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退溪)의 문인 (10) - 퇴계문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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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4-29 17:23 조회1,678회 댓글0건본문
퇴계(退溪)의 문인 (10) - 퇴계문인4
파당을 초월한 문인들
그리고 퇴계 문인들은 다른 학자의 문인들처럼 어느 한 파벌에 연원을 가진 인물들이 아니었다는 사실 또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즉 문인 중에는 후세 역사가들이 동인의 영수로 지칭하는 ★서유애를 비롯 ★정한강, ★김학봉, 성암 ★김효원, 만전 ★홍가신, 추연 ★우성전, 오봉 ★이호민, 초당 ★허엽, 동강 ★김우? 등이 동인 또는 남인의 대표적 인물로 손꼽히고 있으며
서인의 거장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율곡을 비롯하여 사암 ★박순, 선암 ★심의겸, ★성우계, ★기고봉, 월정 ★윤근수, 팔곡 ★구사맹, 서경 ★유근, 지산 ★조호익, 졸옹 ★홍성민 등이 대표적인 서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다.
문인 중 상당한 수는 어느 당파에도 가담하지 않았지만 앞서 열거한 동인과 서인의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볼 때 퇴계선생은 이조시대 정치적 당파에 초연한 학자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士類의 파쟁에 초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퇴계문인들을 중심으로 분류된 동서당파의 인맥을 살펴보면 다음의 연원도표와 같다.
이와같은 퇴계학통 연원도표가 구성될 수 있는 것은 이조정치사에 있어서 정치싸움이 퇴계선생 이전인 명종 재위때까지는 士禍로 나타났고 그 이후 즉 선조 재위 이후에는 당쟁으로 나타난 관계에 연유한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조 5백년을 통하여 퇴계 선생과 함께 일세의 儒宗으로 추앙받고 있는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선생등이 士禍로 인하여 큰 환란을 당했던데 비하여 퇴계선생만이 유일하게 禍를 입지 않았던 것은 파벌을 초월하여 가장 많은 문인을 길러낸 퇴계선생의 독보적인 위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정치학자 강주진 박사는 퇴계학연구논문집에 실린 <이조사에 있어서의 퇴계>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퇴계는 그 학통이 주로 남인당으로 이어졌다고 하는 이가 있지만 기 실은 퇴계의 문인중에 서인이 반을 차지할 만큼 당파와 관련이 없으며 또한 서인이 노소 양당으로 양분되었으므로 노론이나 소론중에도 퇴계의 연원을 대는 이가 많아서 퇴계만이 당파와 관련이 없는 학자가 되었다.
★성수침도 당파와 관련이 없는 학자였지만 그 아들 ★성혼때부터 당파와 관련이 생겼으며 또한 성혼의 외손인 ★윤증이 소론의 창설자로 알려졌기 때문에 자연 소론당과 같은 관련이 생겼다.
그뿐만 아니라 성혼과 이이는 모두 다 퇴계의 도산서당에서 집제한 문도는 아닐지라도 ★이이는 한 두차례 도산까지 찾아가서 퇴계의 교훈을 받았고 ★성혼도 서울서 공사간에 배알하여 지도를 받은 일이 있으므로 해서 그 이름이 <도산급문록>에 들어 있는 형편이다.
이렇게 보면 명조 말기부터 선조 초년에 이르는 동안 퇴계의 학문은 일세를 풍미했고, 그의 문도는 조야간에 충만하였으니 일세의 유학의 거국적 유종이 된 학자는 실로 이조 5백년을 통해서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이퇴계 이 네 사람뿐이고, 또한 퇴계는 그 마지막 분이다.
나는 여기서 ★김종직 ★조광조 ★퇴계의 3인을 비교하여 논하고 이들이 차지하는 우리나라 이조 5백년 동안의 학문적 정치적 위치를 설정해 보려 한다.
첫째로 김종직 조광조 퇴계의 3인은 모두 학자이며 문필가이며 시인이며 또한 경륜가요 정치가였던 것이다.
둘째로 이 3인은 모두 일세를 풍미한 학자들이고, 또한 그의 제자들이 일시 조야에 가득차 있었고, 셋째로는 이 3인이 모두 이조시대를 통해서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온 학자였다.
넷째로는 김종직은 와석종신은 했지만 사후에 생전의 일로 해서 부관참시를 당했고, 조광조는 그의 지치주의 정치를 실현하려다가 사사당했고, 퇴계만은 생전 사후를 통해서 만인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다섯째로 김종직이나 조광조는 모두 뒤에 신원되어 김종직은 문충공의 시호를 물려 받았고 조광조 역시 뒤에 신원되어 문정공의 시호를 물려 받았고 퇴계에게는 문순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러한 이조 전기의 3대학자는 모두 당쟁 이전의 학자였기 때문에 초당적으로, 그리고 거국적 숭앙을 받았으나 조광조와 퇴계는 5현에 들었고 김종직은 5현에서 빠졌다. 그러나 이들 3대학자는 모두 정몽주를 이어 받드는 이조 성리학의 정통학자들 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퇴계선생의 학문과 양사의 공이 뛰어난 배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퇴계는 연산군7년 (1501년) 예안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그 해는 무오사화가 일어난지 3년만이요, 갑자사화가 일어나기 3년전 되던 해이다. 퇴계가 6세 때에 중종반정이 일어났고 19세 되던 해에 을묘사화가 일어 났으니 퇴계의 청년시절은 사화로 점철되는 시대였고 중씨되는 이해가 을사사화(1545년)에 피화되어 유배중 적사하였으니 몸소 사화의 비참함을 겪은 셈이고 또 간신들의 흉계가 얼마나 간악한 것인가를 보고 들으면서 청년시절을 보냈는데 이 동안 퇴계는 끊임없이 학문을 닦았다.
퇴계는 27세 때에 생원 2등으로 합격되었고 이듬해에 진사 2등으로 합격했다. 그리고 33세 때에 비로소 문과 2등으로 합격하였고 34세 때에 여주에 은거중인 모재 ★김안국을 ★권발과 같이 尋訪(심방)했으니 이때부터 퇴계의 견문이 많이 넓어졌고 성균관 유생들과 다유했는데 많은 유생들이 퇴계의 학문에 경복했다고 한다.
34세때 (중종29년) 비로소 승문원 부정자로 출사하였으니 관계의 진출은 매우 늦었다. 2년 뒤에 호조좌랑이 되고 3년후에 玉堂에 뽑혔다. 명종8년 53세때에 대사성이 될 무렵서부터 학문도 대성의 경지에 도달하였고 56세때에 <주자서절요>를 완성하였다.
57세때에 도산서당의 터를 잡고 60세때에 도산서당을 완성하여 양사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때부터 학명과 문명과 도학이 높아 전국에서 신진사류가 몰려들어서 당시 이름있는 사류로서 퇴계의 문하에 출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하 생략---
▣ 김윤만 - 잘 읽었습니다.
▣ 솔내영환 -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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