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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제학공<맹헌(孟獻)>과 낙하동주계축(洛下同舟契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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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3-05-08 09:31 조회1,5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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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제학공(直提學公) 맹헌(孟獻) ▣



공(公)의 휘는 맹헌(孟獻)이요 안동인이며 정축(丁丑 : ☞태조6년, 1397년)생이다. 선덕 병오(宣德 丙午 : 명나라 선종원년, 1426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검열(檢閱)·전랑<銓郞 : 조선왕조 때 이조(吏曹)의 정랑(正郞)과 좌랑(佐郞)을 일컬음. 내외 관원(官員)을 천거(薦擧)·전형(銓衡)하는데 권한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런 별칭이 붙게 됨)을 거쳐 벼슬이 예문관 직제학(禮文館 直提學)에 이르렀다. 배(配)는 숙인(淑人) 양성이씨(陽城李氏)요, 좌찬성(左贊成) 양성부원군(陽城府院君) 공소공(恭昭公) 사검(思儉)의 따님이다. 2남3녀를 낳으니 맏이 지정(自埥)은 벼슬이 直長이요, 다음 자양(自壤)은 벼슬이 내섬시 첨정(內贍寺僉正)이다. 딸 윤기(尹沂)는 파평인으로 현령(縣令)이요, 딸 이세부(李世土+缶)는 전의인으로 牧使요, 딸 송순년(宋順年)은 은진인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정랑(正郞)이며 부제학(副提學)으로 증직되었다. 묘소는 영평 남면 계류동(永平南面溪流洞) 축좌(丑坐) 언덕에 있는데, 상하분(上下墳)이며 표갈(表碣)이 있다.

예문관 직제학(禮文館 直提學) 김맹헌지묘(金孟獻之墓)

음각(陰刻)에 이르기를 ‘이씨 묘는 남쪽에 있고 공의 묘는 뒤에 있다.’하였다.

공인(恭人) 양성이씨지묘(陽城李氏之墓)

음각(陰刻)에 이르기를 ‘직제학 김맹헌의 처는 김공 묘와의 거리가 겨우5~6척쯤 된다.’하였다.

직제학공의 낙하동주계축(洛下同舟契軸)의 서·발(序·跋)이 세상에 전하므로 부록(附錄)한다.



【낙하동주계축(洛下同舟契軸)의 서(序)】

격언(格言)(格言 이상은 떨어져 나가 전하는 글을 볼 수 없다)··· 복전(服前)에 익히는 것이 지당한 언론(言論)이다. 작위(爵位)가 높아졌다하여 남에게 교만하지 읺고 가난한 까닭으로 하여 그 마음이 비루(卑陋)해서는 안된다. 저 사람은 비록 갚지 않더라도 나는 마땅히 베푸는 일을 늦추지 않고 저 사람이 비록 공정치 못하더라도 사정(私情)을 두지 않는다. 저 사람의 선(善)하지 못한 일을 보고 고(告)하지 않음이 없고 나의 허물과 악한 것을 듣고 기뻐하고 다행으로 여기지 않음이 없으며 곤궁한 자가 있으면 덕과 슬기로 다투는 일[心競]을 아낀다. 인리(隣里)에는 서로 도울 의리가 있는데 더구나 복심(腹心)과 같은 벗이겠는가. 마땅히 힘써 도와야 하고 뜻하지 않은 근심이 있을 경우 역시 덕과 슬기로 서로 다툰다. 우물에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갈 수 있다. 더구나 사생(死生)을 같이 하는 동지(同志)이겠는가. 마땅히 힘을 다하여 구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을 집행하기 금석(金石)과 같이 하고 이러한 의리를 수행하기 사시(四時)가 정해진 것처럼 한다. 공경심은 오래된 바에 쇠하지 않고, 신의(信義)는 이미 통달이 된 곳에 이지러짐이 없어야 귀신도 들어주어 마침내 화평(和平)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어버이를 섬겨야 어버이가 기뻐하고, 이렇게 하여 윗 사람을 섬겨야 윗 사람이 신임할 것이니 인덕(仁德)에 도움이 되는 바 역시 크지 않겠는가. 혹시라도 제자(諸子)에게 조금이라도 신의를 이지러뜨리거나 시작은 있고 끔이 없는 경우, 우리 제공(諸公)들은 충성스레 간곡히 고하여 한 번 꾸짖고 두 번 꾸짖고 세 번까지 꾸짖으면 나의 도리는 다하는 것이요, 저 사람이 오히려 옳게 여기면 저 사람은 힘쓰지 않아 군자의 도를 잃는 것이요, 또한 우리들이 평소 생각했던 바가 아니므로 어찌 마땅히 그치지 않겠는가. 아! 사군자(士君子)의 행동은 한 번 실수를 하면 만가지 일이 와해(瓦解)된다. 원컨대 제자(諸子)들은 이에 유의하였으면 매우 다행이겠다.

황명 영락14년(명나라 성조14년, 1416년) 병신 9일 일

<이 서(序)는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다>

동주록(同舟錄) 11인

유학(幼學) 남회(南薈)

신미(辛未) 부(父) 만호(萬戶) 득공(得恭)

영양인(英陽人)

최천(崔泉)

신미(辛未) 부(父) 선공주부(繕工主簿) 충연(沖淵)

철원인(鐵原人)

조윤성(曺允誠)

임신(壬申) 부(父) 인경(仁敬)

문박사(文博士)

수성인(守城人)

조염(趙琰)

갑술(甲戌) 부(父) 전현감(前縣監) 길화(吉和)

함안인(咸安人)

박선(朴璇)

갑술(甲戌) 부(父) 예문직관(藝文直館) 서생(瑞生)

비옥인(比屋人)

남양덕(南陽德)

을해(乙亥) 부(父) 전중추원사(前中樞院事) 실(實)

문헌납(文獻納)

의령인(宜寧人)

강진(康晋)

을해(乙亥) 부(父) 전현무(前縣務) 안식(安式)

문호판(文戶判)

재령인(載寧人)

김맹헌(金孟獻)

정축(丁丑) 부(父) 전경력(前經歷) 명리(明理)

문직제학(文直提學)

안동인(安東人)

이백근(李백근)

정축(丁丑) 부(父) 전춘주사(前春州事) 속(續)

연안인(延安人)

남간(南簡)

경진(庚辰) 부(父) 고의랑(故議郞) 경문(景文)

문직제(文直提)

의령인(宜寧人)

오흠노(吳欽老)

을해(乙亥) 부(父) 제주도안무사(濟州道按撫使) 식(湜)

울산인(蔚山人)



【계축서후발(契軸序後跋)】

평울(平蔚)은 한 시골과 같고 사족(士族)은 약간인데 대성(大姓)인 남(南)씨는 그 하나이다. 나는 늦게 태어났고 들은 것이 고루(固陋)하여 늘 말하기를 남회(南薈)는 무사(武士)라 하여 그 사람됨을 깊이 고찰하려 하지 않았다. 하루는 죽계(竹溪) 안공 충원(安公 忠元)이 나의 박곡(朴谷) 누추한 곳에 왔다. 술이 거나하게 되어서 고향의 현인(賢人)을 논평함에 있어 회(薈)가 무인(武人)이 아니요 곧 유사(儒士)라 하였다. 내가 놀라 그 업(業)을 물으니 말하기를, ‘우리 집에 남공(南公)의 동주계축(同舟契軸)이 있소, 보지 않겠소?’하였다. 내가 보자고 보채었더니 얼마 아니되어 안공(安公)이 소매에 넣고 왔다. 그 서문(序文)을 읽고 그 명록(名錄)을 보니 2백년전 옛 사람의 안면(顔面)과 규범(規範)이 순간 눈 앞에 숙연(肅然)하였다. 내 더욱 놀라워하고 다행하게 여겼다. 회(薈)가 무인(武人)이 아님을 알았을 뿐 아니라 실로 일시의 교제가 서로 마음이 맞았음에 탄복하였다. 열명(列名)된 11인 가운데 서문이 누구의 손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을해생(乙亥生)으로서 끝에 자리한 것으로 보아 이를 지은 것 같다. 경서(經書)를 익히 읽어 문리(文理)가 창달(暢達)하고, 궁달간(窮達間)의 세정(世情)을 잘 서술하였다.내 따라서 간절히 느낀 바가 있다. 한퇴지(韓退之)가 풍숙(馮宿)에게 준 글에 ‘붕우(朋友)의 도(道)가 결절(缺折)된지 오래라.’하였다. 한(韓)의 옛날과의 거리가 그다지 현격한 것이 아님에도 ‘결절된지 이미 오래라.’하였다. 더구나 남회(南薈) 한(韓)과의 거리가 한(韓)의 옛날과의 거리보다 심하니 붕우의 도가 어찌 있겠는가. 그런데 믿음을 금석(金石)과 같이, 의리를 사시(四時)와 같이 하고 복심(腹心)으로 사생(死生)을 서로 기약한다고 까지 하였다. 나의 생각에는 이 11인이 과연 끝까지 반복(反覆)한 사실이 없었겠는가. 한 배에 같이 탔다가 만약 동서남북을 만나는 경우 과연 복심(腹心)으로 사생(死生)할 사람들인가. 그 후 회(薈)는 책을 버리고 검(劒)을 배워 무인(武人)으로 세상을 살았는데 저 10인의 경우 필경 또 어떠하였겠는가. 모두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서문(序文)의 내용이 순박 간절하고 명록(名錄)이 모두 갖추어졌으며 옛 군자가 ‘만사와해(萬事瓦解)’로 서로 권면(勸勉)하고 서로 경계하였으니 국초(國初)에 인품(人品)이 옛날에 가까웠음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인(武人)이냐 문사(文士)냐를 굳이 논할 것이 없다. 아! 지금과 남(南)과의 거리와, 남(南)과 한(韓)의 거리는 또 어떠한가. 세상이 변하는 강하(江河)는 날로 각박하여 심한 경우 배 안이 적국(敵國)이요, 한 방(房)이 오랑캐다. 옛 도[古道]를 보기 어려움이 이와 같으니 아! 개탄스럽다. 안공(安公)은 예[古]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에게 한 마디 말을 청하였다. 사양할 수 없어 짐짓 축(軸)의 시말(始末)을 보고 써서 보낸다.

만력(萬曆) 경신(庚申 : 명나라 신종48년, 1620년) 늦가을에 기성후인(箕城后人) 황여일(黃汝一)은 발(跋)을 짓다.



《출전 : 가보(家譜)번역판/편집인 김재희(金在熙)/1996. 8.30》



▣ 남 회



--호는 정일재(精一齋)며, 군수(郡守) 득공(得恭)의 아들로 1416년(조선 태종 16년)에 진사에 등과하여 세종(世宗) 때에 무과로 증산(甑山), 정의(旌義), 낙안(樂安), 창성(昌城), 제주(濟州)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이름난 김맹헌(金孟獻), 이근백(李勤伯), 남간(南簡) 등 11인으로 용주계(用舟楔)를 모았는데 공이 우두머리였다. 또한 제주(濟州)를 지킬 때에는 혼상(婚喪)의 예를 정하였고 어지러운 것을 모시는 집을 철폐하였으며, 백성을 못살게 하는 독한 무리를 끊고 가르쳐 착한 길로 인도하는 큰 일을 하니 그 곳 사람들이 홍화각(弘化閣)을 세워 모셨다 한다





▣ 김은회 -

▣ 김태영 -

▣ 김윤식 - 연속되는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참 화창한 어버이날입니다. 모든 어르신 평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정중 -

▣ 김항용 -

▣ 김재원 -

▣ 솔내영환 - RKATK

▣ 김영윤 -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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