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녕(金壽寧)과 이수남(李壽男)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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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섭 작성일03-03-29 21:19 조회1,588회 댓글0건본문
조선시대 성종조에 졸(卒)한 김수녕(金壽寧)과 이수남(李壽男)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졸기를 기록한다.
김수녕과 이수남은 어릴때부터 신동(神童)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하였고 일찍이 문과에도 20세 전후에 급제한 비슷한 전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당대에 문장이 있었다. 또한 두 사람은 친교(親交)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뜻을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고 졸한 것도 두사람 모두 30대로 각각 33세(이수남), 38세(김수녕)였다.
졸기(卒記)는 졸(卒)한 연도를 기준으로 나열하였다.
■1471년(성종 02) 06월 03일(갑진) 이수남(李壽男)의 졸기(卒記)
관찰사(觀察使) 이수남(李壽男)이 졸(卒)하니,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이수남(李壽男)의 자(字)는 자인(子仁)으로, 전의인(全義人)이니, 참판(參判) 이함장(李言咸長)의 아들이다. 경태(景泰) 을해년인 나이 17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천순(天順) 무인년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뽑혀서 보직되었다가 봉교(奉敎)까지 전보(轉補)되었다. 경진년에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천전(遷轉)되고, 임오년에 성균 주부(城均主簿)에 승배(陞拜)하여, 사헌 감찰(司憲監察)·예조 좌랑(禮曹佐郞)·이조 좌랑(吏曹佐郞)·병조 정랑(兵曹正郞)·성균 사예(成均司藝)를 역임하였다. 성화(成化) 을유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하고, 또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였으며, 세조(世祖)께서 하루는 이수남(李壽男)에게 명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빨리 가서 승지(承旨)의 말석(末席)에 앉게 하였으므로 보는 자가 서로 돌아보며 경아(驚訝)하였는데, 드디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배수하고, 수월(數月)이 못되어 우승지(右承旨)로 초배(超拜)되었다가 사건에 연좌되어 파직하였다. 임금이 즉위(卽位)하여서는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제수하고, 경인년에는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승직(陞職)되고, 신묘년에는 순성 좌리 공신호(純誠佐理功臣號)를 주어, 전산군(全山君)으로 봉(封)하고,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배수하였더니, 1일 전 저녁에 홍윤성(洪允成)의 집에 가서 지나치게 술을 마시고 집에 이르러 이튿날로 바로 졸(卒)하였으니, 나이는 33세이었다.
이수남(李壽男)은 총민(聰敏)하고 경기(經記)하며, 또 사자(寫子)를 잘하여, 당시에 칭예(稱譽)가 있었다. 진취(進取)에 예민하여 비록 급하게 달관(達官)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만의(滿意)하지 않았다. 시호를 양간(良簡)이라 하였으니, 온량(溫良)하고 호악(好樂)한 것을 양(良)이라 하고, 평이(平易)하고 게으르지 않은 것을 간(簡)이라 한다. 자헌 대부(資憲大夫)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추증(追贈)하였으며, 아들 둘이 있는데 어리다.
■1473년(성종 04) 07월 03일(임진) 김수녕(金壽寧)의 졸기(卒記)
복창군(福昌君) 김수녕(金壽寧)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김수녕은 자(字)가 이수(이臾)이고, 호(號)가 양소당(養素堂)이며, 안동인(安東人)으로, 절충 장군(折衝將軍) 김숙(金潚)의 아들이다. 어려서 총명하고 지혜로왔으며, 7세(歲)에 속문(屬文)에 능하니 당시에 신동(神童)이라고 일컬었다. 그의 외조부(外祖父)인 좌참찬(左參贊) 안숭선(安崇善)이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다른 날 마땅히 세상에 크게 날릴 것이다.”
라고 하였다. 경태(景泰) 계유년(1453년)인 나이 18세가 되던 해 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가을에 문과(文科)에 제1인으로 뽑혀서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을 제수(除授)받았으며, 병조 좌랑(兵曹佐郞)·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역임하였다. 당시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가 함길도(咸吉道)·평안도(平安道)·강원도(江原道)·황해도(黃海道)·충청도(忠淸道) 5도의 체찰사(體察使)가 되어서, 그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였다. 천순(天順) 신사년(1461년)에 한명회가 그를 보내어 변방(邊方)의 일을 아뢰었는데, 임금을 면대하여 말하는 것이 심히 자세하므로, 세조(世祖)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지금 너의 말을 들으니, 비록 천리(千里)를 격(隔)하였지만 한명회와 더불어 면대해 말하는 것과 같도다.”
하고, 특별히 1자급(資級)을 더하였다. 임오년(1462년)에 세조(世祖)가 경회루(慶會樓)에 나아가서 예문관(藝文館)의 여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옛날의 제왕(帝王)의 득실(得失)을 논란하게 하였는데, 김수녕이 경사(經史)를 증거하면서 시비(是非)를 변석(辨析)하니 문득 말할 때마다 임금이 감동하여 들었고, 또 명하여 자급을 더하게 하였으며, 발탁하여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삼았으나 일 때문에 파면당하였다. 성화(成化) 을유년(1465년)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고, 또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었다. 병술년(1466년)에 다시 좌승지(左承旨)로 임명되었다가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임명되어서 형조 참의·호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무자년(1468년)에 관계(官階)가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고, 경인년(1470년)에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되었다. 세조(世祖)와 예종(睿宗)의 두 《왕조실록(王朝實錄)》을 참찬(參撰)하였는데, 당시 좋은 사재(史才)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신묘년(1471년)에 순성 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복창군(福昌君)에 봉(封)해져서 가정 대부(嘉靖大夫)로 승진하고, 호조 참판(戶曹參判)·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다가 이 해에 다시 복창군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38세였다. 문도(文悼)라고 시호(諡號)하니 두루 묻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중년(中年)에 일찍이 죽은 것을 도(悼)라고 한다. 김수녕은 천자(天資)가 명민(明敏)하고 학문이 해박(該博)하며, 문장(文章)을 짓는 것이 남보다 뛰어나고 간고(簡古)하며, 필(筆)을 잡으면 바로 성취하여 전인(前人)의 말을 답습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글로 써 둔 것이 없어서, 이 때문에 시문(詩文)으로서 세상에 전하는 것이 적다. 바깥으로는 온화(溫和)하고 안으로는 강직(剛直)하여서 진실로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비록 달관(達官)이나 귀요(貴要)라 하더라도 종일토록 마주 대(對)하여 일찍이 그와 더불어 말을 할 수가 없었으나, 만약 그 적당한 사람일 때에는 비록 위포(韋布)의 선비라 하더라도 반드시 신발을 끌고 나아가 맞아들였다.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아니하고 항상 녹(祿)만을 받아서 먹었는데, 남의 집을 빌어 살면서도 종신토록 처세함이 둥글고 넓었으며, 작은 연고를 가슴에 끼어두지 아니하였다. 다만 익살이 많아 큰 소리를 치니 군자(君子)의 근묵(謹默)하는 위용(偉容)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그의 단점으로 여기었다.
▣ 솔내영환 -
▣ 김윤만 -
▣ 김영윤 -
▣ 김은회 -
김수녕과 이수남은 어릴때부터 신동(神童)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하였고 일찍이 문과에도 20세 전후에 급제한 비슷한 전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당대에 문장이 있었다. 또한 두 사람은 친교(親交)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뜻을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고 졸한 것도 두사람 모두 30대로 각각 33세(이수남), 38세(김수녕)였다.
졸기(卒記)는 졸(卒)한 연도를 기준으로 나열하였다.
■1471년(성종 02) 06월 03일(갑진) 이수남(李壽男)의 졸기(卒記)
관찰사(觀察使) 이수남(李壽男)이 졸(卒)하니,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이수남(李壽男)의 자(字)는 자인(子仁)으로, 전의인(全義人)이니, 참판(參判) 이함장(李言咸長)의 아들이다. 경태(景泰) 을해년인 나이 17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천순(天順) 무인년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뽑혀서 보직되었다가 봉교(奉敎)까지 전보(轉補)되었다. 경진년에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천전(遷轉)되고, 임오년에 성균 주부(城均主簿)에 승배(陞拜)하여, 사헌 감찰(司憲監察)·예조 좌랑(禮曹佐郞)·이조 좌랑(吏曹佐郞)·병조 정랑(兵曹正郞)·성균 사예(成均司藝)를 역임하였다. 성화(成化) 을유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하고, 또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였으며, 세조(世祖)께서 하루는 이수남(李壽男)에게 명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빨리 가서 승지(承旨)의 말석(末席)에 앉게 하였으므로 보는 자가 서로 돌아보며 경아(驚訝)하였는데, 드디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배수하고, 수월(數月)이 못되어 우승지(右承旨)로 초배(超拜)되었다가 사건에 연좌되어 파직하였다. 임금이 즉위(卽位)하여서는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제수하고, 경인년에는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승직(陞職)되고, 신묘년에는 순성 좌리 공신호(純誠佐理功臣號)를 주어, 전산군(全山君)으로 봉(封)하고,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배수하였더니, 1일 전 저녁에 홍윤성(洪允成)의 집에 가서 지나치게 술을 마시고 집에 이르러 이튿날로 바로 졸(卒)하였으니, 나이는 33세이었다.
이수남(李壽男)은 총민(聰敏)하고 경기(經記)하며, 또 사자(寫子)를 잘하여, 당시에 칭예(稱譽)가 있었다. 진취(進取)에 예민하여 비록 급하게 달관(達官)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만의(滿意)하지 않았다. 시호를 양간(良簡)이라 하였으니, 온량(溫良)하고 호악(好樂)한 것을 양(良)이라 하고, 평이(平易)하고 게으르지 않은 것을 간(簡)이라 한다. 자헌 대부(資憲大夫)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추증(追贈)하였으며, 아들 둘이 있는데 어리다.
■1473년(성종 04) 07월 03일(임진) 김수녕(金壽寧)의 졸기(卒記)
복창군(福昌君) 김수녕(金壽寧)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김수녕은 자(字)가 이수(이臾)이고, 호(號)가 양소당(養素堂)이며, 안동인(安東人)으로, 절충 장군(折衝將軍) 김숙(金潚)의 아들이다. 어려서 총명하고 지혜로왔으며, 7세(歲)에 속문(屬文)에 능하니 당시에 신동(神童)이라고 일컬었다. 그의 외조부(外祖父)인 좌참찬(左參贊) 안숭선(安崇善)이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다른 날 마땅히 세상에 크게 날릴 것이다.”
라고 하였다. 경태(景泰) 계유년(1453년)인 나이 18세가 되던 해 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가을에 문과(文科)에 제1인으로 뽑혀서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을 제수(除授)받았으며, 병조 좌랑(兵曹佐郞)·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역임하였다. 당시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가 함길도(咸吉道)·평안도(平安道)·강원도(江原道)·황해도(黃海道)·충청도(忠淸道) 5도의 체찰사(體察使)가 되어서, 그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였다. 천순(天順) 신사년(1461년)에 한명회가 그를 보내어 변방(邊方)의 일을 아뢰었는데, 임금을 면대하여 말하는 것이 심히 자세하므로, 세조(世祖)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지금 너의 말을 들으니, 비록 천리(千里)를 격(隔)하였지만 한명회와 더불어 면대해 말하는 것과 같도다.”
하고, 특별히 1자급(資級)을 더하였다. 임오년(1462년)에 세조(世祖)가 경회루(慶會樓)에 나아가서 예문관(藝文館)의 여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옛날의 제왕(帝王)의 득실(得失)을 논란하게 하였는데, 김수녕이 경사(經史)를 증거하면서 시비(是非)를 변석(辨析)하니 문득 말할 때마다 임금이 감동하여 들었고, 또 명하여 자급을 더하게 하였으며, 발탁하여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삼았으나 일 때문에 파면당하였다. 성화(成化) 을유년(1465년)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고, 또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었다. 병술년(1466년)에 다시 좌승지(左承旨)로 임명되었다가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임명되어서 형조 참의·호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무자년(1468년)에 관계(官階)가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고, 경인년(1470년)에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되었다. 세조(世祖)와 예종(睿宗)의 두 《왕조실록(王朝實錄)》을 참찬(參撰)하였는데, 당시 좋은 사재(史才)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신묘년(1471년)에 순성 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복창군(福昌君)에 봉(封)해져서 가정 대부(嘉靖大夫)로 승진하고, 호조 참판(戶曹參判)·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다가 이 해에 다시 복창군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38세였다. 문도(文悼)라고 시호(諡號)하니 두루 묻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중년(中年)에 일찍이 죽은 것을 도(悼)라고 한다. 김수녕은 천자(天資)가 명민(明敏)하고 학문이 해박(該博)하며, 문장(文章)을 짓는 것이 남보다 뛰어나고 간고(簡古)하며, 필(筆)을 잡으면 바로 성취하여 전인(前人)의 말을 답습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글로 써 둔 것이 없어서, 이 때문에 시문(詩文)으로서 세상에 전하는 것이 적다. 바깥으로는 온화(溫和)하고 안으로는 강직(剛直)하여서 진실로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비록 달관(達官)이나 귀요(貴要)라 하더라도 종일토록 마주 대(對)하여 일찍이 그와 더불어 말을 할 수가 없었으나, 만약 그 적당한 사람일 때에는 비록 위포(韋布)의 선비라 하더라도 반드시 신발을 끌고 나아가 맞아들였다.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아니하고 항상 녹(祿)만을 받아서 먹었는데, 남의 집을 빌어 살면서도 종신토록 처세함이 둥글고 넓었으며, 작은 연고를 가슴에 끼어두지 아니하였다. 다만 익살이 많아 큰 소리를 치니 군자(君子)의 근묵(謹默)하는 위용(偉容)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그의 단점으로 여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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