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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평의공 종부 ●金在敎 님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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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4-14 02:13 조회1,6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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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종회보 제59호 (1998년 1월)

-대구종친회 청장년회 발행 <宗婦>에서 전재-

도평의공 종부 ●金在敎씨



안동김씨 도평의공파 21대 종부 김재교씨(43)는 시집온지 다섯달만에 시어머니를 잃고 지금까지 종택을 비워둔 채 대구서 살고 있다.



남편의 직장으로 객지에 나와 있지만 일이 있을때면 달려가야 하는 "몸은 떨어져 있지만 한시도 종가를 잊을 수 없는" 그런 종부다.



어쩌다 차세대의 종부들이 걸어갈 수 밖에 없는 길을 미리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아 그의 생각이나 행동이 궁금해진다.



---다음 세대의 종부들은 저처럼 고향에 들어가 살 수 없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이렇게 되면 전통을 지킬 수 없는 이도 있겠지만 오히려 더 합리적으로 전통을 존중하는 종부도 있을 겁니다. 제 경우에는 시어머님의 마음은 그대로 간직한 채 일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으면 합니다.---



이러한 김씨의 소망은 항상 희망사항이지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가 언제나 다급한 마음으로 달려갈 수 밖에 없었던 종택은 의성읍을 지나 고운사로 가는 길을 따라 자동차로 10여분 달리면 나타나는 점곡면 사촌 안동김씨 집성촌에 자리잡고 있다.







동네 어귀에는 <안동김씨 입향 600년>을 기념한 비가 있고 안동 회곡에서 이곳으로 처음 터를 잡은 ●子瞻 (도평의공 ●九鼎의 아들) 이 심었다는 상수리나무 등이 이제 울창한 숲을 이루어 반기지만 그녀에게는 웃어른의 손짓처럼 느껴진다.



안동김씨의 분파인 이 마을 전체는 1백여 호이던 것이 이제 70호에 불과하지만 대과 12명, 소과 28명 등 총 40명이 문과 급제자를 내어 전통을 빛낸다.



이 중 학문으로 명성을 내던 ●金光粹는 연산의 폭정에 입신의 뜻을 버리고 이곳 고향에서 영귀정을 지어 후학에 열중했다. 또한 의병장을 많이 낼만큼 나라사랑의 정신과 정의감이 남다른 집안이다. 김광수의 외손자인 서애 ●유성룡도 바로 외가인 이곳에서 태어났다.







종부는 한번도 마음 편히 문중 어른을 대할 수 없다고 털어 놓는다. 종부로서 종택을 지키지 않은 데 대한 죄스러움이다.



제사를 모실 때면 음식을 준비한 보따리를 들고 연년생인 아이를 하나는 업고 하나는 걸리면서 버스길로 왔지만 한 번도 힘들다는 얘기를 할 수 없었다.



---지금 자가용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제 아이들 다 컸지요. 길 좋지요.--- 이렇게 와서 제사 준비를 하고 모시다 보면 10일은 고히 종택에 머물러야 한다. 선산김씨인 그가 이 집안에 시집을 온 것은 24세 되던 해다.



다음호에 계속













▣ 김윤만 - 종손(부)의 길. 그 어려운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모든 종손들께서 경제적으로 여유있게 사셔야 할 텐데. 현실적으로 다가오니 글 감사합니다.

▣ 김발용 - TV에서 방영했던 "종부"라는 프로그램이 생각이 나는군요. 이런 훌륭한 종부님들이 종가의 맥을 이어 온 것이겠지요 .

▣ 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 김영윤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어려운 길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 김항용 - 전통사회에서 가졌던 종가의 권리, 의무, 수용자세와 오늘날 산업사회에서의 권리, 의무, 수용자세의 사이에는 많은 거리와 어려움이 있다고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 종부의 역할을 빈틈없이 해 내신 데에 깊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올립니다. 이 문제는 우리 모두의 관심사요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 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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