 비전문적인 지방 유지였다. 이러한 인물 선발 방식은 다분히 미국적 민주주의의 정서와 맥락에서 연유되었을 것이다.

< 후 략 >







▣ 괴산군지(1990)

26. 金鏞應(김용응 1870∼1945)

---본관은 안동이며 괴산군 소수면 수리에서 출생하였고 章陵參奉(장릉참봉)을

지냈다. 1910년 경술 한일합방으로 國破君亡(국파군망)하니 분연히 독립운동에 가

담하여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하에 국내에서 군자금조달에 활약하다가 왜경

에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한 사실이 있으며 8.15 광복후에 이승

만박사가 반민특위위원장에 추천하여 취임케 하려 하였으나 마침 병환으로 취임

치 못하고 그의 손이 중죄를 범하였으나, 조부의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인하여

이승만대통령의 특별 배려로 감형의 혜택을 받은 사실이 있다.

(문헌 : 문중세진록)



▣ 충청북도 독립유공자공훈록 (2001, 광복회 충청북도지부)

<부자독립운동공적비>

괴산 출신으로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김용응, 김태규 선생 부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건립일자 : 1991년

소재지 : 소수면 수리

건립기관 : 대한노인회 괴산군지회

관리기관 : 대한노인회 괴산군지 회

시설규모 : 2.7m

공훈내용 : 김태규 154쪽 참조



김태규 (金泰珪) 1896∼미상

충청북도 괴산 사람이다.

그는 3·1독립운동 직후 국내에서 설립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재무부장으로 활동했다.

동단은 1919년 5월 조용주, 연병호, 이병철 등이 외교활동을 행동지침으로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것으로서, 본부인 중앙부를 서울에 두고, 국내의 각처와 해외조직으로 상해지부를 설치하였는데, 중앙부의 부서 구성은 총무를 중심으로 외교부, 재무부, 편집부, 외교원, 외교특파원 등으로 이루어졌다.

동단의 활동은 외교선전 활동과 관련된 외교원의 해와파견 및 기관지 {외교시보}의 발간등 선전물 간행이 주된 것으로서, 재무부장의 책임을 맡았던 그는 이같은 활동에 필요한 자금지원을 관장했다.

그러던 중 동년 10월에 그는 외교연구를 목적으로 상해에 파견되었으며, 한편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충청북도 괴산군 조사원으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임무를 띠고 국내에 다시 들어 왔다가 동년 11월말 동단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체포된 그는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판결문 91920.6.29 대구지방법원)

조선민족운동연감 60

고등경찰요사 191, 193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208

한국독립운동사 (문일민) 209

한국독립사 (김승학) 하권 115

독립운동사 (국가보훈처) 4권 301, 448

독립운동사자료집 (국가보훈처) 9권 421







▣조선일보/수도권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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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 빨치산 출신 화가 김형식 개인전 (2002.10.20)



사상범으로 장기 복역한 후 고향에 묻혀 작품활동을 하는 화가 김형식(金瀅植·76)씨가 후배 예술인들의 도움으로 개인전을 연다.

김씨는 19~25일 청주 조흥문화갤러리에서 유화, 수채화, 아크릴 등 25점의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갖는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은 ‘고목’, ‘천변(川邊)’, ‘뜰’, ‘갈산고지’ 등으로 자연을 벗삼아 고독하게 생활하는 자신의 삶과 심경을 표현하고 있다.

김씨의 삶은 격정과 혼돈으로 얼룩졌던 한국 현대사를 그대로 닮았다. 사회주의에 심취했던 그는 서울 법대를 중퇴하고 월북, 한국전쟁때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경남 밀양 부근에서 체포돼 20여년간 수인생활을 했다. 출소 후 47세에 결혼해 고향인 충북 괴산군 소수면 수리에 정착했으며, 4년전 교통사고로 부인이 사망한 후 혼자 생활하고 있다.

서울 배재중학교 재학시절부터 그림을 그려온 김씨는 빨치산 활동과 교도소 복역, 농촌 정착후의 생활 등을 소재로 삼아 다양한 작품을 내놓고 있다. ‘겨울산’, ‘수인’, ‘다시 찾은 고향’ 등이 대표작이다. 김씨는 1999년 11월 첫 개인전을 열었다.

(劉泰鍾기자 youh@chosun.com )











☞ 도정반세기 (이승우, 1996) 라는 책자에 김학응 충북도지사의 충북대학교 설립관련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일간 시간을 내서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 김윤만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 김윤식 -

▣ 김은회 - 잘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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