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눈물없이는 읽을 수 없는 아들(조카, 친구)을 위한 제문.

페이지 정보

김윤만 작성일03-05-12 06:16 조회2,511회 댓글0건

본문

▣ 남신(南賮)공 ▣



--공(公)의 휘는 남신(南賮)이요. 자는 석진(席珍)이며 숙종 무술(肅宗 戊戌 : 숙종44년, 1718년)에 태어나 정묘(丁卯 : ☞ 영조23년, 1747년) 정월 27일에 졸(卒)하니 향년은 30이다. 배(配)는 전주최씨(全州崔氏)이며 경자(更子 : ☞ 숙종46년, 1720년)년에 태어나 무인(戊寅 : ☞ 영조34년, 1758년)에 졸(卒)하였다. 부(父)는 석태(錫台)요 조(祖)는 익준(益峻)이며 증조(曾祖)는 찰방(察訪) 세현(世顯)이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찬원(鑽遠)이요 다음은 창원(敞遠)이다. 묘는 선묘(先墓) 아래 묘좌(卯坐)이다. 공의 품성은 청아(淸雅)하고 재행(才行)은 총민(聰敏)하였다. 어려서부터 가정의 교훈을 받았으며 학문에 독실하였다. 백가(百家)의 모든 글을 모두 섭렵(涉獵)하였고 한 번 보면 곧 기억하였으며 문사(文詞)가 날로 진전되어 비록 노사숙유(老士宿儒)라 하더라도 의난(疑難)된 곳이 있을 적마다 곧 와서 질정(質定)하니 이는 학업이 남보다 앞선 것이다. 임술년에 엄군(嚴君 : 부친(父親))이 시질(時疾)에 깊이 걸렸었고 이어 창증(脹症)으로 병세가 위독하였다. 공은 밤낮으로 속을 졸이고 울다가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여러 달의 시탕(侍湯)에도 끝까지 한결같았으며 야건(野乾)을 시험함에 있어 몸소 먼저 맛을 보았다. 미죽(穈粥)을 받들어 올리는 일과 기거(起居)에 부축하는 일 등에 심성(心誠)을 다하였는데 성효(誠孝)가 감응(感應)되어 다행히 회춘(回春)될 수 있었다. 자친이 이어 병으로 누움에 있어 모든 보양(保養)하는 일이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병인년 친상(親喪)을 맞아서는 애훼(哀毁)가 예절을 벗어났으며 맛진 음식을 입에 가까이 하지 않아 수척한 빛이 자연히 몸에 드러났다. 동강(東岡)의 새로운 무덤에 아침 저녁으로 가서 곡하였으며 새로운 식물(食物)이 있을 적마다 비록 소과(蔬果) 채갱(菜羹)일지라도 반드시 신묘(神廟)에 천신(薦神)하여, 산 이를 섬기거나 죽은 이를 섬김에 있어 그 효성은 차이가 없었으니 이는 하늘에서 낸 효행인 것이다. 공의 가계(家計)는 가난하였으나 일찍이 생업(生業)에 뜻을 두지 않았고 사장(詞章)이 탁월하여도 과거(科擧)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다만 동지(同志)와 동업자(同業者)를 만나면 부지런히 힘써 게을리하지 않아 침식(寢食)을 잊는 일까지 있었으니 대체로 하나의 성심이 학문에만 있었던 것으로 이는 시속(時俗)과 먼 일이다. 공은 젊었을 때부터 두환(痘患 : 홍역)을 치르지 않아 두우(痘憂)를 맞을 적마다 다른 곳으로 피접(避接)하였다. 정묘년 이른 봄에 갑자기 두신(痘神)의 사나움을 만나 그 달 27일에 졸(卒)하였다. 아! 공의 재행(才行)과 공의 성효(誠孝)에도 하늘이 그 수(壽)에 인색하여 현양(顯揚)하지 못하였으니, 친척이 모두 실망하였고 여러 친구들이 모두 통석(痛惜)하게 여겼다.



--【제문(祭文)】

--유세차(維世次) 정묘(丁卯) 4월 경신삭(庚申朔) 초1일 경신(庚申)에 아비는 박전(薄奠)으로 망아(亡兒) 학생(學生) 남신(南賮)의 영(靈)에 영결(永訣)을 고한다. 아! 슬프다. 부자 서로 의지함은 곧 천륜(天倫)의 지극한 즐거움이여, 부자 서로 헤어짐은 곧 인간의 지극한 슬픔이다. 너는 지금 아침 저녁의 지극한 즐거움을 사양하고 유명(幽明)에서 지극한 슬픔을 안았으니, 하늘에 물으려 하나 천리가 아득하고 귀신에게 질정하려 하나 신도(神道)를 알 수 없으니 이 점이 내가 계속 울부짖고 계속 좌절(挫折)하는 소이인 것이다. 너는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남보다 나았다. 배움에 들어간 이후 일찍이 나에게 노고(勞苦)를 준 일이 없었고 의의(義疑)가 있으면 반드시 곧 책을 펴놓고 고열(考閱)하여 분명히 환하게 안 뒤에야 그만 두었다. 자라서는 권하지 않아도 읽었고 부지런히 안했어도 진정이 있어 비록 노사숙유(老士宿儒)와 여러해 종사한 자라도 너의 해박(該博)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며 일가지친(一家至親)에도 반드시 너에게 그 모르는 것을 물었고 동료 친구들도 반드시 너에게 그 머리 하나를 양보하였다. 만약 이와 같이하여 계속 진전한다면 그 낭떨어지는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너의 성품은 소탈하고 맑았으며 지취(志趣)는 청결하여 일찍이 이욕(利慾)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또 일찍이 생업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다만 동지(同志)와 동업자(同業者)를 만나면 마음을 기울이고 부지런하여 게으름이 없었고 웃고 기뻐함에 침식(寢食)을 잊기까지 하였으니 대체로 하나의 성심(誠心)이 성심사이에 있어서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시속세태(時俗世態) 와 멀어진 것이다. 그 처자를 대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말할 만한 것이 있어야 말하고 반드시 물을 만한 것이 있어야 물었으며 심상한 말, 한가로운 말은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재롱을 보고 웃은 적이 없었으며 아이가 보채어도 안아주지 않아 무정무심(無情無心)한 듯 하더니 병이 위독한 때에 이르러서는 아내를 돌아보며 생각하는 정을 못내 잊을 수 없다는 빛으로 두흔(痘痕)을 어루만지게 하였고, 아이를 불러놓고 애련(哀戀)한 생각으로 때론 혹 배운 글자를 물었으니 진정(眞情) 이 죽음에 임하여 드러나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두우(痘憂)를 피한 것은 병오년에는 대산불당(大山佛堂)에 가 있었고 임자년에는 우내변(禹乃邊) 노복가(奴僕家)에 있었으며 경신년에는 삼승불당(三升佛堂)에 있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어찌 두기(痘氣)와 상치(相置)된 일이 없었겠는가. 지금까지 피하게 된 것은 대체로 인연과 수운(數運)이 이르지 않았던 까닭이다. 금년 정월 초3일 두환(痘患)이 바로 이웃에서 발생하여 어쩔 수 없이 하마동(霞麻洞)의 산암(山庵)으로 피하였다. 집을 떠날 때에 네 어미의 새 무덤에 곡(哭)하고 떠났는데 애모(哀慕)하고 호통(號痛)하는 정은 전보다 곱이나 더 하였다. 나도 따라가 같이 곡(哭)하였는데 정회(情懷)는 매우 좋지 않았다. 내가 말하기를 ‘네 어미의 초기(初朞)가 멀지 않았는데 갑자기 상청(喪廳) 곁을 떠나니 슬픔이 이길 수가 없다.’라고 하니 너도 말하기를 ‘애통함을 무어라 말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한참을 멍하니 섰다가 뒷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 때 서운했던 생각이 지금도 가슴에 맺혀 있다. 그 달 17일 산당(山堂)에서 병든 몸을 이끌고 신기(新基)의 백강(伯綱) 집으로 내려왔다. 내가 8일에 가서 보니 두반(痘瘢)은 뚜렷이 얼굴 피부에 돋았고 과립(顆粒)은 분명 붉고 윤택하여 좋은 것 같았다. 내가 그 증세가 순(順)하여 기뻐하니 너도 말하기를, ‘평생 두신(痘神)을 피하여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는데 지금 쾌하게 치루니 도리어 기쁘고 다행스럽습니다.’고 하였다. 그 날 데리고 오니 증세는 비록 순(順)하였으나 밥을 삼키지 못하고 다만 미음만 수삼차(數三次) 마실 뿐이었다. 그런데 항상 나의 몸에 친근(親近)히 하려고 너의 팔 다리를 나의 팔 다리에 대었고 자주 나의 다리를 베고 자면서 마음이 매우 화창하고 기쁜 듯 하였으니 아마도 네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웠으므로 잠시도 어버이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었던가? 그러나 너를 대함에 있어 유치소아(幼稚小兒)와 달라서 한 이불에서 네 몸을 보듬어 안고 누울 수 없었는데, 오늘 천고의 뉘우침이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네가 알아 누웠을 때 허추(許錐)·홍성(洪晟)으로 하여금 이에 있으며 증세를 논하게 하였더라면 어찌 흔쾌하지 않았겠는가? 그 때 내 비록 범연히 들었으나 너는 병이 심해 질 것을 우려하여 의원(醫員)에게 질문할 것을 생각하였다. 26일 아침에 갑자기 한 마디 하기를, ‘지금은 비록 편작(扁鵲)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하였다. 내가 놀라 답하기를, ‘지금 이미 딱지가 지려는 때인데 무슨 염려할 증상이 있어 이런 말을 하느냐?’하였다. 대체로 너는 증세가 중하여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 때 이미 한삽(寒澁)하며 땀을 흘렸고, 또 설사(泄瀉) 증세가 있어 하루에 4-5차나 하였으니 이는 모두 다스리기 어려운 증세였으나 나는 전혀 깨다지 못하고 회생을 바랐다. 그 날 저녁 때 내가 잠깐 졸다가 일어나 보니 네가 허공(虛空)에 손을 흘들었고 또 창흔(瘡痕) 두어 곳을 뜯었다. 내가 묻기를 ‘어디가 아프냐?’하니 다만 두어 마디만 대답할 뿐 더는 대답이 없었다. 재차 물었으나 대답지 않고 혼절되어 인사불성이었으며 숨이 끊어지려는 듯 일주야(一晝夜)에 이르렀다. 내 생각에는 일시 피곤해서 그러니 좀 있으면 깨어날 것이려니 하였다. 7일 밤이 되자 담기(痰氣)가 점점 상승하면서 마침내 명(命)을 다하니 아! 슬프구나. 아! 슬프구나. 내 평생에 죄가 크고 깊어 스스로 죽지 못하고 그 재앙을 너에게 미치게 하였다. 너에게 무슨 죄가 있으며 너에게 무슨 허물이 있단 말이냐. 네 아내는 금년 28세가 된다. 네 아들 맏이는 5세요, 다음은 2세이다. 네가 이 세상에 잠깐 태어났다가 곧 돌아가니 내게는 다만 성(姓)을 잇기 위하여 태어났고 네 아내에게는 오로지 포원(抱寃)을 위하여 태어났다. 나 노부(老父)가 돌아볼 때에 젊었을 때를 회상하면 역력히 어제의 일과 같다. 손가락을 꼽아보면 금년이 68로서 한 순간처럼 느껴진다. 너의 잠깐동안의 세월, 30에 그쳤으니 베개 반을 베고 잔 춘몽(春夢)이 잠깐임을 말할 것이 없다. 일장(一場)의 바람에 등불이 그 바쁨을 견줄데가 없으나 어찌 그 명(命)이 촉박(促迫)하여 급하게 우화(羽化)한단 말인가? 지난 해 4월 보름날 네 어미가 갑자기 죽었다. 그 때 슬퍼함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먼저 구천(九泉)으로 돌아가 지금의 경상(景像)을 보지 않으니, 땅으로 들어가는 즐거움이 이 세상의 고통보다 나을 것이다. 네가 어미의 상(喪)을 맞이함에 있어 애훼(哀毁)함이 도에 지나쳐 형용이 꺼칠했었다. 상복(喪服)은 잠시도 벗지 않았고 조석으로 묘전(墓前)에 배곡(拜哭)하였으며 기름진 주육(酒肉)을 입에 대지 않았다. 비록 아비의 명령으로 강박(强迫)할 수 없었으며 원기(元氣)가 크게 비어 구제할 수 없이 된 것이다. 비록 운명으로 말미암은 것이나 역시 인사(人事)로 인연하여 실책(失策)이 생긴 것이니, 슬퍼한 들 무슨 소용 있으랴. 슬퍼한 들 무슨 소용 있으랴. 네 모자(母子) 사이의 정애(情愛)는 매우 밀접하여 다른 사람들 모자(母子)보다 더 하였다. 네가 어미를 이별한지 겨우 10개월에 따라 우화(羽化)하여 묻힐 곳을 아래 위로 이어서 만드니, 슬하(膝下)의 즐거움이 화평하여 아마도 생시에 곁에 모시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미에게 효도를 함은 좋으나 노부(老父)에게는 어찌할 것이며 상부(孀婦)에게는 어찌할 것이며 고아(孤兒)에게는 어찌할 것인가? 하나는 효(孝)가 되지만 하나는 불효(不孝)가 된다. 아! 슬프다. 차후(此後)의 일을 알 수는 없으나, 속연(俗緣)은 비록 끊어졌더라도 한 영(靈)이 없어지지 않아 타세(他世)에 다시 태어나 나와 부자(父子)의 지친(至親)이 되어 다하지 못한 정을 이을 수 있겠는냐? 아니면 혼은 올라가고 넋은 잠겨 연기가 날고 구름이 흩어지듯 영영 윤회 변화(輪回 變化)하는 이치가 없을 것이란 말이냐? 아! 슬프다. 네가 아끼던 필연(筆硯)·서책(書冊)은 완연히 책상에 있으나 네가 걷던 묘로(墓路)와 소로(小路)는 거칠어져 황폐하였다. 절기가 따뜻해지면 초목은 무성해지지만 이미 떨어진 이파리는 봄을 맞는 슬품을 더하게 하고, 이미 말라버린 물고기는 하수(河水)를 지날 때에 울음이 있다. 백수노부(白首老父)가 홀로이 이 세상에 남았으니 어찌 가슴이 메어져 숨이 끓어질 것 같지 않겠느냐. 아! 슬프다. 살고 죽음에 제도(制度)가 달라 장사가 내일로 다가왔다. 초빈(草殯)에서 나와 현택(玄宅)으로 돌아가니 말은 더 못하겠으나 슬픔은 한이 없고, 몸은 죽었으나 한은 다함이 없다. 영(靈)이 있거든 나의 술 한 잔을 흠향(歆饗)하라. 아! 슬프다. 상향(尙饗)



--【제문(祭文)】

--유세차(維世次) 정묘(丁卯) 4월 경신삭(庚申朔) 초1일 경신(庚申)에 계숙(季叔)은 박전(薄奠)으로 망질(亡姪)의 영(靈)에 통곡(慟哭)한다. 아! 슬프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사람이 벗어나기 어려운 일이나 세간(世間)에 어찌 너와 같이 재주는 있되 명(命)없이 귀화(歸化)하는 비참한 경우가 있단 말이냐. 위로 칠순 노친(老親)이 있고 아래로 두 어린 애가 있으며 최복(衰服)을 벗지 못한 채 한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전(奠)을 받들 사람이 없고 곁에 모실 그림자가 끊어졌다. 아침 저녁으로 호곡(號哭)하는 소리는 영영 들을 수 없고 상강죽(湘江竹)의 눈물의 흔적(순(舜)이 붕(崩)하매 이비(二妃)가 상죽(湘竹)에 눈물을 뿌려 반죽(斑竹)이 되었고, 상강(湘江)에 몸믈 던져 죽음)은 점점 혈흔(血痕)을 이루니 인간의 지극한 슬픔은 극에 달한 것이요, 구천(九泉)의 포원(抱寃)은 극심한 것이며 영원히 간 자의 혼백(魂魄)은 반드시 어두운 곳에서 흐느껴 울 것이다. 아! 너는 어려서부터 천품(天稟)이 총명하고 남달리 민첩하여 가정의 거듭된 가르침과 독려를 받지 않고도 나태(懶怠)한 버릇이 없었으며 부지런 하고 굳세게 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고서도 점점 진전하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백가(百家)의 글을 널리 보아 학문이 크게 떨쳤고 한 번 보면 곧 기억하여 문사(文詞)가 날로 늘어 친척들은 모두 현양(顯揚)을 바랐고 친구들은 모두 다 미루고 사양하였다. 만약 하늘로 하여금 나이를 빌리게 하였더라면 우리 가문을 붙들 수 있었을 것이요 우리 가문을 떨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그 수(壽)를 아껴 이 현질(賢姪)을 빼앗아 가니, 운수란 말인가! 천명(天命)이란 말인가! 30년 세월이 언뜻 흘러가니(망아지가 틈을 지나듯 하니) 하늘이 어찌 차마 이러하며 귀신이 어찌 이리 독(毒)을 내린단 말인가! 맛 좋은 샘물은 쉬이 마르고 곧은 나무는 먼저 꺾인다. 너로 하여금 재예(才藝)가 숭상할 만한 것이 없고 문호(門戶)에 의뢰할 만한 일이 없었더라면 반드시 장수(長壽)를 누렸을 것이며 맛 좋은 샘, 곧 나무가 꺾이고 마르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물(造物)이 시기를 많이 하여 문호를 쇠퇴하게 하여 유지(維持)를 어렵게 함으로써 그 재예를 펴고 의견을 드러내지 못하고 끝내 갑작스런 일을 당하게 하였으니 비단 한 사람의 운수 뿐이 아니요, 실은 문호의 쇠퇴와 연관이 있으니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허물할 것인가! 다만 슬픔만 더할 뿐이다.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고 수(壽)하고 요절(夭折)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 인사(人事)를 다하지 못함에 탓할 수는 없으나 통한(痛恨)으로 여기는 것은 만약 양의(良醫)로 하여금 관형찰색(觀形察色)하고 증세에 따라 투약(投藥)하여 그 진원(眞元)을 보았더라면 혹시라도 가망이 있었을 것이나 가세(家勢)가 탕패하여 조리(調理)에 적절함을 잃어 마침내 이에 이르렀으니 가이 없는 슬픔을 어찌하겠는가. 아! 네가 어렸을 때 내가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토닥거리고 어루만졌으니 정은 친 아들과 같았고 우러르고 의지함은 부모와 같이 보았다. 나가면 서로 생각하고 집에 있을 때는 서로 의지하였다. 때로는 혹 너와 더불어 고사(古史)를 평론하였고 의문이 있으면 너에게 물어 해결하였고 백가제서(百家諸書)에 물음에 따라 응답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고인의 행적에 분명하고 자세치 않음이 없었다. 비록 지금 이름이 널리 알려진 문아(文雅) 일지라도 능히 (너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는 너의 천재(天才)가 출중한 것이요, 내가 더욱 통석(痛惜)하게 여기는 바다. 아! 지난 임술년 형주(兄主)께서 시질(時疾)에 걸려 몹시 앓으시다가 이어 창증(脹症 : 뱃속에 물이들고 부어 오르는 병)으로 위태로웠다.너는 밤낮으로 가슴을 졸이고 눈물을 흘리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여러 달 곁을 모심에 있어 끝까지 한결 같았다. 야건(野乾)을 시험하는데 네가 먼저 맛을 보았고 미음을 올리는 일, 기거(起居)에 부축하는 일에 성심을 다하여 모든 힘을 쏟았으니 그 효성이 하늘을 감동하게 하여 다행히 회복되실 수 있었다. 너의 어머니가 이어 병을 앓으시게 되매 그 보양(保養)하는 정성이 역시 그러하였으니 이는 사람마다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그러나 그 선행(善行)은 숨겨져 알려지지 않았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 작년 4월 수주(嫂主 : 형수)께서 돌아가시매 너는 땅을 치며 하늘에 울부짖음에 오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흐느끼고 몸부림침에 애훼(哀毁)가 절도를 지나쳤었다. 열 달동안 상청(喪廳)을 모시며 주육(酒肉)을 입에 대지 않았고, 한 없는 추모(追募)에 파리한 빛이 자연 외모에 드러났다. 동쪽 언덕의 새로운 무덤에 아침 저녁으로 왕곡(往哭)하였고 음식기거(飮食起居)에 있어 체제(體制)에 벗어남이 없었다. 새로운 식물(食物)을 맞이할 적마다 비록 소과채갱(蔬果菜羹)일지라도 반드시 신묘(神廟)에 천신(薦神)하여 산 이를 섬기거나 죽은 이를 섬김에 있어 그 효성에 차이가 없었으니 이점 내가 더욱 슬프게 여기는 바이다. 아! 너에게 두 아이가 있어 모두 두진(痘疹)을 치렀고 용모가 수이(秀異)하고 품성이 굳고 확실하다. 연아(鍊兒 : 휘(諱) 찬원(鑽遠)의 자가 백련(百鍊)이므로 남신(南賮)의 아드님 찬원(鑽遠)을 가르킴)는 나이 겨우 5세이나 능히 문자(文字)를 분변하고 지각(知覺)이 날로 자란다. 잘 교육만 하면 쇠퇴한 데에서 가문의 명성을 이을 수 있고, 장차 망하려는 가업(家業)을 진작(振作)싵킬 수 있겠다. 이는 형주(兄主)께서 밤낮으로 안고 쓰다듬고 위로가 되는 바요, 네가 반드시 구천(九泉)에서 기쁨을 머금을 일이다. 아! 네가 두환(痘患)을 치르기 전, 앞 뒤 피접(避接)한 일이 한 두 차례가 아니며 다행이 모면할 수 있었는데 섣달의 두환이 이웃 마을을 에워싸 치열하니 어쩔 수 없이 피접을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갈 즈음에 마음이 울적하였고 오래도록 안정이 어려웠다. 형주(兄主)와 새 무덤 곁에서 통곡하며 헤어졌는데 어찌 오늘 갑자기 묵은 자취가 될 줄이야 헤아렸겠는가. 네가 피접하는 곳에서 비로서 두환(痘患)을 얻고 억지로 집에 돌아왔다. 나는 그 때 마침 순아(順兒)의 죽음을 맞이하여 속기(俗忌)에 구애되어 직접 보호하지 못하고 증세가 매우 평순(平順)하다고 전해 듣고 그 날짜를 헤아리며 소복(蘇復)되기를 기약하였는데 하루 사이에 역증(逆症)이 생겨 마침내 구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 죽음에 임하여 영결(永訣)도 못하였으니 이 통한(痛恨)은 천고에 누리기 어렵다. 애닲은 정회(情懷)를 쓰려 하니 뜻은 무궁하나 글은 기술할 수 없고 눈물은 흘러 말은 다할 수가 없다. 열흘이 넘어서야 저 유택(幽宅)에 나아갔다. 초목(草木)은 슬픔을 머금었고 새벽 달은 처량하다. 묘로(墓路)는 거칠기만 하고, 빈 당(堂)은 썰렁하다. 좌우를 돌아보니 슬픔만 일어나고 눈에 보이는 것은 마음만 상하게 한다. 영(靈)이여! 앎이 있다면 나의 한 잔 술을 흠향(歆饗)하라. 상향(尙饗)



--【金公 席珍(석진)에게 祭를 올리는 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유해진(柳海鎭) 字 백윤(伯潤)

--석진(席珍)은 백윤(伯潤)에게 벗이다. 7-8세 때부터 서로 추종(追從)하며 혹 책상을 이어 놓고 토론하기도 하고 혹 지팡이를 나란히 하여 명승(名勝)을 찾기도 하였으며 일찍이 달이 넘도록 서로 찾지 않은 일이 없을 만큼 30년이 된 지금까지도 이어졌다. 석진이 병을 않음에 있어, 듣자고 달려가 증상의 경중을 진찰하였고 돌아와서는 사사로이 구애되는 일이 있어 그 병이 위독해서는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 상사(喪事)를 영결(永訣)함에 있어 염빈(殮殯)을 할 수 없었고, 장사 지내는 날에는 또 집불(執佛)하고 광(壙)에 나아가지 못하였으며 이어서 독한 여역(癘疫)에 걸려 4-5개월 귀관(鬼關)을 오락가락하느라 영전(靈前)에 한 번 통곡하는 성의를 오래도록 펴지 못하였다. 아! 석진(席珍)의 상사(喪事)에 백윤(伯潤)이 나아가 곡하는 일이 남보다 뒤에 하리라고 누가 말했겠는가. 병이 좀 나았으므로 삼가 박전(薄奠)으로 와서 곡을 하니 곧 정묘 11월 초하루 다음 날이다. 이에 애사(哀辭)를 지어 권한다.

그윽하면서도 깊은 조상(曹狀)의 골이여, 골 밑에 집이 있으니 내 벗의 집이네. 지난 날 내가 여기 왔을 때에는 내 벗 기뻐하더니, 지금 내가 여기 왔는데 내 벗은 어디로 갔는가. 한 줌 흙 거친 들에 풀은 이미 묵었고,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정인데 두두리며 곡(哭)을 하니 세간(世間)의 인사(人事)는 기약할 수 없구려. 산(山)에는 가래나무가 있고 갯가에는 구리때(궁궁이 풀)가 있네. 공(公)을 생각하니 눈물이 주르르 흐르네. 맑고 깨끗한 자질(姿質)에 구차스레 화합(和合)하지 않는 그 지조(志操)는 곧 고을에서 다같이 추양(推讓)하는 바인데, 아! 갑자기 지하(地下)로 그림자가 없어졌고, 활달한 재주와 해박한 지식은 곧 동료들이 다같이 인정하는 바이나 아, 마침내 인세(人世)에 이룬 것이 없구려. 인(仁)한 사람은 반드시 수(壽)를 얻는데 그대는 어찌 그 인(仁)은 있으나 그 수(壽)는 없으며, 선(善)한이는 반드시 복(福)을 받는데 그대는 어찌 선(善)에는 후하면서 복(福)에는 박하단 말인가. 갚고 베푸는 이치, 아득하고 어두워 곧바로 사명(司命)에게 힐문(詰問)하려 하나 그렇지 못하오. 대춘(大春)은 현재 늙어가는데 누가 다시 외로운 이를 부호(扶護)할 것이며, 난정(蘭庭)에 뾰죽이 돋은 두 싻은 누가 애무(愛撫)하여 성립(成立)시킬 것인가. 그대의 온갖 느낌과 한을 말하려 하니 동해(東海) 물을 빚어 눈물을 만들었으나 오히려 부족하네. 지난 날 같이 교유(交遊)할 적에 내가 병을 앓고 그대가 강건(剛健)하매 그대는 늘 나의 병을 걱정하였는데, 그대가 먼저 가서 내가 길이 아파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지난 해 겨울 내가 그대의 집에 갔었을 적에 역대(歷代)의 유적(遺蹟)을 모아 기록하여 장차 글을 읽는데 편리하도록 하려 하였는데, 권질(卷帙)이 반도 되지 않아 갑자기 세상이 덧없이 변하였으니, 내가 누구와 더불어 같이 이 책을 이룰 것인가. 아, 그대의 손 때가 내 책상에 남아 있어 한 번 열 때마다 한 눈물이요, 아득이 사이하고 섰으니 그대 만나기를 바라나 두 번이 어려우네. 영좌(靈座)에서 흰 휘장을 헤치니 그대의 의금(衣衿)이 가지런함을 황홀히 보았고, 맑은 물결 넘실거리는 방당(方塘)에서 그대의 금포(襟袍)가 선명하고 밝음을 황홀히 보았네. 아직도 어둡지 않음이 있거든 나의 충정(衷情)을 굽어 보시기를····한 생각은 말이 없으니 말을 길게 할 수가 없고, 비애(悲哀)의 만분의 일을 대강펴니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네. 아, 흠향하시게.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정동조(鄭棟朝) 중임(仲任)

--유세차(維世次) 정묘(丁卯) 이른 봄의 달에 김공(金公) 석진(席珍)이 갑자기 여학(癘虐)에 걸려 마침내 악실(堊室 : 복상중(服喪中 )에서 일어나지 못하였고, 2-3일만에 장사를 지냈는데 이 때 서쪽 마을의 정우(情友) 정동조(鄭棟朝) 중임(仲任)은 마침 병으로 광(壙)에 나아가 영결(永訣)하지 못하였으니 마음에 부담이 되고 항상 통한(痛恨)이 되었다. 미처 기거동작(起居動作)치 못하는 사이 벌써 상사(常事)가 내일 새벽이니 곧 무진(戊辰)의 정월 26일 신해(辛亥)이다. 비로소 한 잔 술과 두어 줄기 눈물로서 곡하면서 권하니 아, 석진(席珍)은 자질이 인자(仁慈)하고 행실이 독실하며 재능이 높고 널리 배웠다. 화옹(化翁)이 무슨 뜻으로 후하게 주어 놓고는 이처럼 속히 빼앗는단 말인가. 춘당(椿堂)은 기운 해로서 엄자(崦嵫 : 해지는 산)에서 비치고 귤원(橘園)의 쇠잔한 열매는 엷은 그늘이 쓸쓸하네. 아, 석진(席珍)이여, 어찌 차마 이를 버렸는고. 비록 행로(行路)에 오히려 슬픔이 많다고는 들었지만, 더구나 이 나의 마음은 어찌 그 슬픔을 감당할 것인가. 옛 살던 곳을 돌아보매 묵은 자취가 어렴풋이 보이고, 지난일을 생각해 보니 물거품과 그림자처럼 흔적이 없네. 청아(淸雅)한 담론(談論)과 음운(音韻)은 들리는 것 같고 보이는 것 같으며, 서가(書架)의 책과 필연(筆硯)이 눈에 닿으매 마음이 슬퍼지네. 푸른 등(燈) 쓸쓸한 절[寺]에서 책상을 지고 가 함께 노닐었고, 맨 손으로 싸우는 과장(科場)에서 삿갓 지고 같이 일을 하였었는데, 지금은 이미 끝이 났으니 그 누구와 다시 더불어 추종(追從)할 것인가. 따뜻한 옥(玉)의 자질(姿質)에 맑은 얼음의 마음은, 물과 달의 정신을 기약했었는데, 되돌려 생각해 보니 끝내 보이는 것이 없네. 아, 하늘이 죽임은 항상 선인(善人)에게 있네. 인의(仁義) 정직(正直)을 행하면 군자(君子)가 되는데 반드시 그 죽음을 부르는 것은 역시 조물(造物)의 꺼리는 바이니, 아, 석진(席珍)의 그 죽음은 내개 의심할 만한 것이 없네. 옛날 한창려(韓昌黎 : 이름은 유(愈). 塘·宋 八大家의 한 사람)가 이원빈(李元賓)에게 곡(哭)하며 말하기를, ‘수(壽)라는 것을 나는 사모할 줄 몰랐고, 요(夭)라는 것을 나는 싫어할 줄 몰랐네. 살아서 선(善)하지 않으면 누가 그 수(壽)를 말하겠는가. 재주가 당세(當世)에 높고 행실이 고인(古人)보다 나으면 죽는다 하더라도 이름이 지워지지 않으니 누가 요(夭)라 말하겠는가.’하였으니 이는 실로 그대를 두고 한 말이네. 이 말을 외워 고하니 생전의 정(情)과 몰(歿) 후(後)의 슬픔을 듣고, 혼(魂)이 응하여 슬픔을 위하여 말해주게. 나도 어찌 차마 그만두겠는가. 아, 석진(席珍)은 마침내 어찌할 것인가···. 상향(尙饗).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월성(月城) 이조한(李肇漢)

--유세차(維世次) 정묘(丁卯) 4월 경신삭(庚申朔) 초길일(初吉日)에 우인(友人) 월성(月城) 이조한(李肇漢)은 삼가 비박(菲薄)한 전(奠)을 갖추어 김공(金公) 석진(席珍)의 영(靈)에 곡결(哭訣)합니다. 아, 슬프다. 영(靈)이 깨끗한 그 성품, 건실(健實)한 그 자질(資質)은 비유하면 한 점 흠이 없는 양옥(良玉)이요, 재품(才品)은 민첩하고 문사(文詞)는 넓습니다. 한결같이 효성스럽다는 집안의 명성(名聲)이요, 여섯 글자(六字)의 본디의 업(業)입니다. 여러 대(代) 같은 마을에서 살면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귐이었고 정이 깊어 책상을 같이 하였으며 정의가 무거워 인척(姻戚)이 되었습니다. 마주 앉아 글을 논하매 거의 밤낮을 잊었고, 분산(分山)으로부터 몇 번이나 벌목(伐木 : 시경(詩經)의 편명(篇名)인 벌목장(伐木章))을 읊었던가. 조촐한 만남, 사이가 막히면 나의 마음은 무엇을 잃은 것 같았습니다. 형(兄)이 갑자기 흉사(凶事)를 맞아 슬퍼함이 절도에 지나쳐 영위(榮衛)에 속이 손상되매 나는 이를 걱정하였습니다. 어찌 꺼리는 병이 갑자기 치료가 어렵게 되고, 기술(技術)이 효험이 없이 되어 형(兄)은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난초(蘭草)는 가을이 되기 전에 시들었고 양몽(梁夢)에 먼저 놀랐으나 두개의 주옥(珠玉)은 죽은 뒤의 전형(典型)입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요서(夭逝)에 무슨 한계가 있을까마는, 형(兄)의 죽음 더욱 측은(惻隱)합니다. 청상(靑孀)의 거적자리에 잦아드는 촛불이 애처롭고 백발(白髮)의 춘당(春堂)은 쓰라림으로 파리해 집니다. 영(靈)이 만약 아신다면 역시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상하(床下)에 와서 절하매 장차 무슨 말로 위로할까. 살고 죽음에 제도(制度)가 달라서 단조(丹旐 : 장례에 사용하는 기(旗))는 이미 열렸고 선영(先塋)의 남은 등성이에 만고(萬古)의 유택(幽宅)입니다. 돌아보면 나는 구애(拘碍)되는 일이 있어 지척(咫尺)에서도 오갈 수 없었고 병에도 가서 문병(問病)치 못하였으며 염(殮)에도 나아가 곡(哭)하지 못하다가 지금에 와서 집불(執紼 : 장송(葬送))하니 유명(幽明)에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윤노(輪櫓)를 곡하며 어루만지매 슬픈 눈물이 줄줄이 흐릅니다. 조촐한 자태(姿態)요, 충실한 담소(談笑)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서는 다시 볼 수 없습니다. 날이 저문 황원(荒原)에 해가(薤歌 : 만가(挽歌))가 슬픔을 돕습니다. 어둡지 않은 것은 영(靈)이니 이 술을 흠향(歆饗)하소서. 아, 슬프도다. 상향(尙饗)



《출전 : 가보(家譜)번역판/편집인 김재희(金在熙)/1996. 8.30》

▣ 김윤식 - 하늘에서 더 크게 쓰시기 위함이건만, 아내에 이어 아들을 가슴에 묻은 아버지의 비통함을 어찌 필설로 다하겠습니까!

▣ 김태서 - 어찌 슬품을 글로 다 표현 할수 있겠습니까.

▣ 솔내영환 - 매일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슬픈 제문을 보았습니다. 저의 장성한 큰 형님을 잃은 부모님의 심정을 헤아려 봅니다.

▣ 김태영 -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느다고 합니다. 슬프고 애닲은 제문 잘 읽었습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