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87) 미.소 공동위윈회의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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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1-28 19:59 조회1,559회 댓글0건본문
1946년 3월에는 드디어 신탁통치의 절차를 의논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은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 공동위원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선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미소 공동 위원회 구성하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의 합의에 의하여 설치된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미.소 양국 대표자 회의.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 독립정부의 수립과정으로서 임시민주주의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하여 설립된 공동위원회는 46년 1월 16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제반문제 해결을 위한 예비회담을 가진 후 46년 3월 20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제3조
2항과 3항의 조항에 따라 제1차 회의를 가졌다.
미국측 대표로는 소장 A.V.아놀드, 소련측 대표로는 중장 T.E.스티코프이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는 벽두부터 난관에 부닥뜨리게 되었는데 가장 큰 논란은 민주주의라는
용어와 민주주의 제정당(諸政黨)에 관한 해석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이때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는 5년 동안의 신탁통치가 과도기 정치로서 요구되었으나 남한의
우익정당과 사회단체는 신탁통치를 반대하였다. 이에 소련측 대표는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의를
반대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는 임시정부 구성에 참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반면에 미국측
대표는 의사표시의 자유원칙에 입각하여 모스크바삼상회의 신탁통치안을 반대한다고 해서
임시정부수립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와 같은 의견대립으로 46년 5월 1일
공동성명 제7호까지 발표하였으나 아무런 결실 없이 5월 6일 휴회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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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공동위원회의 설치와 신탁통치에 대해서 미국 펜실바니아대 이정식(李庭植)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스탈린은 1945년 9월12일~10월2일 영국 런던에서 열렸던 美.英.蘇 3국 外相 회담에서 미국에
대해 일본의 분할 점령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모스크바 三相회의가 있기 훨씬 전 벌써 남북한의 再통합을 포기하고, 북한에
소련의 國益을 대변할 수 있는 정권을 수립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冷戰의 전개 과정과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 등).
이 때문에 소련은 모스크바 三相회의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를 실천하기 위한 노력들을
거부했다. 모스크바 三相회의의 결정에 따라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기로 되어 있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도 전에 「사실상의 정권」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다.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은
「북한 지역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지만,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움직인
것은 우익 민족주의자들이나 토착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라, 김일성 집단이나 소련 공산당 內에서
활동하던 韓人 2세들이었다. 북한지역內에서 신탁통치 결정에 반대하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 세력들은
숙청되었다. 이어 북조선중앙은행 창설, 보안대(인민군의 前身(전신)) 창설, 토지개혁 등 북한 정권의
경제적.군사적 토대를 구축하는 작업들이 진행되었다. 한편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소련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들(즉 우익 민족주의 세력들)은 美蘇공동위원회의 협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 모두가 신탁통치로의 정상적 이행을 방해하고 한반도 북부에
親蘇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수순이었다.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미.소 공동위원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선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미소 공동 위원회 구성하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의 합의에 의하여 설치된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미.소 양국 대표자 회의.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 독립정부의 수립과정으로서 임시민주주의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하여 설립된 공동위원회는 46년 1월 16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제반문제 해결을 위한 예비회담을 가진 후 46년 3월 20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제3조
2항과 3항의 조항에 따라 제1차 회의를 가졌다.
미국측 대표로는 소장 A.V.아놀드, 소련측 대표로는 중장 T.E.스티코프이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는 벽두부터 난관에 부닥뜨리게 되었는데 가장 큰 논란은 민주주의라는
용어와 민주주의 제정당(諸政黨)에 관한 해석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이때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는 5년 동안의 신탁통치가 과도기 정치로서 요구되었으나 남한의
우익정당과 사회단체는 신탁통치를 반대하였다. 이에 소련측 대표는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의를
반대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는 임시정부 구성에 참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반면에 미국측
대표는 의사표시의 자유원칙에 입각하여 모스크바삼상회의 신탁통치안을 반대한다고 해서
임시정부수립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와 같은 의견대립으로 46년 5월 1일
공동성명 제7호까지 발표하였으나 아무런 결실 없이 5월 6일 휴회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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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공동위원회의 설치와 신탁통치에 대해서 미국 펜실바니아대 이정식(李庭植)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스탈린은 1945년 9월12일~10월2일 영국 런던에서 열렸던 美.英.蘇 3국 外相 회담에서 미국에
대해 일본의 분할 점령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모스크바 三相회의가 있기 훨씬 전 벌써 남북한의 再통합을 포기하고, 북한에
소련의 國益을 대변할 수 있는 정권을 수립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冷戰의 전개 과정과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 등).
이 때문에 소련은 모스크바 三相회의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를 실천하기 위한 노력들을
거부했다. 모스크바 三相회의의 결정에 따라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기로 되어 있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도 전에 「사실상의 정권」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다.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은
「북한 지역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지만,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움직인
것은 우익 민족주의자들이나 토착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라, 김일성 집단이나 소련 공산당 內에서
활동하던 韓人 2세들이었다. 북한지역內에서 신탁통치 결정에 반대하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 세력들은
숙청되었다. 이어 북조선중앙은행 창설, 보안대(인민군의 前身(전신)) 창설, 토지개혁 등 북한 정권의
경제적.군사적 토대를 구축하는 작업들이 진행되었다. 한편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소련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들(즉 우익 민족주의 세력들)은 美蘇공동위원회의 협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 모두가 신탁통치로의 정상적 이행을 방해하고 한반도 북부에
親蘇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수순이었다.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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