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조의 훈신 김시양(金時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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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3-05-14 01:28 조회1,474회 댓글0건본문
김시양(金時讓)경상 ㆍ 평안 감사 ㆍ 병조 판서 ㆍ 도원수 ㆍ 4도 체찰사(四道體察使)
김시양은 처음 이름은 시언(時言)이며, 자는 자중(子中)이고, 호는 하담(荷潭)이다. 을사년 정시(庭試)에 뽑히고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 어릴 때에 남보다 뛰어났고 기상이 비범하였으며, 책을 많이 보고 잘 기억하였다. 오리(梧里)ㆍ백사(白沙) 두 분이 한 번 보고 국기(國器)라고 인증하였다.
○ 경술년에,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 문견록(聞見錄)을 올려서 논하기를, “오랑캐의 기세가 점점 뻗치는 것 같은데, 우리 나라가 중국에 사신을 보내자면 요동(遼東) 길은 믿을 수 없으니 바닷길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것은 공이 10년 전에 미리 안 것이었다.
○ 전라 도사(全羅都事)로 향시를 주관하였는데, 여러 소인들이 시험 문제에 임금을 비방하고 풍자하였다고 적발하여 체포당하였다. 정 판서(鄭判書)세규(世規)가 광릉(廣陵) 길에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으나, 공은 얼굴빛이 태연하였다. 법정에 들어오자 의금부에서 극형에 처하기를 아뢰었는데, 광해주(光海主)가 그것을 3일 동안 발표하지 아니하였다. 공이 옥에서 평상시와 같이 잠을 자니, 윤효선(尹孝先)이 시관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함께 잡혀 있었는데, 공을 차서 일으키며, “지금이 어떤 때인데 평안히 잘 수 있소.”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요.” 하였다. 백사 정승 이항복(李恒福) 이 구원하여 사형에서 감형되어 종성(鍾城)으로 귀양갔다. 공이 가던 길에서 시를 지었는데,
마음과 행동이 본래 백일을 속이지 않았으니 / 心跡本非欺白日
길흉은 원래 푸른 하늘에 물을 것이 아니다 / 吉凶元不問蒼天
하였다.
○ 광해 때, 호조에서 토목 공사에 비용이 군색하여 죄인들에게 돈을 받고 속(贖)하라는 명이 내렸다. 귀양간 여러 사람들이 그 명령대로 돈을 바치기를 서로 다투었다. 공과 무숙(茂叔) 임숙영은 구차하게 죄를 면하는 것을 싫어하여 마침내 속죄하지 않았으니, 아는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다.
○ 이괄의 난에 임금의 행차가 공주(公州)로 파천하였다. 방어사 정충신(鄭忠信)이 먼저 안현(鞍峴)을 점령하여 적병을 격파할 계책을 내니, 모든 장수가 그 계책이 어떨까 의심하였으나 공은 힘써 그 계책을 찬성하여 다행히 큰 공을 세웠다.
○ 공이 두 번째 병조 판서가 되니, 무인으로서 재주는 있어도 세력 없는 자들이 서로 축하하여 말하기를, “공정한 도(道)가 다시 시행되겠구나.” 하였다.
○ 서쪽 오랑캐 침략의 일이 급해져서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근심하였는데, 홀로 조정에 있는 이들만은 취(醉)하여 깨지 못하였다. 공이 당시의 재상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금년 겨울을 넘지 않아서 반드시 오랑캐의 난리가 있을 것입니다. 준비가 있으면 걱정이 없을 것이나, 군사란 것은 먼저 준비가 없으면 창졸간에 대응할 수 없는 것인데 어찌 여러 분의 계책이 여기에 미치지 못합니까.” 하였더니, 그 해 겨울에 과연 공의 말과 같이 되었다.
○ 임경업이 오랑캐에게 잡혀 갈 때에 공이 말하기를, “내가 경업의 사람됨을 아는데, 죽을 줄을 알고도 피하지 않을 사람은 아니니, 반드시 도망할 것이다.” 하였는데, 마침내 공의 말과 같이 하였다.
○ 기사년에 금 나라 사람들이 인삼 수천 근을 보내어 푸른 베와 바꾸려고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쌀과 베를 사고 팔고 하여 응하였다. 5년 만에 금나라 사람이 또 그 수효대로 되지 못한 것을 책하였다. 안팎에 있는 일 맡은 신하들은 눈이 어둡고 마음이 막혔는지 아득하게 기억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공에게 물으니, 공이 각 고을에서 나눠 받은 것의 많고 적은 것과, 각 도 감사와 비변사의 아뢴 날짜까지를 입으로 외우고 글로 썼다. 뒤에 그 장부를 얻어 맞추어 보니, 털끝만치도 틀림이 없었는데, 임금이 곧 탄복하여 이르기를, “세상에 드문 총명이다.” 하였다.
○ 어린아이 때 우연히 어떤 집에 전답의 결수를 기록한 것을 보았는데, 잠깐 눈을 거쳤지마는 또한 일생 잊지 않았으니, 기억하는 재주가 천성에서 얻은 것이었다. 이상은 모두 용주(龍洲)가 지은 신도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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