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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공 김수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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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3-05-28 16:46 조회1,4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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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수(金 目卒) 1537(중종32)∼1615(광해군7).

조선 선조때의 명신. 字는 자앙(子昻), 호는 몽촌(夢村), 첨지중추부사 김로(金魯)의 손자이며, 사재감정(司宰監正) 홍도(弘度)의 아들. 어머니는 이계백(李繼伯)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 생원으로 있다가 1573년(선조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이듬해 홍문관 정자 · 저작을 역임하고, 다시 예문관 봉교를 거쳐 사헌부 감찰로 승진하였다. 이어 정언 · 수찬 · 교검 · 지평 · 직강 등을 역임하고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을 때 선조의 명으로「십구사략(十九史略)」을 개수하고 주(注)를 붙였다.  1583년 번호(藩胡)가 침입하여 경원부(慶源府)가 함락되자 이조정랑으로서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종사관이 되었다. 유학(幼學) 신급(申급)이 올린 상소 속에 조정에서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인물의 하나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그 후 직제학(直提學)·승지(丞旨)를 거쳐 1587년 평안도 관찰사에서 면직되었으나 나라에서 왜(倭)를 매우 걱정하여 변방의 일을 아는 재신(宰臣)을 뽑아 삼도(三道)로 나누어 파견하여 군무(軍務)를 순찰하고 대비하도록 할 때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부제학(副提學)·대사헌, 병조·형조의 판서를 역임, 정철(鄭澈)의 건저문제(建儲問題)에 대해 옥당에서 탄핵하는 차자(箚子)를 올리려고 할 때 부제학으로서 사성 우성전(禹性傳)의 집으로 의논하러 가서 시간이 지연되어 올리지 못하였으므로 대사간 홍여순(洪汝諄)이 우성전을 탄핵하면서 남·북 두파로 갈리게 되자 남인이 되었다. 1591년 다시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고,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로서 진주에 있다가 동래가 함락되자 밀양과 가야를 거쳐 거창으로 도망을 가면서 다만 각 고을에 격문을 돌려 백성들에게 적을 피하라고 통고하니 도내가 텅 비어 왜적을 방어할 수 없었다.
전라감사 이광(李洸)과 충청감사 윤국형(尹國馨)이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켰을 때 겨우 1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가하였으나, 근왕병이 용인(龍仁)에서 왜군에게 패하자 경상우도로 되돌아가던 중 영남초유사(嶺南招諭使) 김성일(金誠一)로부터 패전에 대한 질책을 받았다.
당시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곽재우(郭再祐)와 불화가 심하여 김성일의 중재로 무마되기는 하였지만, 지방사람들로부터 처사가 조급하고 각박할 뿐만 아니라 왜란의 초기에 계책을 세워 왜적과 대처하지 못하고 적병을 피하여 전라도로 도망갔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1592년 8월에 한성판윤이 되었고, 지중추부사·우참찬 등을 거쳐, 1596년(선조 29) 호조판서로서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명군(明軍)의 군량을 충당하기 위하여 군량징수에 힘썼다1592년 11월 13일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우참찬(右參贊)·형조와 호조판서를 지내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고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1613년(광해군5) 손자 비(秘)가 적신들의 무고로 옥사(獄死)할 때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삭직(削職)당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그의 죽음을 듣고 나라의 충신을 잃었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시호는 소의(昭懿). 저서로 몽촌집(夢村集)이 있다.

 2000년 5월 18일,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도당동 도당근린 공원내에 <부천 향토 역사관>이 개관되었는데 이곳에 공의 필적(奏請使李判書-사진본)이 전시되고 있다.(서운관정공파. 서울 양천구 목동아파트 거주, 규태씨 자료 제공) 묘소는 서울시 시흥에서 1936년경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고강동 주옥로 300번지의 고강아파트와 금강타운가 사이로 천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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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2002. 9. 26. 恒鏞(제) 참배 및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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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필서찰>(국사편찬위원회 소장. 2002. 3. 익원공파 은회 조사. 자료 제공)

*좌측자료 : 1607년(선조 40) 정월, 일본 사신으로 가는 副使 교리 慶진(청주인)을 송별하는 자리에서 호조판서인 김수가 지은 친필 시이다(해설:石陵世蹟. 안동김씨서운관정공파 간. 1996-이 책에는 해설만 있고 상기 사진 자료는 없음. --<조선사료집사진합편>에도 있음)

*우측자료 : 1590년(선조 23)에 나이 많은 임금과 정2품 70세 이상의 문관이 입참하여 記名하던 기로소(耆老所)에서 壽宴에 참석한 병조판서 김수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적어 놓은 시문(해설:상동. --<대한민국 역대명현필보>에도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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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필 서찰>(<槿墨(仁)>(성균관대 간. 1995. 87P.   2002. 8. 13. 항용(제) 조사 제공.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4권에도 수록돼 있음)

 




▣ 솔내영환 -
▣ 김태서 -
▣ 김주회 - 몽촌공 김수 선조님에 대한 일목요연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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