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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義李氏(전의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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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3-21 01:33 조회1,7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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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홈을 들려주신 이왕섭 님의 관향이 전의이씨입니다.



전의이씨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전의이씨(全義李氏)



♣시조(始祖) 및 본관(本貫)의 유래(由來)♣



시조(始祖)는 고려 개국공신인 도(棹)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는 초명(初名)이 치(齒)로 고려 태조(太祖)가 견훤(甄萱)을 정벌(征伐)하러 남하(南下)하여 금강(錦江)에 도착했을 때 강물이 범람하자 태조를 도와 무사히 건너게 해주었으므로 태조가 도(棹)라고 이름을 하사(下賜)하고, 통합삼한삼중대광대사익찬공신(統合三韓三重大匡大師翊■功臣)으로 벼슬을 내리고 전의후(全義侯)에 봉해졌다.



그후 그는 전의(全義) 이성산(李城山) 아래로 이거(移居)하여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니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전의(全義)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그 후손 문의공(文義公) 언충(彦■)과 효정공(孝靖公) 정간(貞幹), 문장공(文莊公) 혼(混)의 후손에서 인물이 많이 나와 3대 인맥을 이루었다.





그 중 혼(混)은 시조 도(棹)의 7세손으로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냈는데, 그의 손자 익(翊)이 예안(禮安)으로 분적하여 예안 이씨(禮安李氏)로 불리어 왔으나 근래에 다시 전의 이씨(全義李氏)와 통합하였다.

언충(彦沖)은 고려 고종(高宗) 때의 장군 천(阡)의 손자로서 충렬(忠烈)■충선(忠宣)■충숙(忠肅)■충혜왕(忠惠王)의 4대에 걸쳐 벼슬한 명신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지냈다.

정간(貞幹)은 천(阡)의 현손이며 언충(彦■)의 재종손으로 세종(世宗) 때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내고 노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임명되고 왕으로부터 사연(賜筵) 및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

(충성과 효도로 가문을 전승시키고

인과 공경으로 세세손 지켜나가라)



효정공 李貞幹에게 세종대왕이 내린 이 8자의 御筆은 오늘날 全義■禮安이씨의 정신적 뿌리가 되고 있다.





삼한개국공신(三韓開國功臣) 이도(李棹)에서 씨족의 문을 열어 문중연령 1천여년, 조선조의 상신(相臣) 5명을 비롯, 대제학 1명, 청백리 7명, 공신 6명과 문과급제 178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문장공 이언충(李彦충)과 효정공(孝靖公) 이정간(李貞幹), 문장공(文莊公) 이혼(李混)의 후손에서 큰 인물이 많이 나와 3파 인맥을 이루었다.







本貫地(본관지) 연혁

全義(전의)는 본래 백제의 仇知縣(구지현)이다. 조선조 태조 5년 監務(감무)를, 태종 13년 縣監(현감)을 두었으며 14년에는 燕岐縣(연기현)과 합하여 全岐縣(전기현)이 되었다. 태종 16년 각기 환원되었고, 1895년 郡(군)으로 승격하였다가 1914년 燕岐郡(연기군)에 병합되었다.

주요 성씨로는 李(이)■兪(유)■河(하)■全(전)씨 등이 있었다.







세거지 변천

10세 광기(光起)의 자손들은 12세 의(宜)의 후계(後系)가 전북 익산(益山)의 여산(礪山), 김제(金堤)에, 구(龜)의 후계(後系)는 15세의 대를 전후하여 경남 진양(晋陽), 전북 완주(完州)■담양(潭陽) 등지에서 살게 되었고, 하(賀)의 후계(後系)는 문경(聞慶)에 살다가 양주(楊州)로 옮겨가 자리잡았던 것 같다.



광기(光起)의 동생 광익(光翊)의 자손들은 16세 혜(■)의 후계(後系)가 충남 대덕(大德)의 회덕(懷德)과 옥천(沃川) 등지에 나뉘어 살았고, 15세 영상(永祥)의 후계(後系)가 나주(羅州)에 정착하는 등 대체로 15~16세의 대부터 이들 지역에 살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12세 웅(雄)은 당시 시사(時事)가 장차 혼란할 것을 보고 숙부인 사경(思敬)과 함께 영남으로 내려가 웅(雄)이 지금의 안동군(安東郡) 풍산읍(豊山邑)에, 사경(思敬)이 금릉군(金陵郡)에 은거한 이래 그곳에도 자손들이 살았다.



그리고 10세 익(翊)의 후계(後系)는 16세 수돈(秀墩)의 대를 전후하여 충북 보은(報恩)에 자리잡았던 것 같다.



11세 정간(貞幹)의 자손들 중에서 일부는 17세 민도(敏道)■민행(敏行) 형제가 난을 피하여 각기 경북 영주(榮州)와 경기도 연천(漣川)의 삭녕(朔寧)으로 갔던 이후에 그곳에서 살았고,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벼슬을 버리고 경북 울진(蔚珍)의 평해(平海)로 낙향(落鄕)한 15세 명유(命裕)의 후계(後系)는 평해(平海)에, 고부(古阜)로 퇴거한 18세 통춘(通春)의 후계(後系)는 전북 정읍(井邑) 일원에 세거의 터를 정하였다.



밖에, 대체로 15세의 대부터 3~4대에 걸쳐 충북 괴산(槐山)■중원(中原)■청원(淸原), 충남 연기(燕岐)의 전의(全義)■논산(論山), 경남 의령(宜寧) 등지에 나뉘어 정착했고, 일부는 황해도 해주(海州)에 터를 굳혔다.



정간(貞幹)의 동생 진간(珍幹)의 후계(後系)는 경기도 여주(驪州)에 살았던 것 같다.



13세 장손(檣孫)의 자손들은 충북 옥천(沃川)에 정착하였고, 10세 선경(先慶)의 자손들은 충남 예산(禮山)을 세거지로 삼아왔다고 믿어진다.









출전http://ujuhim.co.kr/new-2jang/main51-265-30(전의李)씨.htm













▣ 김항용 -

▣ 김정중 -

▣ 김윤만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이왕섭 - 관심을 듬뿍듬뿍 주셔서 감사합니다.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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