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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신정 기(龍仁新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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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3-06-10 04:52 조회1,6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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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신정 기(龍仁新亭記) 
 
   
김수녕(金壽寧)

용인(龍仁)은 작은 고을이나 서울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밤낮 없이 폭주하는 대소의 빈려(賓旅)가 이곳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으니, 대개 남ㆍ북의 인후(咽喉)라 하겠다. 옛 관원(館院)이 적어서 겨우 하룻밤을 지낼 만하며, 한더위를 당하면 막히고 답답하여 손이 오더라도 회포를 풀 길이 없어 번열(煩熱)에 허덕이니, 병으로 여긴 지가 오래였다. 천순(天順) 4년 겨울에 박군(朴君)이 와서 이 고을을 맡게 되자, 과세(課稅)에 너그럽고 정사에 민첩하여 온갖 폐단이 다 없어지니, 서리(胥吏)는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그리워하였다. 하루는 군이 서리와 상의하기를, “내가 재목을 모아 정자를 지어 손님의 납량(納凉)할 곳을 만들고자 하는데 옳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이미 군의 정사를 덕으로 여기는 처지라 모두 하는 말이, “원컨대 힘을 다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장인(匠人)은 정신을 가다듬고 역사하는 자는 힘을 부지런히 하여, 새벽과 밤으로 일을 서둘러서 한 달 안에 낙성을 고하게 되었다. 시작할 때에 백성은 정자를 짓는 줄도 몰랐다가 완성된 뒤에 바라보며 말하기를, “우리 원님은 옛날의 이른바 신명(神明)이 아닌가. 정자를 지었는데도 어찌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을까.” 하며, 서로 우러러 보고 감탄하며 그 새로 지은 것을 경축하였다. 요즘 세상의 수령들을 보면 도취한 꿈속에서 날을 보내며, 관청을 여관집 보듯이 하여 기울어진 뒤에야 기둥을 바꾸고 비가 샌 뒤에야 수선하며, 심한 자는 기와 하나도 갈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나는 백성을 아껴서 그렇다.” 하며, 풀 한 포기도 제거하지 아니하고서, “내 뜰에는 송사가 없어서 그렇다.” 하니, 관사의 퇴락은 항상 이러한 무리에게 기인하는 것이다. 어찌 능히 일에 분발하여 처음부터 튼튼히 하는 자가 있으며, 또 어찌 능히 백성으로 하여금 알지도 못하게 하고 이와 같이 짓는 자가 있으리요. 내가 일찍이 남쪽에 노닐다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용인(龍仁)을 지나는데, 박군이 나에게 붓을 주며 기(記)를 청하므로 나는 이미 이와 같이 졸하게 적었었다. 군은 말하기를, “정자가 기(記)를 얻었으니 다행이나, 명칭이 아직 없으니 어찌하랴.”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명칭이 있어야 의당 옳겠지만, 명칭이 없더라도 또한 불가할 것은 없다. 용인 고을에 그대 같은 원이 없었으면 정자가 세워질 까닭이 없고, 정자가 세워지지 않았으면 명칭이 어디서 나오리요. 명칭이 없는 것으로써 명칭을 하는 것도 역시 좋은 명칭이 아닌가 싶다.” 하였다. 군이 나에게 간청하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므로 인하여 용인 백성이 우러러보며 새로 지어진 것을 경축하는 뜻을 채택하여 이름을 신정(新亭)이라 하자고 하였다. 전하는 말에 이르지 않았던가. “신(新)이라 이른 것은 옛날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또한 처음부터 군자가 중히 여기는 의(義)가 없는 것이 아니다. 박군의 이름은 거명(居明)이요, 자는 회보(晦父)요,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출전;동문선

▣ 김항용 - 연일 귀한 자료에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연일 귀한자료 감사합니다. 용인 신정 이 지금도 있나요? ▣ 김윤만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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