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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학공파 괴산 선조님 신도비문(11)-金悌甲편(역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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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3-06-11 00:09 조회1,6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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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公)의 성(姓)은 김(金)이요 휘는 제갑(悌甲)이요, 자(字)는 순초(順初)요, 호(號) 의재(毅齋)라. 안동인(安東人)이니,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고려(高麗)의 명신 충렬공(忠烈公) 휘(諱) 방경(方慶)의 11대손이다. 상락(上洛)의 후손으로 판삼사(判三事)가 있었는데 상락군(上洛君) 문영공(文英公) 휘(諱) 순(恂), 좌정승 상락부원군(左政丞上洛府院君) 휘(諱) 영돈(永暾), 호(號) 균헌(筠軒), 상락백(上洛伯) 휘(諱) 진(縝)이니, 삼세(三世)의 사적은(事蹟), 고려사(高麗史)에 갖추어 실려있다.
 보문각직제(寶文閣直提) 휘(諱) 익달(益達)이 휘(諱) 고사(顧事)를 낳으니, 아조(我朝) 태종(太宗) 때 청현(淸顯)에 올라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를 지내니, 이 분이 휘(諱) 맹렴(孟廉) 사헌부찰(司憲府察)을 낳고, 이 분이 휘(諱) 철균(哲筠)을 낳으니, 철균(哲筠) 이 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기 되고, 이 분이 휘 수형(壽亨) 장예원사의(掌隸院司議)를 낳으시니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贈職)되니, 이 분이 공(公)의 증조(曾祖)이다.
 할아버지는 휘(諱) 언묵(彦默)으로, 학문에 힘쓰고 기개(氣槪) 과 절개(節槪)를 숭상(崇尙)하여 은둔(隱遁)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는데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追贈)되니, 삼세의 추은을 입으니 공이 귀하게 됐기 때문이다. 비( )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니, 신주기씨(辛州奇氏)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추증(追贈) 도승지(都承旨) 형( )의 딸이다.
  가정4년(嘉靖四年:1523년) 중종(中宗) 21년 을유(乙酉) 5월17일 을해축시(乙亥丑時), 한성(漢城) 남쪽 성곽 밖 반석방(盤石坊)에서 공(公을) 낳았다. 공(公) 태어날 때 기이(奇異)하고 준수(俊秀)하고 빼어나서 보통아이들과 달랐다. 7세에 앞산의 황소를 보고 시(詩)를 읊기를 "황소가 청산에 매어 있는데, 청산에 한 점이 누르구나."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그것을 남다르게 여겼다.
 머지않아 의정공(議政公)이 괴산 고향집으로 돌아와 돌아가시니, 이때 공(公)의 나이 겨우 10세였다. 어머니가 교육을 위해 모든 고아들을 이끌고 서울집으로 돌아갔다. 공(公)이 이미 어리고 고아라서 배울 때를 잃었으나,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장인 기대복(奇大復)공(公)과 고모부 묵재(默齋) 이문건에게 수학하는데, 1년도 못되어 학업을 날로 나아갔다.
 18세에 재상 서파(西坡) 윤개(尹漑)가 묵재(默齋)로 인하여 공(公)을 보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딸을 아내로 삼을 수 있도록 청했다. 어머니가 사양하여 말하기를 "과부의 아들이, 배우지 못해 예의에 어두운데 어찌 어진 가문과 혼인을 하겠습니까?" 하고, 거절하는 것이 매우 확실했다. 윤공(尹公)이 진실로 요청하여 혼인을 했다. 장인 윤공앞에 나가 수업(受業)하는데 일야(日夜)로 침식(寢食)을 잊어버리면서 연구(硏究)하였다. 일찍이 불과  10번 논어(論語)를 읽는데, 수년(數年)을 지난후 외는 것을 시험하는데 한 자도 착오가 없었으니 총명강기(聰明强記)가 이와 같았다.



▣ 김태서 -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자세한 신도비문 이어서 그런지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자세한 기록이 많네요
▣ 김윤만 - 잘 보았습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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