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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의 갈림길에서 우리 선조님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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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6-14 02:38 조회1,5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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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에 우리 게시판에 소개했던 내용입니다만, 6월의 문화인물 포은 정몽주와 직접적인 관련이 되는 여말선초의 갈림길에서의 우리 선조님들의 행적을 다시 소개해 봅니다.









작성자 :김주회 작성일 : 2003/01/27 21:23 (from:220.75.185.96) 조회 : 62

여말선초의 갈림길에서 우리 선조님들은...



여말선초의 역성혁명시에 우리가문의 선조님들 가운데에서

고려조 충신으로 기록된 분은 군사공 김칠양, 안렴사공 김사렴, 서운관정공 김수, 자포옹 김전, 전서공 김성목과 그의 아들 학당 김휴 공이 있고,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참여한 분은 익원공 김사형, 안정공 김구덕, 정의공 김철 공이 있습니다.



이때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고려조 충신으로 절의를 지킨 분들은 ★정몽주나 이색의 경우처럼 죽음이나 몰살을 당한 사람들이 많은데, 위에 열거한 분들은 이리저리 피해다니고 향리에 운둔한 기록은 있어도 죽음을 당한 경우는 없는데, 이는 아마도 익원공 김사형의 배경(힘)에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려조 충신>

義節編 康隱 ●金七陽 (?-?)

*방경- (1/5)선- (2/4)승용- (1/2)후- (3/3)군사공 칠양



靖節編 典書 ●金成牧(?-?)

*방경- (1/5)선- (2/4)승용- (2/2)구- (1/2)전서공 성목



義節編 學堂 ●金休 (?-?)

*방경- (1/5)선- (2/4)승용- (2/2)구- (1/2)전서공 성목- 휴



表節編 梧隱 ●金士廉

*방경- (3/5)순- (4/4)영후- (1/2)천- (2/4)안렴사공 사렴



靖節編 自逋翁(자포옹) ●金鈿(김전) (?-?)

*방경- (3/5)순- (4/4)영후- (2/2)판삼사 장- (1/2)일, (2/2)전





<조선조 개국공신>

●김사형(金士衡) <1333-1407(충혜왕2-태종7)>

*방경- (3/5)순- (4/4)영후- (1/2)천- (4/4)익원공 사형



●김구덕(金九德) ?∼1428(세종10)

*방경- (1/5)선- (3/4)승택- (1/2)묘- (3/3)안정공 구덕



●김 철(金 哲)

*방경- (4/5)윤- (2/2)영요- (1/1)행- (2/2)정의공 철









▣ 여말충의열전 (1996, 고려숭의회)

義節編 康隱 ●金七陽 < ? ~ ? (1350 ~1420 추정)>

*방경- (1/5)선- (2/4)승용- (1/2)후- (3/3)군사공 칠양



호는 강은(康隱)이니 안동인(安東人)으로 첨의평리(僉議評理) 후(厚)의 아들이요,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충숙공(忠肅公) 승용(承用)의 손자요, 충렬공(忠烈公) 방경(方慶)의 현손이다.

가정 이곡(稼亭 李穀)의 문인이다. 공(公)은 젊어서 부터 재주와 덕망이 뛰어났으며 일찍이 성리학(性理學)을 강구하여 목은 이색(牧隱 李穡),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재종인 척약재 김구용(척若齋 金九容) 을 종유(從遊)하여 그 의리와 명분을 같이 하였다. 여말(麗末)에 늦게나마 수안군사(遂安郡事)를 지냈으나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등극하자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굳은 절개를 지키고 강진(康津) 금릉산(金陵山) 선묘하(先墓下)에 은거(隱居)하여 학문을 벗삼아 세월을 보냈다. 조선조에 들어와 이태조가 벼슬을 주어 누차에 불렀으나 끝내 불응불취(不應不就) 하였다. <사재명신의록>

공(公)이 아들들에게 훈계하여 이르기를, " 나는 옛 고려국의 세신(世臣)으로서 비록 나라와 함께 망하지는 못하였더라도 너희들은 학문을 닦아 충성으로 새나라의 성왕(聖王)을 돕도록 하라" 하였다. 아들 전(塡)과 돈(墩) 형제는 과연 천명을 쫓아 조세(早歲)에 등과(登科)하여 모두 제학(提學)이 되었다.<대동기문>

여말충의열전 의절편(麗末忠義烈傳 義節編)에서 옮김









▣ 여말충의열전 (1996, 고려숭의회)

靖節編 典書 ●金成牧(?-?)

*방경- (1/5)선- (2/4)승용- (2/2)구- (1/2)전서공 성목



공은 안동인으로 구(王+久)의 아들이요, 밀직사사 承用의 손자요, 평장사 方慶의 후손이다.

여말이 벼슬이 공조전서에 이르렀다.

때에 고려를 반역하여 혁명을 주도하는 세력이 조정에 창궐하여 고려의 운이 기울어지자 선생은 문하평리 변빈, 판서 성만용, 박사 ★정몽주, 제학 홍재, 대사성 이색, 전서 조열, 전사 이오, 단구재 김후 등과 공당에서 기약없이 모여 술을 기울이며 정란을 상심 개탄하다가 합잠시를 지어 읊고 눈물을 흘리며 이색이 말하기를

"옛날 은나라에 3仁이 있어 나라가 망하자 비간은 죽고, 미자는 가고, 기자는 종이 되었다고 하니 우리도 각자의 의사에 따라 행동합시다" 하고 마침내 고려가 망함에 모두 망복지신의 절의를 지켜 은거하였다.



<본 홈페이지>

고려 때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였으며,

1392년 조선(朝鮮)이 건국되자 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인 충남 연기(戀岐)에서 은거했다.









▣ 여말충의열전 (1996, 고려숭의회)

義節編 學堂 ●金休 (?-?)

*방경- (1/5)선- (2/4)승용- (2/2)구- (1/2)전서공 성목- 휴



자는 연부요 호는 학당이고 成牧의 자로 안동인이다.

공은 고려말에 사간을 역임하고 <金承露 實錄>

고려가 망함에 향리에 퇴둔하여 조선조에서 여러차례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후학을 교육하면서 그 貞節을 지켰다. <대동운부군옥>

유고(遺稿)가 있다.





<연기군청 홈페이지 (http://gun.yeongi.chungnam.kr/)>

●김휴 유허비

소 재 지 :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시 대 : 고려시대

안동인으로 자는 연부 ★정몽주 선생의 문하생이며 고려 공민왕때 검역 근시라는 벼슬 자리에 올랐다.

이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를때 호군의 명을 받았으나 연로한 아버지 (고려 공조판서를 지낸바 있는 감성목)을 모시기 위하여 직을 사양하고 송도에서 여러 신하들과 통곡으로 작별하고 현재의 연기군 전의면 운주산 아래 거처할 장소를 구하여 은거하였다.

태조는 다시 가선검교 한성좌윤 이라는 벼슬을 내려 그를 불렀으나 그는 끝내 나가지 않이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더욱 닦아 후세 양성에 전력 하였으며 그의 문하생 중에서 충효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니 그의 덕망과 지조가 훌륭하다 하여 유림명인들이 유허비를 세웠는데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그가 은거하고 있던 전동면 미곡리를 그의 호를 따라 학당리라 일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학당(學堂)골 ●김휴(金休)

본(本)이 안동(安東)으로 서기 1350년(고려충정2)고향에서 출생했다.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문하생(門下生)으로 고려 공민왕땐 검교근시(檢校近侍)라는 벼슬에 있었고 고려가 실가되자 이태조 등국시 호군(護軍)에 명을 받았으나 연로하신 아버지(고려공조전서 성목:成牧)을 모 시고자 송도(松都)에서 여러 신하들과 통곡으로 작별하고 오늘의 전의(全義)운주산 아래 병 거지(屛居地)를 정하여 은거하자 태조가 하선검교 한성좌운(漢城左尹)이라는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그는 끝내 나가지 않았다.



그는 초야(草野)에 묻혀 있으면서 학문을 더욱 빛나게 닦아 그의 문하생으로 충효자를 많이 배출하였으니 그의 덕망과 지조가 훌륭하다 하여 유림명인(儒林名人)들이 유허비를 세웠고 운주산 아래서 살았으니 지금의 전동면 미곡리를 그의 호(號)를 따라 학당리(學堂里)라 일 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참고문헌 : 碑文, 族譜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윤만 작성일 : 2002/06/08 14:28 (from:61.74.254.79) 조회 : 54

시군지순례12(연기군)

연기.전성지(연기군문화공보실,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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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 111 유현(儒賢)

○김휴(金休) 안동인 전서(典書) 김성목(金成牧)의 아들이다. 호는 학당(學堂)이며

★포은 ★정몽주선생에 따랐다.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檢校)의 벼슬을지

냈고 조선조가 되어 조정에서 한성좌윤의 벼슬을 가지고 불렀지만 따르지 아니하

였다. 서울을 떠나 낙향하면서 읊은 시가 있다.











▣ 여말충의열전 (1996, 고려숭의회)

表節編 梧隱 ●金士廉 (1335-1405)

*방경- (3/5)순- (4/4)영후- (1/2)천- (2/4)안렴사공 사렴



호는 오은이니 안동인으로 부밀직사사 천의 아들이요, 좌정승 복창부원군 영후의 손자요, 이조개국 1등공신 사형의 형이며 문정공 신현의 문인이다.



젊어서 학문에 정진하여 공민왕 초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랑(정2품)을 역임하고 벼슬이 안렴사에 이르렀다. <♠경현사지>



선생은 문학과 氣節로 세상에서 推重하였으며 정★포은 이목은과 친교를 맺고 함께 직언으로 간함으로써 저명하였다. 공민왕14년 (1365) 왕이 신돈을 총애하여 직급을 올리고 공신호를 내리자 선생이 忠奮義激하여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며 이르기를 "신돈은 바른 사람이 못되며 후에 반드시 정치를 어지럽힐 것이요, 그렇게 되면 고려의 사직은 장차 血食을 얻지 못하리이다" 고 하였다. <♠대동기문>



드디어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함에 청주 오근촌으로 숨어들어가 일찍이 한양을 향하여 앉지도 아니하고 매양 "열녀는 불경이부이거늘 충신이 어찌 두 임금을 섬길 것이냐" (烈女不更二夫 忠臣豈事二君) 하였다. <♠두문동서원지>



조선조에 불복하고 오직 고려만을 사모하며 그 강개한 충성으로 의리를 같이하는 동지들과 운곡의 집으로 모여 단사에 종참하였다. 이 단사는 운곡 원천석 선생이 고려의 宗社를 잇고자 원주 치악산 정산에다 단을 만들어 단군,기자,고려태조 등 列聖과 공민왕, 여흥왕, 윤왕, 간성왕 등 變革을 당한 왕들을 비롯하여 고려조에 충성하다가 살신성인한 충신들을 매년 춘추로 제사드렸던 것이다. <♠화동인물총기>



이태조가 선생에게 좌사간을 삼아 여러차례 불렀어도 나아가지 않고 드디어 도산으로 옮겨가 더욱 문을 굳게 닫고 손님도 거절하였다.



임종이 다가옴에 여러 아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나는 고려의 옛 신하로서 이미 임금을 도와 국가를 존속시키지 못하고 나라가 망함에 또한 몸을 순국치 못한 천하의 죄인이니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 선왕을 뵈옵고 선조를 함께 하겠는가. 내가 죽으면 깊은 산중에 장사하여 봉분도 짖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이미 前朝에서 벼슬한 자는 다시 벼슬하지 말라" 고 遺戒하였으므로 그 유명을 쫒아 평장하였다. <♠고려명신전>



숙종 34년 (1708) 송천사를 세워 향사하고 뒤에 두문동서원과 경현사에 배향하였다. 뒤에 숙종은 선생의 충절을 가상하여 "一片陶山 萬古首陽"이라는 과제로서 응과생에게 과거를 보였고, 우암 송시열은 "忠昞日月 節高山岳 일편도산 만고수양" 이라 하였다. <♠세보>



문헌 : 규장각여조충렬록, 승국명류표방록, 해동충의록, 고려명신전, 두문동서원지, 경현사지, 성인록, 기우집, 김신독재집, 대동기문, 화동인물총기, 국사대사전



도 오은선생 묘소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

도 오은선생을 봉향하는 송천서원 (오창면 양지리)

도 오은선생 신도비각 (묘하)









▣ 안동김씨 대종회보 제75호 (2002년 1월호)

●書雲齋 上樑文

의왕시 廣谷에 복지를 골라 산을 깎아 터를 닦고 주초를 놓아서 천년의 숙원을 푸는 것이니 우리 문중의 宗廟(종묘)가 없음은 모든 자손의 한이었다.

우리의 선조는 신라의 왕손이며 고려국의 주초의 가문으로서 충렬공 휘方慶때에 더욱 번성하여 국운을 선도하였다.

서기 1392년 임신 7월 고려가 망하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천하의 민심이 조선왕조에 귀의하였으나

장령공 휘 (장)과 서운관정공 휘綏(수) 2대는 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셨으니 盡忠報國하는 길이 어찌 杜門洞 뿐이랴.

비록 세속이 부귀를 쫒았지만 名利를 버리고 고초를 자초하며 살신성인으로 忠과 義를 드높이시니 이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祖宗의 고고한 기상과 위대한 경륜은 후대에게 전승되어 名公巨卿과 名賢烈士가 接種不絶하니 이 모두가 선대의 德業이었다.





▣ 문화유적총람

§ 의왕 ●김수 영단(金綬靈檀)

분류번호: 437-080-272-002

주소지: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산 81

지정사항: <지정사항 없음>

시대분류: 조선 시대

관리자:

유적종류: 사묘(단)

유적내용:



김수는 안동 김씨 서운관정공파의 시조인데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서운판정공을 역임하였고, 그의 손자인 자행(自行)이 관찰사 등과 같은 관직을 역임한 공로로 조선에서 예조참의로 추증을 받았다.

그는 조선조 개창 이후, 이태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원주 지방에 은신하여 행적과 묘소를 확인할 수 없었다.

1968년 안동 김씨 종회에서 그의 영단을 만들었다. 석물로는 비석, 혼유석, 향로석, 상석이 있다.

참고문헌: 충북1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경기도, 1991, 《서울 외곽 순환 고속도로 문화 유적 지표 조사 보고서》











▣ 여말충의열전 (1996, 고려숭의회)

靖節編 自逋翁(자포옹) ●金鈿(김전) (?-?)

*방경- (3/5)순- (4/4)영후- (2/2)판삼사 장- (1/2)일, (2/2)전



호는 자포옹이니 안동인으로 판삼사 場의 아들로서 벼슬이 영동정 첨의찬성사(정2품)이다.

고려가 망함에 망복의 뜻을 굳게 지켜 큰 형님 부정 일(鎰)을 뫼시고 뜻을 같이하는 제현과 함께 서쪽 벽란진을 건너서 수양산 서쪽 삼곡리 해추 마을에 은거하여 그 절의를 지켰다.

선생이 은거하자 처음에 마을 이름을 자포동이라 하고 또 선생의 호로 삼으니 이는 세상에서 숨어살고자 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마을 뒤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있어 항상 이 산에 올라가 개성 송악산을 돌아나오는 구름을 바라보며 고국을 사모하는 슬픈 뜻을 새겨 그 봉우리를 고려봉이라 이름부치니 이는 전 임금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선생의 그 청고한 지절이 지금도 전송되고 있으며, 유허비가 있다. 뒤에 두문동 서원에 배향하였다.











▣ 디지털한국학

●김사형(金士衡)

*방경- (3/5)순- (4/4)영후- (1/2)천- (4/4)익원공 사형



고려, 조선시대[1333-1407(충혜왕2-태종7)]의 문신. 자는 평보(平甫)이고, 호는 낙포(洛圃). 시호는 익원(翼元). 본관은 안동(安東)임. 고조는 방경(方慶), 할아버지는 영후(永煦),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천(#천46)이다.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뒤에 개성윤(開城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뒤,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고, 1390년(공양왕 2)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이 되고 이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1390년 윤이(尹#이23)·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贊成事)★정몽주와 대결하고 서로 탄핵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동판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司事)로 있다가 여러 장상들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 겸 병조전서응양상장군(門下侍郎贊成事兼判尙瑞司事兼兵曹典書鷹揚上將軍)에 올랐다.



같은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의 작위와 식읍 1천호 및 식실봉(食實封)300호를 받았다.



그뒤 좌정승을 지냈고 1398년(태조 7) 제1차왕자난 때,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적장(嫡長)을 후사로 세울 것을 요청하여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1등에 책봉되었다.



1399년(정종 1)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1401년 다시 좌정승에 복직되고 이듬해 영사평부사를 지낸 다음,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국공신 중에서는 배극렴(裵克廉)다음으로 지위가 높았던 고려의 원로구신이며, 가문이 귀현(貴顯)하였고 마음이 청고하여 이성계가 아꼈다고 한다.



조준과 함께 8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정사는 모두 조준이 전단(專斷)하였고, 말을 신중히 하고 스스로 삼가며 분수를 지켜 조준의 의견에 따랐으며, 적을 가지지 않았다. 개국공신 1등에 책봉된 것은 공이 컸기 때문이 아니며, 처음에는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다고도 한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韓永愚〉









▣ 디지털한국학

●김구덕(金九德) ?∼1428(세종10)

*방경- (1/5)선- (3/4)승택- (1/2)묘- (3/3)안정공 구덕



조선의 문신.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 19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

다가 연안 부사(延安府史)·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에 올랐다.



1401년 (태종11) 딸이 태종의 명빈(明嬪)이 되자 동지총제(同知摠制) 한성 부윤(漢城府尹)·강원도 관찰사·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등을 역임.

다시 한성부 판윤으로 1414년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지돈령부사(知 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안정(安靖)이다.











▣ 안동김씨 홈페이지

●김 철(金 哲)

*방경- (4/5)윤- (2/2)영요- (1/1)행- (2/2)정의공 철



호(號)는 양파(陽坡). 고려말에 천우위대장군(千牛衛大將軍)을 지내고, 안동군(安東君)에 봉해졌으며,



1392년 조선개국(朝鮮開國)에 공을 세워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 이어 공조(工曹)·예조(禮曹)의 판서를 역임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려말 선초 시기에 두 갈래 길 중 어느 한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우리 선조님들의 상황을 종합 정리하시는 중요한 자료이십니다.

▣ 김부회 - 익원공 문정공 자손입니다. 익원공의 형님이신 안렴사공님의 깨끗한 일편단심은 역사에 가장 빛나야 할 분입니다. ★정몽주를 충신의 대표적인물로 삼은 것은 숙종때 잘못된 일이며 기회주의적 염탐에서 맞어죽은 것이 동정심을 유발했을뿐 진정한 일편단심은 오은 안렴사공이 더 높이 평가되는 부분입니다.

▣ 솔내영환 - 조선왕조에 참여냐, 불참이냐는 문제는 역사의 훗날 평가 입니다. 당시의 나라면 어찌했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화두입니다.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수고하셨습니다.

▣ 김발용 -

▣ 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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