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기문(大東奇聞) 03 (김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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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1-05 01:57 조회1,682회 댓글0건본문
대동기문(大東奇聞) 03 (김응하)
대동기문에 해동명장전 海東名將傳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삼국시대부터 인조 때까지의 명장 46명의 전기(傳記)를 엮은 책---에서 인용한 김응하 장군 관련 글이 실려 있습니다.
■新完譯 大東奇聞 上,中,下 (2000, 이민주 역, 명문당)
中 p241 金應河가 나무에 의지해 죽다.
김응하는 철원사람이니 자는 景義이다. 신장이 8척이 넘고 風儀가 俊偉하고 기개가 軒昻(헌앙)하며 술을 두어 말 마셔도 어지럽지 않았다.
나이 25세에 무과에 급제했는데 백사 이항복이 한번 보고 기이하게 여겨 선천군수로 옮겼더니 부임하자 인재를 모으는 것으로 急務를 삼으니 士庶들이 그 의리에 감동하지 않은 자가 없어서 모두 응하를 위하여 한번 죽고자 했다.
己未 深河(심하)싸움에 좌영장으로 강홍립의 節制를 받게 되었는데, 떠나기에 임하여 그 아우 응해가 따라가려 하자 응하는 말하기를
"형제가 모두 죽는 것이 유익할 것이 없다."
하여 힘써 말리고 집사람과 결별하고서 강을 건너 심하에 이르러 청나라 사람과 만나 힘써 싸우다가 기운이 다하여 나무에 의지하여 죽으니 명나라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요동백을 증직하였다. 우리 조정에서는 영상을 증직하고 시호는 충무이다. <명장전>
●해동명장전 海東名將傳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삼국시대부터 인조 때까지의 명장 46명의 전기(傳記)를 엮은 책.
구분 : 목활자본
저자 : 홍양호
시대 : 조선 후기(1816)
소장 : 규장각도서·장서각도서·국립중앙도서관
목활자본. 6권 3책. 1816년(순조 16) 인간(印刊). 규장각도서·장서각도서·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책머리에 1794년(정조 18)에 저자가 쓴 자서(自序)가 있다.
내용은 권1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장보고(張保皐)·심나(沈那), 고구려의 부분노(扶芬奴)·을지문덕(乙支文德)·안시성주(安市城主), 백제의 흑치상지(黑齒常之), 고려의 유금필(庾刃弼)·강감찬(姜邯贊)·양규(楊規)·윤관(尹瓘)을, 권2에 오연총(吳延寵)·김부식(金富軾)·조충(趙沖)·김취려(金就礪)·박서(朴犀)·김경손(金慶孫) ·이자성(李子晟)을, 권3에 김방경(金方慶)·한희유(韓希愈)·원충갑(元沖甲)·안우(安祐)·정세운(鄭世雲)·안우경(安遇慶)·정지(鄭地)를, 권4에 고려의 최영(崔瑩)을 비롯하여 이지란(李之蘭)·최윤덕(崔潤德)·이종생(李從生)·어유소(魚有沼)·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을, 권5에 곽재우(郭再祐)·정문부(鄭文孚)·황진(黃進)·휴정(休靜:西山大師)·정기룡(鄭起龍)·김시민(金時敏)을, 권6에 이정암(李廷鐫)·임중량(林仲樑)·김덕령(金德齡)·정충신(鄭忠信)·김응하(金應河)·임경업(林慶業)·정봉수(鄭鳳壽)·유림(柳琳) 등을 수록하였다. 기술(記述) 방법은 정사(正史)의 열전형식을 본떴다. 자서(自序)가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홍양호 洪良浩 [1724~1802]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본관 : 풍산(豊山)
호 : 이계(耳谿)
별칭 : 자 한사(漢師), 초명 양한(良漢), 시호 문헌(文獻)
활동분야 : 정치, 문학
주요저서 :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고려대사기(高麗大事記)》
본관 풍산(豊山). 자 한사(漢師). 호 이계(耳谿). 초명 양한(良漢). 시호 문헌(文獻). 1747년(영조 23) 진사를 거쳐 1752년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 ·수찬 ·교리를 지낸 뒤 1774년 등준시(登俊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77년(정조 1)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가 심해지자 경흥(慶興)부사로 나갔다가 홍국영이 실각한 뒤 한성부우윤 ·대사간을 지내고, 1782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대사헌 ·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 1794년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이조판서가 되고, 1799년 양관(兩館) 대제학을 겸임, 1801년(순조 1) 중추부판사도 겸하였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보감(國朝寶鑑)》 《갱장록(羹墻錄)》 《동문휘고(同文彙考)》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사신으로 청나라에 갔을 때 대구형(戴衢亨) ·기효람(紀曉嵐) 등 학자와 교유, 귀국 후 고증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산림녹화에 주력하였고, 1764년(영조 40)에는 일본에 가는 통신사에게 의뢰, 벚나무 묘목을 가져다가 우이동(牛耳洞)에 심었다. 글씨는 특히 진체(晉體) ·당체(唐體)에 뛰어났으며, 문집으로 《이계집(耳溪集)》이 있다.
편저에 《만물원시(萬物原始)》 《육서경위(六書經緯)》 《군서발배(群書發排)》 《격물해(格物解)》 《칠정변(七情辨)》 《목민대방(牧民大方)》 《향약절중(鄕約折中)》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 《고려대사기(高麗大事記)》 등 다수가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김윤만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태서 - 잘 읽엇습니다.감사합니다.
▣ 김항용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대동기문에 해동명장전 海東名將傳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삼국시대부터 인조 때까지의 명장 46명의 전기(傳記)를 엮은 책---에서 인용한 김응하 장군 관련 글이 실려 있습니다.
■新完譯 大東奇聞 上,中,下 (2000, 이민주 역, 명문당)
中 p241 金應河가 나무에 의지해 죽다.
김응하는 철원사람이니 자는 景義이다. 신장이 8척이 넘고 風儀가 俊偉하고 기개가 軒昻(헌앙)하며 술을 두어 말 마셔도 어지럽지 않았다.
나이 25세에 무과에 급제했는데 백사 이항복이 한번 보고 기이하게 여겨 선천군수로 옮겼더니 부임하자 인재를 모으는 것으로 急務를 삼으니 士庶들이 그 의리에 감동하지 않은 자가 없어서 모두 응하를 위하여 한번 죽고자 했다.
己未 深河(심하)싸움에 좌영장으로 강홍립의 節制를 받게 되었는데, 떠나기에 임하여 그 아우 응해가 따라가려 하자 응하는 말하기를
"형제가 모두 죽는 것이 유익할 것이 없다."
하여 힘써 말리고 집사람과 결별하고서 강을 건너 심하에 이르러 청나라 사람과 만나 힘써 싸우다가 기운이 다하여 나무에 의지하여 죽으니 명나라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요동백을 증직하였다. 우리 조정에서는 영상을 증직하고 시호는 충무이다. <명장전>
●해동명장전 海東名將傳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삼국시대부터 인조 때까지의 명장 46명의 전기(傳記)를 엮은 책.
구분 : 목활자본
저자 : 홍양호
시대 : 조선 후기(1816)
소장 : 규장각도서·장서각도서·국립중앙도서관
목활자본. 6권 3책. 1816년(순조 16) 인간(印刊). 규장각도서·장서각도서·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책머리에 1794년(정조 18)에 저자가 쓴 자서(自序)가 있다.
내용은 권1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장보고(張保皐)·심나(沈那), 고구려의 부분노(扶芬奴)·을지문덕(乙支文德)·안시성주(安市城主), 백제의 흑치상지(黑齒常之), 고려의 유금필(庾刃弼)·강감찬(姜邯贊)·양규(楊規)·윤관(尹瓘)을, 권2에 오연총(吳延寵)·김부식(金富軾)·조충(趙沖)·김취려(金就礪)·박서(朴犀)·김경손(金慶孫) ·이자성(李子晟)을, 권3에 김방경(金方慶)·한희유(韓希愈)·원충갑(元沖甲)·안우(安祐)·정세운(鄭世雲)·안우경(安遇慶)·정지(鄭地)를, 권4에 고려의 최영(崔瑩)을 비롯하여 이지란(李之蘭)·최윤덕(崔潤德)·이종생(李從生)·어유소(魚有沼)·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을, 권5에 곽재우(郭再祐)·정문부(鄭文孚)·황진(黃進)·휴정(休靜:西山大師)·정기룡(鄭起龍)·김시민(金時敏)을, 권6에 이정암(李廷鐫)·임중량(林仲樑)·김덕령(金德齡)·정충신(鄭忠信)·김응하(金應河)·임경업(林慶業)·정봉수(鄭鳳壽)·유림(柳琳) 등을 수록하였다. 기술(記述) 방법은 정사(正史)의 열전형식을 본떴다. 자서(自序)가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홍양호 洪良浩 [1724~1802]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본관 : 풍산(豊山)
호 : 이계(耳谿)
별칭 : 자 한사(漢師), 초명 양한(良漢), 시호 문헌(文獻)
활동분야 : 정치, 문학
주요저서 :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고려대사기(高麗大事記)》
본관 풍산(豊山). 자 한사(漢師). 호 이계(耳谿). 초명 양한(良漢). 시호 문헌(文獻). 1747년(영조 23) 진사를 거쳐 1752년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 ·수찬 ·교리를 지낸 뒤 1774년 등준시(登俊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77년(정조 1)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가 심해지자 경흥(慶興)부사로 나갔다가 홍국영이 실각한 뒤 한성부우윤 ·대사간을 지내고, 1782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대사헌 ·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 1794년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이조판서가 되고, 1799년 양관(兩館) 대제학을 겸임, 1801년(순조 1) 중추부판사도 겸하였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보감(國朝寶鑑)》 《갱장록(羹墻錄)》 《동문휘고(同文彙考)》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사신으로 청나라에 갔을 때 대구형(戴衢亨) ·기효람(紀曉嵐) 등 학자와 교유, 귀국 후 고증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산림녹화에 주력하였고, 1764년(영조 40)에는 일본에 가는 통신사에게 의뢰, 벚나무 묘목을 가져다가 우이동(牛耳洞)에 심었다. 글씨는 특히 진체(晉體) ·당체(唐體)에 뛰어났으며, 문집으로 《이계집(耳溪集)》이 있다.
편저에 《만물원시(萬物原始)》 《육서경위(六書經緯)》 《군서발배(群書發排)》 《격물해(格物解)》 《칠정변(七情辨)》 《목민대방(牧民大方)》 《향약절중(鄕約折中)》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 《고려대사기(高麗大事記)》 등 다수가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김윤만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태서 - 잘 읽엇습니다.감사합니다.
▣ 김항용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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