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대관上 25 ---안렴사공4자 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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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2-20 02:25 조회1,687회 댓글0건본문
오은대관上 25 ---안렴사공4자 김제
안렴사공의 넷째아들 도절제사공(김제)은 史書나 문집등에는 기록이 없지만, 여말에 1377년 진사과등제, 1382년 문과급제 기록이 보이고 있습니다.
배위 성주이씨(이원구의 따님)와의 사이에 딸만 둘을 두어, 자손이 이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큰사위 이사혜 (전의이씨 이정간의 5자) 가문에서 당시 예속에 따라 도절제사공은 여서 가문에 습승되어 오백여년래 외손봉사를 뫼시어오고 있으며. 묘소는 현재 (충북 청원군 오창면) 목령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오창지에 의하면 ---山亭은 절제사 김공 제가 세운 정자인데 유지가 창고의 동쪽 몇 리쯤 되는 곳에 있다.--- 라 기록되어 있는데, 어디인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오창의 문중 어르신과 향토사학자를 통해서 확인해야 할 사항입니다.
또한 오창지에는 ---士惠가 안렴사의 아들인 병사 제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오근을 별장으로 삼아 왕래하였는데 자손들이 인하여 거주하였다.--- 라는 내용도 있어 도절제사공(김제)으로 인하여 사위 이사혜 가문인 전의이씨가 이곳 오창지방에 거주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4-5. 안렴사공4자 김제(金삼수변制)
■ 안렴사공파세보(1988 무진보)
○ 김제 +성주이씨 (父성산군 이원구, 祖부윤 이인기, 曾祖 )
■ 체경묘원유연비문 (1998, 김재화)
서차4 휘★제(삼수변制)공은 일찍이 고려우왕3년(1377) 선광정사 진사과에 등제하고 우왕8년(1382) 홍무임술 문과에 급제하여 관이 도절제사에 승임되고 절도사를 역임하셨으며 배 성산군부인 성주이씨는 부성산군元具(원구)지녀이요 묘는 오근목령하자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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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서는 전의인 군수 ★李士惠(이사혜), 정랑 ★李訓(이훈)이니 군수공은 부 중추원사효정공貞幹(정간)이요 생4남하니 한성부좌윤孝碩(효석), 부사友碩(우석), 종사랑仁碩(인석), 부위義碩(의석)이며 효정공(이정간)과 좌윤공(이효석)은 송천서원에 동배되었다. 당시 예속으로 도절제사공은 여서 가문에 습승되어 거차 오백여년래 외손봉사를 뫼시어오니 희세의 기문이오 미거라 찬양할 일이다.
■ 오창지 ( )
P73 역시 오근지에는 절제사 김제가 세운 정자 山亭, 군수 이사혜가 세운 杏亭, 역옹 이영길이 지은 정자 東皐亭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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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48 山亭은 절제사 김공 제가 세운 정자인데 유지가 창고(?창리)의 동쪽 몇 리쯤 되는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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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62 동쪽 편에는 長城(현 모정리)에 고려충신 안동김씨 안렴사공이 임종하시고 그 앞에는 山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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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貞幹 (1360-1439) 다섯째아들 士惠가 안렴사의 아들인 병사 제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오근을 별장으로 삼아 왕래하였는데 자손들이 인하여 거주하였다. 송천서원에 (충북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배향되었다.
■ 고문서집성23 -거창 초계정씨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57 (북원)선광7년정사 3월일 門生進 3등 38인 (=명 홍무10년=우왕3년=1377년)
성균학생 ★金 (김제) 壬戌(=1382) 同進士 관지 도절제
父 朝議郞(=정5품) 佐司諫 知制誥 ★士廉
p361 대명홍무15년임술 5월일 급제동년방목 同進士 23인 (=북원천윤4년=우왕8년=1382년)
★金明善 安東 관지 서령
★金 (김제) 安東 관지 도절제
☞도절제사(都節制使)는 고려 말에 설치된 양계(兩界)지역의 장관으로
1389년(공양왕 1) 종래의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이 이름으로 고쳐 대체로 재추(宰樞)로서 이 직을 맡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군지휘관으로서의 기능이 강하여,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지방 도(道)에 파견되어 작전지휘를 하였다. 후에는 동북면 ·서북면에 각 1명씩 고정배치되어 군사 및 민사를 모두 관장하였다. 또 1390년에는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도절제사를 겸임하였고, 1392년 4월에는 도순문사로 다시 개칭되었다.
☞절도사(節度使)는 고려·조선 시대의 외관직(外官職)으로
고려시대에는 995년(성종 14) 지방행정구역을 12주(州)로 나누고 주 장관으로 절도사를 두었다. 1012년(현종 3) 5도호(五都護)·75도(道)를 설치하면서 절도사를 없애고 안무사(按撫使)를 대신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병마절도사(종2품)와 수군절도사(정3품)로 나누어 각 주진(主鎭)을 관장하였다.
▣ 김윤만 - 조선시대가 아무리 엄격한 남성 위주의 사회였다고 하나 외손 봉사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김항용 -
▣ 솔내영환 -
▣ 김은회 -
▣ 김영윤 -
안렴사공의 넷째아들 도절제사공(김제)은 史書나 문집등에는 기록이 없지만, 여말에 1377년 진사과등제, 1382년 문과급제 기록이 보이고 있습니다.
배위 성주이씨(이원구의 따님)와의 사이에 딸만 둘을 두어, 자손이 이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큰사위 이사혜 (전의이씨 이정간의 5자) 가문에서 당시 예속에 따라 도절제사공은 여서 가문에 습승되어 오백여년래 외손봉사를 뫼시어오고 있으며. 묘소는 현재 (충북 청원군 오창면) 목령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오창지에 의하면 ---山亭은 절제사 김공 제가 세운 정자인데 유지가 창고의 동쪽 몇 리쯤 되는 곳에 있다.--- 라 기록되어 있는데, 어디인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오창의 문중 어르신과 향토사학자를 통해서 확인해야 할 사항입니다.
또한 오창지에는 ---士惠가 안렴사의 아들인 병사 제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오근을 별장으로 삼아 왕래하였는데 자손들이 인하여 거주하였다.--- 라는 내용도 있어 도절제사공(김제)으로 인하여 사위 이사혜 가문인 전의이씨가 이곳 오창지방에 거주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4-5. 안렴사공4자 김제(金삼수변制)
■ 안렴사공파세보(1988 무진보)
○ 김제 +성주이씨 (父성산군 이원구, 祖부윤 이인기, 曾祖 )
■ 체경묘원유연비문 (1998, 김재화)
서차4 휘★제(삼수변制)공은 일찍이 고려우왕3년(1377) 선광정사 진사과에 등제하고 우왕8년(1382) 홍무임술 문과에 급제하여 관이 도절제사에 승임되고 절도사를 역임하셨으며 배 성산군부인 성주이씨는 부성산군元具(원구)지녀이요 묘는 오근목령하자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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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서는 전의인 군수 ★李士惠(이사혜), 정랑 ★李訓(이훈)이니 군수공은 부 중추원사효정공貞幹(정간)이요 생4남하니 한성부좌윤孝碩(효석), 부사友碩(우석), 종사랑仁碩(인석), 부위義碩(의석)이며 효정공(이정간)과 좌윤공(이효석)은 송천서원에 동배되었다. 당시 예속으로 도절제사공은 여서 가문에 습승되어 거차 오백여년래 외손봉사를 뫼시어오니 희세의 기문이오 미거라 찬양할 일이다.
■ 오창지 ( )
P73 역시 오근지에는 절제사 김제가 세운 정자 山亭, 군수 이사혜가 세운 杏亭, 역옹 이영길이 지은 정자 東皐亭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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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48 山亭은 절제사 김공 제가 세운 정자인데 유지가 창고(?창리)의 동쪽 몇 리쯤 되는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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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62 동쪽 편에는 長城(현 모정리)에 고려충신 안동김씨 안렴사공이 임종하시고 그 앞에는 山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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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貞幹 (1360-1439) 다섯째아들 士惠가 안렴사의 아들인 병사 제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오근을 별장으로 삼아 왕래하였는데 자손들이 인하여 거주하였다. 송천서원에 (충북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배향되었다.
■ 고문서집성23 -거창 초계정씨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357 (북원)선광7년정사 3월일 門生進 3등 38인 (=명 홍무10년=우왕3년=1377년)
성균학생 ★金 (김제) 壬戌(=1382) 同進士 관지 도절제
父 朝議郞(=정5품) 佐司諫 知制誥 ★士廉
p361 대명홍무15년임술 5월일 급제동년방목 同進士 23인 (=북원천윤4년=우왕8년=1382년)
★金明善 安東 관지 서령
★金 (김제) 安東 관지 도절제
☞도절제사(都節制使)는 고려 말에 설치된 양계(兩界)지역의 장관으로
1389년(공양왕 1) 종래의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이 이름으로 고쳐 대체로 재추(宰樞)로서 이 직을 맡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군지휘관으로서의 기능이 강하여,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지방 도(道)에 파견되어 작전지휘를 하였다. 후에는 동북면 ·서북면에 각 1명씩 고정배치되어 군사 및 민사를 모두 관장하였다. 또 1390년에는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도절제사를 겸임하였고, 1392년 4월에는 도순문사로 다시 개칭되었다.
☞절도사(節度使)는 고려·조선 시대의 외관직(外官職)으로
고려시대에는 995년(성종 14) 지방행정구역을 12주(州)로 나누고 주 장관으로 절도사를 두었다. 1012년(현종 3) 5도호(五都護)·75도(道)를 설치하면서 절도사를 없애고 안무사(按撫使)를 대신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병마절도사(종2품)와 수군절도사(정3품)로 나누어 각 주진(主鎭)을 관장하였다.
▣ 김윤만 - 조선시대가 아무리 엄격한 남성 위주의 사회였다고 하나 외손 봉사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김항용 -
▣ 솔내영환 -
▣ 김은회 -
▣ 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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