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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둘째아들 김흔장군 13끝 --- 김흔장군과 한희유, 조헌의 중봉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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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3-25 08:04 조회1,6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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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둘째아들 김흔장군 13끝 --- 김흔장군과 한희유, 조헌의 중봉집



한희유는 <고려사 김방경열전>에 보면 김방경 무고사건에 같이 연루되어 김방경 義男으로 기록되어 있고, 1290-1291년에는 김흔장군과 함께 합단적을 섬멸하는등 충렬공과 둘째아들 김흔장군과 절친한 사이였으나, 1298년 충선왕과 충렬왕 권력투쟁시 김흔장군은 충선왕파로 한희유는 충렬왕파로 갈라 서서 권력투쟁을 벌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1299년 충선왕파(김흔장군 등)측에서 충렬왕파(한희유 등)를 체포하여 국문하기도 하고, 1299년 충렬왕이 한희유를 재상에 임명하자 김흔장군은 원나라 연경에서 돌아오지 않고 7년간 지내다가 1307년 한희유가 죽고 충선왕파가 다시 실건을 잡게 되자 고려로 돌아오게 됩니다. 충렬공과 김흔장군과 관련된 한희유 기록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중봉 조헌 선생의 <중봉집>에 김흔장군의 합단적 섬멸 기록이 실려 있습니다. 아직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인터넷 검색중 한문으로 된 중봉집 기록이 있어 참고로 소개합니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방경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김흔, 김순(金恂), 김영돈(金永旽), 김영후(金永煦), 김사형(金士衡), 박구(朴球)의 기사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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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에 ●김방경이 석주(碩州)에 가서 흔도를 만나 보고 돌아오는 길에 장령들과 군사들이 모두 벽란도(碧瀾渡)에서 그를 마중하였다. 이때 노진의는 큰 술잔에다 술을 가득 부어 ●김방경에게 올렸는데 ●김방경의 부하들은 자기들이 먼저 잔 바치는 것을 미워하여 말리었더니 노진의가 말하기를 “직할 부하나 다른 부하나 모두 다 사람인 것은 마찬가진데 무슨 앞뒤를 가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한희유(韓希愈)가 옆에 있다가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이 자는 의리에 어긋난 행동을 한 자이니 청컨대 마시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자 ●김방경이 갑자기 일어나서 딴 데로 가버렸는데 노진의 등이 이 일에 대하여도 원한을 품었다. 위득유가 ★한희유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왜 나를 동정해 주지 않는가? 나는 관직에서 쫓겨 나고 그대는 상을 받았는데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욕질을 퍼붓다가 마침내 머리로 ★한희유의 가슴을 두 번이나 치받았으므로 ★한희유가 위득유를 때려서 물리치었다. 이로부터 위득유는 속에 항상 불평을 품고 그 사실을 재추와 감찰사(司)에 고발하였다. 그러나 ●김방경은 “취중에 실수했다”라고 하였으니 누가 그 문제를 다시 제기하겠는가? 그리하여 그 문제는 드디어 제기되지 않았다.

위득유는 더욱 더 ●김방경을 원망하게 되어 날마다 노진의, 김복대 등과 더불어 음모를 꾸미어 ●김방경을 모해하였다. 그리하여 ●김방경의 죄상을 기록한 고발장을 가지고 흔도에게 참소하기를 “●김방경이 그의 아들 김흔, 사위 조변, 의남(義男) ★한희유 및 공유(孔愉), 나유(羅裕), 안사정(安社貞), 김천록(金天祿) 등 4백여 명과 더불어 왕, 공주 및 달로화적을 없애 버리고 강화도에 들어가서 반역하려고 음모하고 있다. 또 일본 정벌 이후 군사 기자재들은 모두 응당 관가에 납부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방경과 그의 친속들은 모두 자기 집들에 무기를 감추어 두었으며 또 전함을 건조하여 반남(潘南), 곤미(昆湄), 진도(珍島) 3현에다 두고 무리를 모아 반역을 음모하고 있으며 자기 집이 달로화적의 숙소와 가깝기 때문에 고류동(孤柳洞)으로 이사를 갔으며 국가에서는 때마침 여러 섬들의 인민들에게 육지 깊이 들어와서 살 것을 명령하였는데 ●김방경의 부자(父子)는 그에 복종하지 않고 인민들을 해변에 살게 하였으며 동정 당시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한 자들로 하여금 초공(梢工-키잡이) 수수(水手-뱃군)로 되게 하여 전투에서 불리한 결과를 초래케 하였으며 아들 김흔을 진주(晋州)의 수령으로 삼고 막객(幕客) 전유(田儒)를 경산부(京山府)의 수령으로 삼고 의남(義男) 안적재(安迪材)를 합포(合浦)의 수비장(守備將)으로 삼고, ★한희유에게는 병선(兵船)을 장악하는 일을 맡게 하여 정변을 일으킬 때 곧 보조를 맞추어 일어나게끔 준비하였다”라는 등의 여덟 개의 조항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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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유(韓希愈)

?∼1306(충렬왕 32). 고려의 권신. 가주(嘉州)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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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성품이 소박하고 도량이 넓으며 활쏘고 말달리는 것을 잘하고 담력도 대단하여, 1280년(충렬왕 6) 5월에는 대장군으로서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고성(固城)·칠포(漆浦)에 침입한 왜적을 방비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일개 대정(隊正)에서 출발하여 대장군이 된 그에게는 모함의 사건도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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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0년에는 쌍성(雙城)에 주둔하여 합단적(哈丹賊)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같은해 8월에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임명되었다.

다음해인 1291년에는 내안(乃顔)의 무리인 합단이 기병대를 거느리고 오자, 원나라에서는 설도간(薛#도62干) 및 나만알대왕(那蠻#알09大王)을 보내어 구원한 적이 있었으나, 또다시 정병(精兵)이 와서 대진하게 되자, 창을 잡고 말을 달려 적진 속에 돌입하니 적진이 놀라 무너져버렸다.

또한, 용사를 잡아 목베어 그 머리를 창 끝에 매다니 적진이 모두 전의를 잃고 크게 패하였다.

같은해 6월에는 충청도에서 합단의 잔당을 추격하여 적군 580여명의 항복을 받았다. 충렬왕은 소환하여 강도(江都)에 머무르게 하였다가, 다시 1291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임명하였다. 원나라에서는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으로 임명하여 삼주호부(三珠虎符)를 주고 궁시(弓矢)·옥대(玉帶)·은(銀) 등을 전공으로 하사하였다. 이어 다음해에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삼고 진변만호(鎭邊萬戶)를 삼았다.

1295년 8월에는 김신보(金信甫)의 참소로 조월도(祖月島)로 귀양가게 되었다.

1299년 만호 인후(印侯)·●김흔(金#흔05)과 밀직 원경(元卿)에 의하여 불법한 일을 꾀한다고 하여 체포되었다. 이 사건의 처리를 맡은 좌승 합산(哈散)은 왕과 함께 흥국사(興國寺)에서 닷새 동안 국문하였으나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충렬왕은 이 사건이 원나라에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인후 등에게 부탁하였으나, 인후·●김흔은 원나라에 가서 이 사건을 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나라에서 파견된 탑해(塔海)·활활불화(#활03#활03不花) 등에 의하여 원나라에 호송되었다.

1300년 왕이 원나라에 가서 희유와 인후의 시비곡직을 밝혀 다시 환국하게 되었다.



1302년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임명되고, 다음해에 첨의우중찬(僉議右中贊)에 임명되면서 7월에는 원나라의 명에 의하여 석주(石胄)와 그 아들을 연경으로 압송하기도 하였고, 1305년 11월 충렬왕을 따라 연경에 행차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秦星圭〉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분류별 > 한국문집총간 > 重峯集 > 重峯先生文集卷之七 > 疏

論時弊疏己丑四月

年正月。踰鐵嶺?楊根。攻雉岳城。爲進士元?甲判

官崔愼所挫。世子在元。謁帝請討哈丹。帝命薛?干

等率步騎萬三千?討。夏五月。與我軍合擊于燕?。

大破之。時二軍。夜半發木州。黎明至燕?正左山下。

薄賊陣圍之。賊大驚。欲登山負險而戰。我三軍步卒

在前。騎兵逐後。賊腹背受制。皆棄馬?於林木間。我

軍疑懼不敢進。右軍萬戶金?叱且令曰。敢後者斬。

於是步卒五百。爭登殊死戰。賊奔潰。追至公州河。伏

屍三十里。賊精騎千餘。渡河向遁。臣愚伏計。?州諸

衛。近於遼東。若其地諸胡有變。切願豫咨于惚兵官







김흔장군과 관련된 자료라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모두 모아 보았습니다. 더 찾아보면 이외에도 많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특히 김흔장군께서는 원나라에 수차례 다녀 오시었고, 말년에는 7년간이나 원나라 연경에 계셨으므로 그곳에서 교류한 원나라 인사의 기록에 김흔장군의 기록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원나라 역사 및 문집을 공부할 기회가 있을까요? 이상 13회를 끝으로 김흔장군님 행적 연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 김은회 - 주회 아우님 방대한 자료 감사합니다.

▣ 김항용 - 고생하셨습니다. 지금까지의 자료를 정리하여 홈에 올리는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 김윤식 - 대부님 노고가 크셨습니다.

▣ 김윤만 - 수고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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