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와 우리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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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2-08 23:03 조회1,665회 댓글0건본문
강화도와 우리가문
우리 게시판에 소개된 내용중에서 강화도와 관련된 내용을 모두 모아 보았습니다.
1. 강화도내 우리가문 집성촌
작성자 :정보미 작성일 : 2002/10/16 01:31 (from:211.55.112.91) 조회 : 117
(선)안동김씨 행정구역별 가구 및 인구수(1985년통계)
가구수(세대) / 인구수(명)
●강화군288 /1,149
작성자 :김은회 작성일 : 2003/02/08 12:42 (from:211.202.49.31) 조회 : 2
해령당(海寧堂)과 해양향(海陽鄕)의 차이점
해령당(海寧堂)
지금의 길상면 온수리 중앙부위에 해령당이라 부르는 고지명이 있다.
이곳엔 성공회 공소가 자리하고 있어 명소로 알려져 있고 성공회는 전국에서 성직자가
제일먼저 배출한 지역이다.
고려 고종때에 도원수 김방경이 살던 지역이라 한다.
이때 그곳을 원수리라 했는데 그 살던 고장을 해령당이라 부르는데 지금도 역시 고여금인가 한다.
김방경은 안동 사람으로 서북면 병마판판을 역임하고 위도에 들어가 저수지를 만들고 ●강화에서는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저수하였다가 겨울에는 음료수로 적용하였다는 설이 있다.
안동에서 장서하였는데 고려시대의 명사이니 지금에는 양도면 삼흥리에 후예가 살고 있다는 설이 있다.
<출전-강도의 민담과 전설> 강화문화원
작성자 :김윤만 작성일 : 2002/04/03 03:10 (from:61.74.254.160) 조회 : 71
시군지순례1(강화군)
강화사에 나타난 충렬공(사단법인 강화문화원, 1994)
p.368. 안동김씨.
판결사 익원공 사형의 후손 良(량)이 자점의 역모사건으로 인하여 초지로 피
해 왔었는데 불은면으로 이사하였다가, 다시 초지로 돌아와 정착한 뒤 10여대
를 살고 있다.
상신상락 부원군 (질)의 후손 正台(정태)가 오상리로 와 사는 지가 10여대
에 이르고 있다.
고려조 충렬공 방경의 원손 應浩(응호)가 망월리에 왔다가 삼홍리(옛 홍천)로
이사하여 10여대를 살고 있다.
선행리에 살다가 월곶으로 이사한 일파는 김만숙의 후손이며 도장리에 사는
일파는 통정 金 (김영)의 후손인데 그 자손이 10여대에 이르고 있다.
작성자 :김태서 작성일 : 2002/03/10 01:23 (from:61.98.0.13) 조회 : 118
우리가문 집성촌
경기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경기 ●강화군 하점면 망월리
작성자 :정보미 작성일 : 2002/12/10 00:51 (from:211.55.117.180) 조회 : 138
1930년대의 안동김씨 집성촌 및 세대수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하점면 망월리 40
2, 강화도 효자 김창구
작성자 :김은회() 작성일 : 2001/04/21 13:14 (from:) 조회 : 76
●강화도 효자(孝子) 김창구(金昌九)
조선조 영조(英祖)때의 효자. 본관은 구안동 김씨.낙포(洛圃) 익원공 (翼元公)김사형(金士衡)의 후손 첨지 호빈(好彬)의 아들. 그의 선조들은 서울에서 살다가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고조가 비로서 ●강화(江華)에 들어옴으로서 이곳에 정착 하게 되었다. 그는 효행으로써 부친이 첨지중추부사에 오를 수 있도록 지극한 효행을 하였다.
그의 부친이 38세에 중병으로 기절하였다가 겨우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았는데 그의꿈에 저승에가니 마침 같은 나이가된 아전 한사람의 구원을 얻어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58세 까지는 살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때 8살박이 창구(昌九)는 이 말을 듣고 몹씨 비통히 여겨 아버지의 장수(長壽)를 빌기 시작하여 조용하고 청결한 곳에 독(항아리)에다 성미를 저장하였다가 천지신명(天地神明)께 기도 할 때마다 쓰기로 하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니 아버지의 연세가 58세가 되자 이해 정월22일 그동안 모아 두었던 쌀을 메고 지고 향촉을 갖추어 먼저 마리산(摩利山)에 올라 3일간을 기도하고 다음에는 고려산 정상에 올라 또 3일간을 기도하였는데 이때 눈보라가 심하였는데도 촛불이 꺼지지 않고 밝은 촛불빛이 그대로 밝혀지고 있엇다. 마지막 기도하던 그 날 어머니 선씨(宣氏)의 꿈에 큰 무지개가 기도처인 고려산(高麗山)에서 향교(鄕校)앞 우물에 꽂히였다. 이꿈을 해몽하는 이에게 가서 물어보니 꿈 풀이는 다음과같다.
우물정(井)자에는 여덟개의 뿔이 있으니 8이요 +자로 둘려잇으니 80세는 무난히 살 수있을 것이요. 3일간 기도하고 제사드렸으니 3세를 더하여 공의 수는 83를 살것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꿈 해몽과 같이 살았다고 하니 신기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후 14년 1691년 이었는데 그때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여 백약이 무효라 공은 얼음같이 찬 샘물에 목욕재개하고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하늘에 빌었더니 다음날 아침에 보니 얼음이 긴 손가락 모양으로 솟아있었다. 그 생김새가 마치 어린애와 비슷하였다고 전한다. 또 어머니가 물고기가 잡수시고 싶다고 하시기에 공은 얼음을 깨고 고기를 나꾸어 드렸더니 차츰 병환이 낫기 시작하여 3년 간을 더 사시다가 돌아 가시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시자 여막을 짓고 시묘(侍墓)하다가 아버지의 엄명이 있어 중지하고 철저히 예절을 갖추어 조석으로 곡.상식을 봉행하였다.(1744)
그 후 ●강화유수(江華留守) 이병상(李秉常)과 김광세(金光世)(1769) 때에는 부역을 면제하는 특혜를 내렸으며 조정에 품의하여 영조(英祖)48년 (1772)에는 특명으로 그 집을 해동검루(海東黔婁) 김창구지문(金昌九之門)이라는 정문을 내리고 그 아버지는 중추원 (中樞院)직책에 특명하여 효행을 기리었다.
그 후 얼마 아니되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니 장례를 극진히 치르고 묘소앞에 여막을 짓고 3년간을 지냈는데 그는 여막에서 살면서 사당집을 세우고 비석을 세워 조상의 높은 덕을 기렸다. 그는 아버지께서 생전에 금강산(金剛山)을 구경했으면 하고 항상 말씀이 있었으나 미처 이루지 못했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엔 더욱 한이되어 이를 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반듯이 원을 풀어 드리고자 아버지 사당에 말씀드리고 어버이가 생전에 입던 의복을 개나리 봇짐하고 도보로 금강산으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 때의 나이가 64세 였는데 험란한 길로 금강산에 올라 손에 옷을 받쳐 들고 슬피 통곡하면서 "아버지께서 구경하시고 싶어하신 곳이 이 산이외다" 하면서 봉우리 마다 돌아보고 같은 말씀을 드리니 보는 사람마다 감격하여 눈시울을 적시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여막에서 시묘살이 할때에는 항상 범 한마리가 함께 지키고 있었는데 새벽이면 어디론가 사라지곤 하였으며 여막에 오를때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함께 안내하는 신화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범이 나타나지 않는지라 이상히 생각하였는데 그날 밤에 현몽하기를 범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가 어느 사냥꾼에게 피살되어 내일이면 내 가죽을 벗기게 되리라" 한다. 이에 그는 범을 잡아다 놓은 집을 찿아 헤메다가 한 마을에서 범의 가죽을 벗기고 있는지라 자세히 보니 과연 그것이 시묘를 같이 하던 호랑이였다. 이에 그는 사냥꾼에게 전후 사정을 일일히 말하고 그 가죽이나마 돌려줄 수 없는가를 애원하였더니 전후 사정에 감동되어 범의 가죽을 돌려 받아 그 집안의 가보로 간직 하였으나 1924년과 1925년 때 대홍수로 말미아마 분실되었다고 한다. 또 여막에서 시묘살이 할때 묘소옆에서 샘물이나와 애용하였는데그 우물을 속칭 효자정(孝子井)이라하여 지금도 그 터가 남겨져있고 매일 묘소에 오르내릴때 돌 하나씩을 들어다 모아 쌓았는데 하나의 단소가 되어 그대로 존재하고있다.
1766년 ●강화유수 이은(李殷)이 선두포 별장으로 특임하여 공의 효행을 우대 하였고 두 손자욱이 남아있는 묘소는 지금 선원면 선행리로 노적봉 밑에 있으며 ●강화(江華)의 효행 가운데서도 가장 기이한 사건으로 전해저 내려오고 있다.
윤리관이 타락된 이 시점에 새롭게 음미하며 효행이 진작되어 미덕을 가꾸어 예의의 나라로 면모를 되살리고 싶을 뿐이다. " 내용이 너무 길어 죄송합니다 "
참고문헌 : 강도지(江都誌) ●강화사(江華史)
강도인물고(江都人物考) 경기인물지(京畿人物誌)
작성자 :김윤만 작성일 : 2002/08/12 00:59 (from:211.219.142.146) 조회 : 48
효자 칭송 漢詩(한시).
효자 金昌九(김창구) 관련 漢詩(한시)
☞ 洛圃(낙포) 士衡(사형)의 후손. 첨지 好彬(호빈)의 子(자)인 ●강화도 효자 김창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본 홈페이지 “92. ●강화도 효자 김창구(김은회) 2001. 4.21.을 참
고하시기 바라며, 저는 이러한 효행에 대해서 華南(화남) 高在亨(고재형)이 칭송하여
지은 한시 한편을 확인하여 소개합니다.
金孝子居此府城 (김효자거차부성)
海東黔婁之紅旌 (해동검루지홍정)
氷漁山虎從何出 (빙어산호종하출)
知有天翕著此誠 (지유천흡저차성)
●강화성에 살고 있는 김효자는
해동검루의 홍정을 받았다네.
얼음속에서 잡은 물고기며 산에서의 호랑이는
정성에 대한 하늘의 포상이었다네.
<출전 : 경기인물지(상)/경기도/1991년>
3. 강화도에서 관직생활을 하신 선조님
경진보 (선조13, 1580)
1. 경진보 서
만력8년 맹하---예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수찬관 지제고 億齡 謹序
-----이제 ●강화부사 김공 ★ (오)가 충청도 절도사가 된 뒤로부터 이를 다시 교정하여 비용을 들여 출간함에 있어-----
2. 경진보 발
예손 조봉대부 행호조좌랑 齊賢 跋
-----●강화령공(= ? )이 천안으로부터 이 사업을 인수하여 공사를 마쳐서 누대 성취하지 못하였던 일이 마침내 그 손에서 완성하였으니 어찌 우리 전 종친들의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기미보 (영조15, 1739)
3. 기미보 서
상지15년 1739 기미 추 ---충렬공 13세손 자현대부 지중추부사 90세 ★ (환) 근서
-----충렬공 10세손인 정언공 ★ (익)이 세보를 편찬하여 宗系를 밝혔고 (환)의 曾祖부 증 議政공의 從弟 감사공 ★億齡과 (환)의 從祖부 참찬공 ★瓚(찬)이 여러 상하 종인들과 논의한 끝에 병사공 ★ (오)가 당시 ●강화부사로 있을 때에 그가 족보를 板刻(=인쇄)에 부쳤으니 이 해가 만력8년 庚辰이다.-----
4. 기미보 서
숭정 기원후 102년 기미 추
상락공 15대손 가선대부 행사간원 대사간 ★유 근서
-----지금까지 전해오는 세보는 오직 만력 경진(1580)에 휘★ (오)가 ●강화부사로 있을 때에 발간한 한책 뿐이다.-----
★제학) 김시양(金時讓)
1581(선조 14)∼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仲), 호는 하담(荷潭). 아버지는 비안현감 인갑(仁甲)이다.
-----
이듬해에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고, 1636년 청백리에 뽑혀 숭록계(崇祿階)에 올랐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눈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충주로 내려갔다.
★제학) 김휘(金徽)
1607(선조 40)∼1677(숙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돈미(敦美), 호는 사휴정(四休亭)·만은(晩隱). 아버지는 시양(時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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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부수찬에 기용되었고, 그뒤 이조좌랑·이조정랑·교리·응교·헌납·사간·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연간에는 충청도관찰사·도승지·함경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강화유수·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작성자 :김은회() 작성일 : 2001/04/17 15:05 (from:) 조회 : 178
김휘(金徽) 선조님
김휘(金徽) 선조님의 누락된 관직을 첨부합니다.
홍문록 . 이조좌랑 . 교리 . 응교 . 헌납 . 집의 . 충청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 1668(현종9)년 6월 ●강화부유수 . 1670년5월 황해도 관찰사 .
개성유수.
참고문헌 :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金龍德)
강도지(江都誌)
●강화유수선생안(江華留守先生案) 은회
★익원) 김자점(金自點)
-----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하였고, 순검사(巡檢事)·임진수어사(臨津守禦使)에 임명되었다.
1630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1633년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그 이후 공신세력의 권력추구와 패전에 대하여 극심한 공격을 가하는 일반사류들에 의하여 계속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그들 반청론자(反淸論者)들에게 염증을 느낀 인조의 후원으로 1639년에 고향으로 풀려나고, 이듬해에는 ●강화부윤·호위대장에 임명되었다.
작성자 :김태서 작성일 : 2002/04/03 20:28 (from:211.114.248.253) 조회 : 54
순절록(조선시대)
殉 節 錄 (순절록) : 조선시대
관직 또는 시호 휘(諱) 순절년월일 변란(變亂) 순절장소 선 계
判官(판관) 維(유) 인조14(1636)년 병자호란 江華(●강화) 제학공(益達익달) 9대손
★부사) 김선필(金善弼)
1807(순조 7)∼1883(고종 20).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자는 중필(仲弼).
아버지는 학기(學基)이다. 아버지가 군수를 지낸 정기(鼎基)라고 기록된 자료도 있다. 이는 생부에게서 양부 앞으로 입양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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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중군(京畿中軍)을 거쳐,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수로(江華水路)의 중요한 근거지인 광성진(廣城津)을 방어하다 미국군의 공격을 받아 장렬하게 전사한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의 후임으로 진무사(鎭撫使)가 되어 중군(中軍)을 지휘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복설(復設)된 삼군부(三軍府)의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를 거쳐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다.
1882년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를 역임하기도 했다.
4. 경기도안김사자료집 (강화 관련 발췌)
작성자 :郡/★김태영 작성일 : 2002/11/18 22:33 (from:211.239.251.62) 조회 : 90
京畿道安金史資料集
[선조실록 권68, 선조28년 10월 13일(임자)]
o 대사헌(大司憲) ★김찬(金瓚)이, 임진년(壬辰年:1592년, 선조25년)에 어머니를 만나러 고양(高陽)에 갔다가 영평(永平)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것과 ●강화(江華)에 도달하여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鄭澈)이 부사(府使)로 삼는다고 하여 제때에 환조(還朝)하지 못한 죄등을 들어 파직을 청하였으나 사퇴하지 말라고 답함.
[선조실록 권89, 선조30년 6월 22일(신사)]
o 헌납(獻納) ★김대래(金大來)가 옹주(翁主)등을 우선 ●강화(江華)로 피난시키라는 전교 때문에 백성들이 흩어지니 경솔히 동요하여 미치지 못할 후회를 끼쳐서는 안되므로 속히 제궁(諸宮)을 이피시키는 명을 거두도록 할 것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음.
[선조실록 권180, 선조37년 10월 12일(무오)]
o 경기감사 ★김수(金 目卒)가, 수원(水原), 죽산(竹山), 파주(坡州), ●강화(江華)등에 산성을 수축하여 숙위군(宿衛軍)의 부족 문제를 해결 하자고 아룀.
[인조실록 권15, 인조5년 1월 18일(을유)]
o ★김자점(金自點)에게 순검사(巡檢使)의 직을 주어 ●강화(江華)를 주관하게 함.
[인조실록 권25, 인조9년 7월 4일(병자)]
o <●강화> ●강도(江都)를 보장(保障)으로 적의 침입을 대비 하자는 이원익(李元翼)의 차자(箚子)로 인해 비국(備局)에서 ★김자점(金自點)을 ●강도구관당상(江都句管堂上)으로 추천하니, 그대로 따름.
[인조실록 권25, 인조9년 8월 23일(갑자)]
o 이수일(李守一), 이서(李曙), ★김자점(金自點), ★김시양(金時讓)등이 <●강화> ●강도(江都)에서 돌아와 방어책에 대해 아룀.
[인조실록 권25, 인조9년 8월 26일(정묘)]
o 우의정(右議政) 이정구(李廷龜)가 도성(都城)의 방어와 <●강화> ●강도(江都)의 보장(保障)에 관해 차자(箚子)를 올리면서 ★김시양(金時讓)과의 의견 차이를 이유로 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음.
[인조실록 권25, 인조9년 9월 16일(정해)]
o ●강도구관당상(江都句管堂上) ★김자점(金自點)이 나주(羅州) 등지를 <●강화> ●강도(江都)에 소속시켜 중국과 통상케 하는 등의 경비조달 대책을 아룀.
[인조실록 권28, 인조11년 2월 12일(갑술)]
o ★김자점(金自點)을 대신하여 호조판서(戶曹判書) ★김신국(金藎國)으로 하여금 <●강화> ●강도(江都)의 관리 책임을 겸임하도록 함.
[인조실록 권40, 인조18년 1월 27일(기묘)]
o 비국(備局)의 요청으로 ★김자점(金自點)을 ●강화유수(江華留守)로 삼음.
[인조실록 권40, 인조18년 윤1월 13일(을미)]
o 비국(備局)에서 ●강화유수(江華留守)의 임명에 대해 논란이 많은 ★김자점(金自點)대신 다른 사람을 선임 하자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음.
[현종실록 권19, 현종9년 6월 6일(계유)]
o ★김휘(金徽)를 ●강화유수(江華留守)로 삼음.
[현종실록 권16, 현종10년 4월 23일(을유)]
o ●강화유수(江華留守) ★김휘(金徽)가 <●강화> 철곳, 덕포(德浦), 정포(井浦)의 세진을 도로 옮기는 일에 대하여 아뢰고, 허적(許積)이 덕포는 우선 그대로 두고 철곳과 정포는 매우 중요한 곳이니 농한기에 먼저 옮기는 것이 마땅 하겠다고 아뢰자 그대로 따름.
[현종실록 권17, 현종10년 7월 13일(갑진)]
o ●강화유수(江華留守) ★김휘(金徽)가 <●강화> 철곳첨사(僉使)와 <●강화> 정포(井浦)만호(萬戶)를 농사일이 끝난뒤에 본진에 도로 이속 시켜야 하는데 곤란한점이 많다고 아뢰고, 홍중보(洪重普)는 철곳으로 진을 옮긴뒤에 별도로 별장(別將)을 두었는데 승천부(昇天府)로 옮기면 그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별장을 그대로 둘 필요가 없을 것 이라고 아뢰어 임금이 별장을 줄이도록 하라고 명함.
[현종개수실록 권21, 현종10년 10월 3일(계해)]
o ●강화유수(江華留守) ★김휘(金徽)가 나아가 아뢰기를, 별장(別將)을 이미 혁파했으니 이전처럼 파총(把摠)을 차출하여 군사를 관장케 하자는 것과 본부의 나룻배가 세월이 오래되어 썩어서 쓸수가 없어 바꾸었으면 하는데 물력이 부족하므로 약간의 곡식을 떼어주기를 원하니, 임금이 본부의 모미(耗米)4백섬을 내주라고 명함.
[현종실록 권18, 현종11년 2월 3일(신유)]
o ●강화유수(江華留守) ★김휘(金徽)가 ●강화도사(江華都事)를 혁파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대신들에게 물어본 뒤에 그대로 두되 군무만 관장하게 하고 민간의 일에는 간여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함.
[현종실록 권18, 현종11년 3월 20일(정축)]
o ●강화유수(江華留守) ★김휘(金徽)를 인견 하였는데 ★김휘(金徽)가 갑진년(甲辰年):1664년 현종5년) 이전의 환곡을 탕감해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각 창고의 환곡에 대하여 각 연도에 받아들이지 못한 수량을 상세히 계문(啓聞)하라고 명함.
[현종개수실록 권22, 현종11년 3월 20일(정축)]
o ●강화유수(江華留守) ★김휘(金徽)도 입대하여, 갑진년(甲辰年):1664년 현종5년)이전의 조곡으로서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탕감 시키기를 청하였으나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이 군향(軍餉)이라는 이유로 어렵게 여기니 각년의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나열해 기록해서 다시 품계하여 처리 하라고 명함.
* 京畿道史 資料集에서 우리 先祖님의 資料를 발취하여 보았습니다. 안사연 회워님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올려 드립니다.
▣ 김윤만 - 수고하셨습니다. 정리해서 살펴보니 더욱 좋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 김영윤 -
▣ 김정중 -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니 쏙 눈에 들어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게시판에 소개된 내용중에서 강화도와 관련된 내용을 모두 모아 보았습니다.
1. 강화도내 우리가문 집성촌
작성자 :정보미 작성일 : 2002/10/16 01:31 (from:211.55.112.91) 조회 : 117
(선)안동김씨 행정구역별 가구 및 인구수(1985년통계)
가구수(세대) / 인구수(명)
●강화군288 /1,149
작성자 :김은회 작성일 : 2003/02/08 12:42 (from:211.202.49.31) 조회 : 2
해령당(海寧堂)과 해양향(海陽鄕)의 차이점
해령당(海寧堂)
지금의 길상면 온수리 중앙부위에 해령당이라 부르는 고지명이 있다.
이곳엔 성공회 공소가 자리하고 있어 명소로 알려져 있고 성공회는 전국에서 성직자가
제일먼저 배출한 지역이다.
고려 고종때에 도원수 김방경이 살던 지역이라 한다.
이때 그곳을 원수리라 했는데 그 살던 고장을 해령당이라 부르는데 지금도 역시 고여금인가 한다.
김방경은 안동 사람으로 서북면 병마판판을 역임하고 위도에 들어가 저수지를 만들고 ●강화에서는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저수하였다가 겨울에는 음료수로 적용하였다는 설이 있다.
안동에서 장서하였는데 고려시대의 명사이니 지금에는 양도면 삼흥리에 후예가 살고 있다는 설이 있다.
<출전-강도의 민담과 전설> 강화문화원
작성자 :김윤만 작성일 : 2002/04/03 03:10 (from:61.74.254.160) 조회 : 71
시군지순례1(강화군)
강화사에 나타난 충렬공(사단법인 강화문화원, 1994)
p.368. 안동김씨.
판결사 익원공 사형의 후손 良(량)이 자점의 역모사건으로 인하여 초지로 피
해 왔었는데 불은면으로 이사하였다가, 다시 초지로 돌아와 정착한 뒤 10여대
를 살고 있다.
상신상락 부원군 (질)의 후손 正台(정태)가 오상리로 와 사는 지가 10여대
에 이르고 있다.
고려조 충렬공 방경의 원손 應浩(응호)가 망월리에 왔다가 삼홍리(옛 홍천)로
이사하여 10여대를 살고 있다.
선행리에 살다가 월곶으로 이사한 일파는 김만숙의 후손이며 도장리에 사는
일파는 통정 金 (김영)의 후손인데 그 자손이 10여대에 이르고 있다.
작성자 :김태서 작성일 : 2002/03/10 01:23 (from:61.98.0.13) 조회 : 118
우리가문 집성촌
경기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경기 ●강화군 하점면 망월리
작성자 :정보미 작성일 : 2002/12/10 00:51 (from:211.55.117.180) 조회 : 138
1930년대의 안동김씨 집성촌 및 세대수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하점면 망월리 40
2, 강화도 효자 김창구
작성자 :김은회() 작성일 : 2001/04/21 13:14 (from:) 조회 : 76
●강화도 효자(孝子) 김창구(金昌九)
조선조 영조(英祖)때의 효자. 본관은 구안동 김씨.낙포(洛圃) 익원공 (翼元公)김사형(金士衡)의 후손 첨지 호빈(好彬)의 아들. 그의 선조들은 서울에서 살다가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고조가 비로서 ●강화(江華)에 들어옴으로서 이곳에 정착 하게 되었다. 그는 효행으로써 부친이 첨지중추부사에 오를 수 있도록 지극한 효행을 하였다.
그의 부친이 38세에 중병으로 기절하였다가 겨우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았는데 그의꿈에 저승에가니 마침 같은 나이가된 아전 한사람의 구원을 얻어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58세 까지는 살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때 8살박이 창구(昌九)는 이 말을 듣고 몹씨 비통히 여겨 아버지의 장수(長壽)를 빌기 시작하여 조용하고 청결한 곳에 독(항아리)에다 성미를 저장하였다가 천지신명(天地神明)께 기도 할 때마다 쓰기로 하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니 아버지의 연세가 58세가 되자 이해 정월22일 그동안 모아 두었던 쌀을 메고 지고 향촉을 갖추어 먼저 마리산(摩利山)에 올라 3일간을 기도하고 다음에는 고려산 정상에 올라 또 3일간을 기도하였는데 이때 눈보라가 심하였는데도 촛불이 꺼지지 않고 밝은 촛불빛이 그대로 밝혀지고 있엇다. 마지막 기도하던 그 날 어머니 선씨(宣氏)의 꿈에 큰 무지개가 기도처인 고려산(高麗山)에서 향교(鄕校)앞 우물에 꽂히였다. 이꿈을 해몽하는 이에게 가서 물어보니 꿈 풀이는 다음과같다.
우물정(井)자에는 여덟개의 뿔이 있으니 8이요 +자로 둘려잇으니 80세는 무난히 살 수있을 것이요. 3일간 기도하고 제사드렸으니 3세를 더하여 공의 수는 83를 살것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꿈 해몽과 같이 살았다고 하니 신기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후 14년 1691년 이었는데 그때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여 백약이 무효라 공은 얼음같이 찬 샘물에 목욕재개하고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하늘에 빌었더니 다음날 아침에 보니 얼음이 긴 손가락 모양으로 솟아있었다. 그 생김새가 마치 어린애와 비슷하였다고 전한다. 또 어머니가 물고기가 잡수시고 싶다고 하시기에 공은 얼음을 깨고 고기를 나꾸어 드렸더니 차츰 병환이 낫기 시작하여 3년 간을 더 사시다가 돌아 가시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시자 여막을 짓고 시묘(侍墓)하다가 아버지의 엄명이 있어 중지하고 철저히 예절을 갖추어 조석으로 곡.상식을 봉행하였다.(1744)
그 후 ●강화유수(江華留守) 이병상(李秉常)과 김광세(金光世)(1769) 때에는 부역을 면제하는 특혜를 내렸으며 조정에 품의하여 영조(英祖)48년 (1772)에는 특명으로 그 집을 해동검루(海東黔婁) 김창구지문(金昌九之門)이라는 정문을 내리고 그 아버지는 중추원 (中樞院)직책에 특명하여 효행을 기리었다.
그 후 얼마 아니되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니 장례를 극진히 치르고 묘소앞에 여막을 짓고 3년간을 지냈는데 그는 여막에서 살면서 사당집을 세우고 비석을 세워 조상의 높은 덕을 기렸다. 그는 아버지께서 생전에 금강산(金剛山)을 구경했으면 하고 항상 말씀이 있었으나 미처 이루지 못했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엔 더욱 한이되어 이를 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반듯이 원을 풀어 드리고자 아버지 사당에 말씀드리고 어버이가 생전에 입던 의복을 개나리 봇짐하고 도보로 금강산으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 때의 나이가 64세 였는데 험란한 길로 금강산에 올라 손에 옷을 받쳐 들고 슬피 통곡하면서 "아버지께서 구경하시고 싶어하신 곳이 이 산이외다" 하면서 봉우리 마다 돌아보고 같은 말씀을 드리니 보는 사람마다 감격하여 눈시울을 적시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여막에서 시묘살이 할때에는 항상 범 한마리가 함께 지키고 있었는데 새벽이면 어디론가 사라지곤 하였으며 여막에 오를때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함께 안내하는 신화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범이 나타나지 않는지라 이상히 생각하였는데 그날 밤에 현몽하기를 범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가 어느 사냥꾼에게 피살되어 내일이면 내 가죽을 벗기게 되리라" 한다. 이에 그는 범을 잡아다 놓은 집을 찿아 헤메다가 한 마을에서 범의 가죽을 벗기고 있는지라 자세히 보니 과연 그것이 시묘를 같이 하던 호랑이였다. 이에 그는 사냥꾼에게 전후 사정을 일일히 말하고 그 가죽이나마 돌려줄 수 없는가를 애원하였더니 전후 사정에 감동되어 범의 가죽을 돌려 받아 그 집안의 가보로 간직 하였으나 1924년과 1925년 때 대홍수로 말미아마 분실되었다고 한다. 또 여막에서 시묘살이 할때 묘소옆에서 샘물이나와 애용하였는데그 우물을 속칭 효자정(孝子井)이라하여 지금도 그 터가 남겨져있고 매일 묘소에 오르내릴때 돌 하나씩을 들어다 모아 쌓았는데 하나의 단소가 되어 그대로 존재하고있다.
1766년 ●강화유수 이은(李殷)이 선두포 별장으로 특임하여 공의 효행을 우대 하였고 두 손자욱이 남아있는 묘소는 지금 선원면 선행리로 노적봉 밑에 있으며 ●강화(江華)의 효행 가운데서도 가장 기이한 사건으로 전해저 내려오고 있다.
윤리관이 타락된 이 시점에 새롭게 음미하며 효행이 진작되어 미덕을 가꾸어 예의의 나라로 면모를 되살리고 싶을 뿐이다. " 내용이 너무 길어 죄송합니다 "
참고문헌 : 강도지(江都誌) ●강화사(江華史)
강도인물고(江都人物考) 경기인물지(京畿人物誌)
작성자 :김윤만 작성일 : 2002/08/12 00:59 (from:211.219.142.146) 조회 : 48
효자 칭송 漢詩(한시).
효자 金昌九(김창구) 관련 漢詩(한시)
☞ 洛圃(낙포) 士衡(사형)의 후손. 첨지 好彬(호빈)의 子(자)인 ●강화도 효자 김창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본 홈페이지 “92. ●강화도 효자 김창구(김은회) 2001. 4.21.을 참
고하시기 바라며, 저는 이러한 효행에 대해서 華南(화남) 高在亨(고재형)이 칭송하여
지은 한시 한편을 확인하여 소개합니다.
金孝子居此府城 (김효자거차부성)
海東黔婁之紅旌 (해동검루지홍정)
氷漁山虎從何出 (빙어산호종하출)
知有天翕著此誠 (지유천흡저차성)
●강화성에 살고 있는 김효자는
해동검루의 홍정을 받았다네.
얼음속에서 잡은 물고기며 산에서의 호랑이는
정성에 대한 하늘의 포상이었다네.
<출전 : 경기인물지(상)/경기도/1991년>
3. 강화도에서 관직생활을 하신 선조님
경진보 (선조13, 1580)
1. 경진보 서
만력8년 맹하---예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수찬관 지제고 億齡 謹序
-----이제 ●강화부사 김공 ★ (오)가 충청도 절도사가 된 뒤로부터 이를 다시 교정하여 비용을 들여 출간함에 있어-----
2. 경진보 발
예손 조봉대부 행호조좌랑 齊賢 跋
-----●강화령공(= ? )이 천안으로부터 이 사업을 인수하여 공사를 마쳐서 누대 성취하지 못하였던 일이 마침내 그 손에서 완성하였으니 어찌 우리 전 종친들의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기미보 (영조15, 1739)
3. 기미보 서
상지15년 1739 기미 추 ---충렬공 13세손 자현대부 지중추부사 90세 ★ (환) 근서
-----충렬공 10세손인 정언공 ★ (익)이 세보를 편찬하여 宗系를 밝혔고 (환)의 曾祖부 증 議政공의 從弟 감사공 ★億齡과 (환)의 從祖부 참찬공 ★瓚(찬)이 여러 상하 종인들과 논의한 끝에 병사공 ★ (오)가 당시 ●강화부사로 있을 때에 그가 족보를 板刻(=인쇄)에 부쳤으니 이 해가 만력8년 庚辰이다.-----
4. 기미보 서
숭정 기원후 102년 기미 추
상락공 15대손 가선대부 행사간원 대사간 ★유 근서
-----지금까지 전해오는 세보는 오직 만력 경진(1580)에 휘★ (오)가 ●강화부사로 있을 때에 발간한 한책 뿐이다.-----
★제학) 김시양(金時讓)
1581(선조 14)∼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仲), 호는 하담(荷潭). 아버지는 비안현감 인갑(仁甲)이다.
-----
이듬해에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고, 1636년 청백리에 뽑혀 숭록계(崇祿階)에 올랐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눈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충주로 내려갔다.
★제학) 김휘(金徽)
1607(선조 40)∼1677(숙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돈미(敦美), 호는 사휴정(四休亭)·만은(晩隱). 아버지는 시양(時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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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부수찬에 기용되었고, 그뒤 이조좌랑·이조정랑·교리·응교·헌납·사간·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연간에는 충청도관찰사·도승지·함경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강화유수·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작성자 :김은회() 작성일 : 2001/04/17 15:05 (from:) 조회 : 178
김휘(金徽) 선조님
김휘(金徽) 선조님의 누락된 관직을 첨부합니다.
홍문록 . 이조좌랑 . 교리 . 응교 . 헌납 . 집의 . 충청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 1668(현종9)년 6월 ●강화부유수 . 1670년5월 황해도 관찰사 .
개성유수.
참고문헌 :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金龍德)
강도지(江都誌)
●강화유수선생안(江華留守先生案) 은회
★익원) 김자점(金自點)
-----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하였고, 순검사(巡檢事)·임진수어사(臨津守禦使)에 임명되었다.
1630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1633년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그 이후 공신세력의 권력추구와 패전에 대하여 극심한 공격을 가하는 일반사류들에 의하여 계속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그들 반청론자(反淸論者)들에게 염증을 느낀 인조의 후원으로 1639년에 고향으로 풀려나고, 이듬해에는 ●강화부윤·호위대장에 임명되었다.
작성자 :김태서 작성일 : 2002/04/03 20:28 (from:211.114.248.253) 조회 : 54
순절록(조선시대)
殉 節 錄 (순절록) : 조선시대
관직 또는 시호 휘(諱) 순절년월일 변란(變亂) 순절장소 선 계
判官(판관) 維(유) 인조14(1636)년 병자호란 江華(●강화) 제학공(益達익달) 9대손
★부사) 김선필(金善弼)
1807(순조 7)∼1883(고종 20).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자는 중필(仲弼).
아버지는 학기(學基)이다. 아버지가 군수를 지낸 정기(鼎基)라고 기록된 자료도 있다. 이는 생부에게서 양부 앞으로 입양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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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중군(京畿中軍)을 거쳐,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수로(江華水路)의 중요한 근거지인 광성진(廣城津)을 방어하다 미국군의 공격을 받아 장렬하게 전사한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의 후임으로 진무사(鎭撫使)가 되어 중군(中軍)을 지휘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복설(復設)된 삼군부(三軍府)의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를 거쳐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다.
1882년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를 역임하기도 했다.
4. 경기도안김사자료집 (강화 관련 발췌)
작성자 :郡/★김태영 작성일 : 2002/11/18 22:33 (from:211.239.251.62) 조회 : 90
京畿道安金史資料集
[선조실록 권68, 선조28년 10월 13일(임자)]
o 대사헌(大司憲) ★김찬(金瓚)이, 임진년(壬辰年:1592년, 선조25년)에 어머니를 만나러 고양(高陽)에 갔다가 영평(永平)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것과 ●강화(江華)에 도달하여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鄭澈)이 부사(府使)로 삼는다고 하여 제때에 환조(還朝)하지 못한 죄등을 들어 파직을 청하였으나 사퇴하지 말라고 답함.
[선조실록 권89, 선조30년 6월 22일(신사)]
o 헌납(獻納) ★김대래(金大來)가 옹주(翁主)등을 우선 ●강화(江華)로 피난시키라는 전교 때문에 백성들이 흩어지니 경솔히 동요하여 미치지 못할 후회를 끼쳐서는 안되므로 속히 제궁(諸宮)을 이피시키는 명을 거두도록 할 것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음.
[선조실록 권180, 선조37년 10월 12일(무오)]
o 경기감사 ★김수(金 目卒)가, 수원(水原), 죽산(竹山), 파주(坡州), ●강화(江華)등에 산성을 수축하여 숙위군(宿衛軍)의 부족 문제를 해결 하자고 아룀.
[인조실록 권15, 인조5년 1월 18일(을유)]
o ★김자점(金自點)에게 순검사(巡檢使)의 직을 주어 ●강화(江華)를 주관하게 함.
[인조실록 권25, 인조9년 7월 4일(병자)]
o <●강화> ●강도(江都)를 보장(保障)으로 적의 침입을 대비 하자는 이원익(李元翼)의 차자(箚子)로 인해 비국(備局)에서 ★김자점(金自點)을 ●강도구관당상(江都句管堂上)으로 추천하니, 그대로 따름.
[인조실록 권25, 인조9년 8월 23일(갑자)]
o 이수일(李守一), 이서(李曙), ★김자점(金自點), ★김시양(金時讓)등이 <●강화> ●강도(江都)에서 돌아와 방어책에 대해 아룀.
[인조실록 권25, 인조9년 8월 26일(정묘)]
o 우의정(右議政) 이정구(李廷龜)가 도성(都城)의 방어와 <●강화> ●강도(江都)의 보장(保障)에 관해 차자(箚子)를 올리면서 ★김시양(金時讓)과의 의견 차이를 이유로 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음.
[인조실록 권25, 인조9년 9월 16일(정해)]
o ●강도구관당상(江都句管堂上) ★김자점(金自點)이 나주(羅州) 등지를 <●강화> ●강도(江都)에 소속시켜 중국과 통상케 하는 등의 경비조달 대책을 아룀.
[인조실록 권28, 인조11년 2월 12일(갑술)]
o ★김자점(金自點)을 대신하여 호조판서(戶曹判書) ★김신국(金藎國)으로 하여금 <●강화> ●강도(江都)의 관리 책임을 겸임하도록 함.
[인조실록 권40, 인조18년 1월 27일(기묘)]
o 비국(備局)의 요청으로 ★김자점(金自點)을 ●강화유수(江華留守)로 삼음.
[인조실록 권40, 인조18년 윤1월 13일(을미)]
o 비국(備局)에서 ●강화유수(江華留守)의 임명에 대해 논란이 많은 ★김자점(金自點)대신 다른 사람을 선임 하자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음.
[현종실록 권19, 현종9년 6월 6일(계유)]
o ★김휘(金徽)를 ●강화유수(江華留守)로 삼음.
[현종실록 권16, 현종10년 4월 23일(을유)]
o ●강화유수(江華留守) ★김휘(金徽)가 <●강화> 철곳, 덕포(德浦), 정포(井浦)의 세진을 도로 옮기는 일에 대하여 아뢰고, 허적(許積)이 덕포는 우선 그대로 두고 철곳과 정포는 매우 중요한 곳이니 농한기에 먼저 옮기는 것이 마땅 하겠다고 아뢰자 그대로 따름.
[현종실록 권17, 현종10년 7월 13일(갑진)]
o ●강화유수(江華留守) ★김휘(金徽)가 <●강화> 철곳첨사(僉使)와 <●강화> 정포(井浦)만호(萬戶)를 농사일이 끝난뒤에 본진에 도로 이속 시켜야 하는데 곤란한점이 많다고 아뢰고, 홍중보(洪重普)는 철곳으로 진을 옮긴뒤에 별도로 별장(別將)을 두었는데 승천부(昇天府)로 옮기면 그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별장을 그대로 둘 필요가 없을 것 이라고 아뢰어 임금이 별장을 줄이도록 하라고 명함.
[현종개수실록 권21, 현종10년 10월 3일(계해)]
o ●강화유수(江華留守) ★김휘(金徽)가 나아가 아뢰기를, 별장(別將)을 이미 혁파했으니 이전처럼 파총(把摠)을 차출하여 군사를 관장케 하자는 것과 본부의 나룻배가 세월이 오래되어 썩어서 쓸수가 없어 바꾸었으면 하는데 물력이 부족하므로 약간의 곡식을 떼어주기를 원하니, 임금이 본부의 모미(耗米)4백섬을 내주라고 명함.
[현종실록 권18, 현종11년 2월 3일(신유)]
o ●강화유수(江華留守) ★김휘(金徽)가 ●강화도사(江華都事)를 혁파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대신들에게 물어본 뒤에 그대로 두되 군무만 관장하게 하고 민간의 일에는 간여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함.
[현종실록 권18, 현종11년 3월 20일(정축)]
o ●강화유수(江華留守) ★김휘(金徽)를 인견 하였는데 ★김휘(金徽)가 갑진년(甲辰年):1664년 현종5년) 이전의 환곡을 탕감해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각 창고의 환곡에 대하여 각 연도에 받아들이지 못한 수량을 상세히 계문(啓聞)하라고 명함.
[현종개수실록 권22, 현종11년 3월 20일(정축)]
o ●강화유수(江華留守) ★김휘(金徽)도 입대하여, 갑진년(甲辰年):1664년 현종5년)이전의 조곡으로서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탕감 시키기를 청하였으나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이 군향(軍餉)이라는 이유로 어렵게 여기니 각년의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나열해 기록해서 다시 품계하여 처리 하라고 명함.
* 京畿道史 資料集에서 우리 先祖님의 資料를 발취하여 보았습니다. 안사연 회워님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올려 드립니다.
▣ 김윤만 - 수고하셨습니다. 정리해서 살펴보니 더욱 좋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 김영윤 -
▣ 김정중 -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니 쏙 눈에 들어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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