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별서유기비(또는 인조 반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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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3-04-06 20:57 조회1,692회 댓글0건본문

《 인조별서 유기비(仁祖別墅遺基碑) 》
【명 칭】 인조별서유기비(仁祖別墅遺基碑)
【분 류】 비
【지정사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4호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은평구 역촌동 8-12
이 비는 은평구 역촌동 8-12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비신은 화강석으로 되었고 팔각과 12각의 이중기단 위에 놓여 있는 귀부는 운문(雲紋)으로 조각되어 있다. 귀두는 험상궂은 형태로 입을 벌리고 이를 드러낸 상태이며 특히 눈 위는 두툼하게 장식하고 꽃무늬로 조각하였다. 비신 위에는 옥개형(屋蓋形) 개석(蓋石)으로 덮었고, 비신의 높이는 168cm이며 폭은 72cm, 두께는 26cm로 되어 있다. 비문은 어제(御製)로 오위도총관 항(杭)이 썼다. 광해군은 동복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선조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존호를 폐하여 서궁(西宮, 현 덕수궁)에 유폐하는 등 인륜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였다. 이에 당시 능양군으로 있던 인조는 서인 일파이었던 김류(金?),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이괄(李适) 등의 제신과 더불어 이 곳에서 반정을 모의하여 광해군 15년(1623) 3월 12일 거병하여 홍제원에 집결한 지방군과 합류, 거사 직전 이이반(李而쮎)의 누설에도 불구하고 반정(反正)에 성공하였다. 광해군을 폐하고 대북파를 몰아내어 왕위에 오른 인조가 이 혁명거사를 기념키 위해 세운 비가 곧 인조별서유기비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 곳에서 합세할 때에 이서(李曙)의 군이 늦게 도착하였다 하여 연서(延曙)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의 기록을 보면, 연서별서는 북부 연서역촌에 있었으며 인조가 즉위하기 전의 별서(별장)로서 숙종이 을해년에 글을 지어 비를 세웠다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비 근처에는 인조의 별장 즉 연서별서가 있었던 것 같고, 인조별서유기비는 후일 숙종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 같다. 이 비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초익공계(初翼工系) 공포(慊包)를 갖춘 팔작집의 비각을 세워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인조별서유기비의 전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前面>
御筆
仁祖大王龍潛之時別墅遺基碑
<後面>
御製
仁祖大王龍潛之時別墅遺基碑陰記
顯祿大夫東平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臣 杭奉 敎書
洪惟我
仁祖大王龍潛之日別墅在北部延曙驛村之後漢都十里之 內不遠而邇也盖玆地靈氣攸種佳祥鬱口豈非惟天惟祖宗陰 콋以玉成我 聖祖也耶是本我 元宗大王在 龍潛時嘗有以經 營之也規制草草專尙朴素我 仁祖大王克紹儉德不曾恢拓時 擧 王趾消遣世憂方是時也光海昏亂已極 宗社之危迫在呼 吸我 仁祖大王應天順人撥亂反正明倫紀於旣扱拯生民於塗 炭化家爲國光復 前烈口伊天啓癸亥三月十一日乃改玉之前 一日也爰與二三心쪺之臣 駐憩于是亭然則我 聖祖中興之 業實基乎斯可以與海州之芙蓉堂口美而匹休於戱其盛矣不 幸歲月寢久亭報蕩然柱礎獨存鞠爲茂草使我 聖祖再造之地 作一荒廢之所竪淵碑而怜事蹟尙今闕焉予恐文獻無徵側代 愈遠而事愈泯짞命內臣而董之修其遺址?以周墻托貞珉而 紀實傳盛烈於來後庶乎其億萬斯年而無疆云爾 歲在己亥之 秋七月壬午謹識
▣ 김항용 -
▣ 솔내영환 -
▣ 김정중 -
▣ 김윤만 - 햐. 이런 비석도 있었군요. 소개에 감사드립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발용 - 역촌동에 몇년 살면서도 몰랐습니다.
▣ 김윤식 - 태서 아저씨,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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