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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캠프2003 (10-3)---수안김씨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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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7-10 04:19 조회1,9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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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캠프2003 (10-3)---수안김씨3



고려사에 기록된 金資 관련 기록을 찾아 보았습니다. 같은 시기에 활동하신 김승택, 김영후 선조님의 휘자도 볼 수 있습니다. 신돈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수안김씨로 분적한 김정, 사천김씨로 분적한 김제안 행적을 디지털한국학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김방경-1자)김선-1자)★김자-1자)김위-1자)김득남-1자)★김정

김방경-1자)김선-3자)★김승택-1자)김묘-1자)김구용, 2자)★김제안, 3자)김구덕

김방경-3자)김순-4자)★김영후

김방경-사위)★채홍철

김방경-행장跋)★안진





■《고려사》 제35권 - 세가 제35 > 충숙왕 2 >

충숙왕 임술 9년(1322)

임술 9년(1322) 봄 정월에 왕이 원나라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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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일에 밀직사 임서(任瑞)와 대호군 ★김자(金資)를 원나라에 보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고려사》 제35권 - 세가 제35 > 충숙왕 2 >

충숙왕 임신 후 원년(1332)

임신(충숙왕) 후 원년(1332)〔정월 이전의 기록은 충혜왕 2년 조에 들어 있다〕 봄 2월 갑자일에 원나라에서 유숙(留守) 보수(寶守), 전 이문 낭중(理問郞中) 장백상(蔣伯祥) 등을 우리 나라에 보내 왕에게 복위하라는 명령을 전달하였다.

왕이 ★채흥철, 임중윤을 찬성사로, 윤신걸을 평리로, ★김자(金資)와 김인윤을 밀직사로, 조유와 민상정(閔祥正)을 지밀직사로 각각 임명하고 또 장백상과 임중윤으로 하여금 정동성의 사무를 대행(攝行)하게 하였다.





■《고려사》 제35권 - 세가 제35 > 충숙왕 2 >

충숙왕 계유 후 2년(1333)

6월에 타환첩목이가 원나라 황제로 즉위하였는데 이가 순제(順帝)이다.

밀직 ★김자 등을 원나라에 보내 순제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고려사》 제36권 - 세가 제36 > 충혜왕 >

충혜왕 임신 2년(1332)

여름 4월 무오일에 왕이 삼사 우윤 ★김영후(金永煦)를 원나라에 보내 그림 부처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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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11월 -----

계유일에 두린이 황제의 명령으로 낙안군(樂安君) 김지겸과 전 첨의평리 ★김자(金資)에게 나라일을 임시로 서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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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무자일에 경화 공주의 명령으로 김지겸을 정동성 서리로, ★김자를 제조(提調) 도첨의사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고려사》 제38권 - 세가 제38 > 공민왕 1 >

공민왕 임진 원년(1352)

8월-----

기미일에 서연(書筵)을 열고 영천 부원군 이능간(李凌幹), 김해 부원군 ★이제현(李齊賢), 복창 부원군 ★김영후(金永煦), 한양 부원군 한종유(韓宗愈), 연안 부원군 인승단(印承旦), 전 첨의 정승 이군해, 정승으로 치사(致仕)한 손기(孫琦), 전 찬성사 허백(許伯)과 ★김자(金資), 안산군 ★안진(安震), 정천군 정을보(鄭乙輔), 영창군 ★김승택(金承澤), 영산군 장항(張沆), 낙 낭군 이천선(李遷善), 밀직부사 ★안목(安牧), 전리 판서 ★백문보(白文寶) 등이 날을 바꾸어 시독(侍讀)하게 하고,

또 교서를 내리기를

“원로와 대신과 사대부들이 교대로 들어와서 경서와 사기 그리고 예법에 관한 말(法言)들을 강의하며 권세 있는 집안에서 토지와 가옥 및 노비를 강탈하여 여러 해 동안 송사하고 있는 사건들과 무고한 죄로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는 사건들을 판결하여 처리하라!

첨의사와 감찰사는 나의 귀와 눈이다. 현행 정치의 옳고 그릇됨과 민간의 이해 관계에 대하여 기탄없이 바로 말하라!”고 하였다.





■《고려사》 제89권 - 열전 제2 > 후비 2 >

경화 공주

공주는 찬성사(贊成事) 정천기(鄭天起)를 정동성(征東省)에 감금하고 이어 김지겸(金之謙)에게 정동성을 임시로 대리하게 하고 ★김자(金資)를 제조(提調) 도첨의 사사(都僉議司使)로 임명하였다. 공주는 충혜왕 5년(1344)에 죽었는데 예절을 갖추어 장례 지냈다.





■《고려사》 제121권 - 열전 제34 > 효우 >

황수

황수의 집안은 대대로 평양부에서 살았으며 충숙왕 때에 평양부의 잡재서 승(雜材署丞)으로 되었다. 그의 부모는 나이 모두 70이 넘었었다. 동생 황현(黃賢), 황중련(仲連), 황계련(季連)과 또 자매도 둘이 있었다. 모두 다 한 가맛밥을 먹고 사는데 하루 세 때 맛있는 반찬을 장만하여 먼저 부모에게 드리고 물러 나와서 같이 먹었다. 20여 년을 이렇게 하니 그 자손들도 이것이 습관되어 조금도 해이하는 일이 없었다.

찬성(贊成) 강융(姜融)과 판 밀직(判密直) ★김자(金資)가 친히 그 가정을 방문한즉 그의 부모가 모두 백발 노인인데 영접하려 마당까지 나오는 것을 만류하여 앉혔다. 강융이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기를

“지금 세상에 사대부간에도 효자가 드문데 이 성 안에 이 같은 효자 가문이 있을 줄이야 어찌 생각하였겠는가?”라고 하고 부중 사람더러 글을 지어 왕에게 보고케 하였다. 그 마을 입구에 정문이 높이 일떠섰다.







■ 디지털한국학



★김자(金資){1}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권신.

1322년(충숙왕 9) 정월 밀직사(密直使) 임서(任瑞)와 함께 대호군(大護軍)으로 성절부사(聖節副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332년(충숙왕 복위 1)에 밀직사가 되었다.

이듬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순제(順帝)의 즉위를 하례하였다.

1339년 조적(曺#적42)의 난으로 충혜왕이 원나라에 불려가자 국정이 공백상태에 이르렀는데, 이때 순제에 의하여 김지겸(金之謙)과 함께 첨의평리(僉議評理)로서 임시로 나라 일을 맡게 되고, 이어 경화공주(慶華公主:충숙왕비)에 의해 제조도첨의사사(提調都僉議司事)에 임명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羅恪淳〉





★김정(金精){3}

?∼1368(공민왕 17). 고려 말기의 문신. 좌부대언(左副代言)·좌대언(左代言)·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365년(공민왕 14)에 황원군(黃原君) 최백(崔伯)과 함께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68년 김흥조(金興祖)·조사공(趙思恭)·유사의(兪思義)·★김제안(金齊顔)·김구보(金龜寶)·이원림(李元林)·윤희종(尹希宗)·조린(趙璘)·김광재(金光載) 등과 함께 ★신돈(辛旽)을 죽일 것을 모의하였는데, 조사공이 이 사실을 자기와 평소 친히 지내고 있던 홍주목사(洪州牧使) 정운(鄭#운16)에게 말하자, 정운은 밀직제학(密直提學) 한천(韓#천46)과 더불어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 이춘부(李春富)에게 밀고하였으며, 이춘부가 궁궐에 들어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왕명으로 순군옥(巡軍獄)에 갇힌 뒤 유배되었고, 신돈에 의하여 일당과 더불어 죽음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李相瑄〉





★김제안(金齊顔)

?∼1368(공민왕 17).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중현(仲顯).

방경(方慶)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상락군(上洛君) 묘(昴)이며, 성균직강(成均直講)을 지낸 구용(九容)의 아우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이존오(李存吾)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1364년(공민왕 13)에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는데 한휘(韓暉)와 이구수(李龜壽)가 변공(邊功)으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발탁되어 기밀을 마음대로 하고 총행이 지나치므로 고신(告身:辭令書)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 일로 두 사람이 참소하여 하옥되려다가 밀직부사 김달상(金達祥) 등이 간관을 하옥하면 훗날 모든 허물이 왕에게 돌아갈 것이며, 고신에 서명하지 않은 것이 죄가 될 것이 없다고 만류하여 모면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으므로 왕이 강제로 고신에 서명하게 한 뒤 파면하였다.

★공민왕이 반원개혁정치(反元改革政治)를 하고자 하여, 1366년 ★하남왕(河南王)에게 ★전녹생(田祿生)을 사신으로 보낼 때 군부좌랑(軍簿佐郎)으로 서장관이 되어 수행하였다. 연경에 이르렀을 때 하남왕과의 수교를 싫어한 원나라의 태자가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전녹생을 되돌려보낸 후 병을 핑계로 연경에 머물고 있다가 틈을 보아 홀로 하남에 가서 국서를 전달하였다. 이 공으로 하남왕의 상주에 의하여 중서병부낭중 첨서하남강북등처행추밀원사(中書兵部郎中簽書河南江北等處行樞密院事)가 되었다. 이어 하남왕의 보빙사(報聘使) ★곽영석(郭永錫)과 함께 돌아오자 공민왕은 그 노고를 치하하여 대언에 임명하려 하였으나, ★신돈(辛旽)이 자기를 찾아오지 않음을 불쾌히 여겨 반대한 까닭에 내서사인이 되었고, 이어서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 좌천되었다.

그뒤 전 밀직부사 ★김정(金精) 등과 더불어 신돈을 죽이려고 모의하다가 전 홍주목사 정휘(鄭暉)의 고발로 인하여 기밀이 누설되어 왕명으로 순군옥(巡軍獄)에 갇히어 국문을 받고 귀양가던 도중에 신돈이 보낸 사람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林英正〉





★신돈(辛旽)

시대 고려

생몰년 ?-1371(공민왕20)

본관 영산(靈山)

자 요공(耀空)

호 청한거사(淸閑居士)

시호

활동분야 승려

다른 이름 편조(遍照)



1. 가계

아버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고 영산에 무덤이 있었다는 것만이 확인될 뿐이며, 어머니는 계성현(桂城縣) 옥천사(玉川寺)의 비(婢)였다. 어려서 승려가 되었지만 모계 때문에 신분적으로 천한 위치에 있어 주위의 용납을 받지 못하고 늘 산방(山房)에 거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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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돈의 제거

신돈의 등용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많은 물의가 있었다. 일찍이 ★이제현(李齊賢)이 신돈의 골상(骨相)은 옛날 흉인(凶人)의 것과 같아 후환을 끼칠 것이라 하여 왕에게 가까이하지 말 것을 요청한 바 있었으며, 1366년에 간관 ★정추(鄭樞)와 ★이존오(李存吾) 등이 탄핵을 하다가 도리어 폄축(貶逐)을 당하기도 하였다.

1367년 10월에는 ★오인택(吳仁澤)·★경천흥(慶千興)·★김원명 등이 제거하려고 밀의(密議)하다가 발각되어 장류를 당하였으며, 1368년 10월에도 ★김정(金精)·★김흥조(金興祖)·★김제안(金齊顔) 등이 그를 죽일 것을 모의하다가 계획이 누설되어 장류되던 도중에 살해를 당하였다.

한편, 기거하던 기현(奇顯)의 집에서 독립한 1367년부터는 처첩을 거느리고 아이를 낳고 주색에 빠져 비난이 높아졌다. 이러한 가운데 1369년 스스로 5도(道)의 도사심관(都事審官)이 되려고 사심관을 부활시키려다가 좌절되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세력기반을 확립시키려고 시도하였던 일로 보여진다.

1370년 10월, 그동안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공민왕이 친정(親政)할 뜻을 밝혔고, 1371년 7월 마침내 역모를 꾀한다는 혐의로 붙잡혀 수원에 유배되었다가 일당 기현·이춘부(李春富)·이운목(李云牧) 등과 함께 복주(伏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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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辛旽考(姜裕文, 佛敎 6·7·9·10·11, 1938)

辛旽(閔丙河, 人物韓國史Ⅱ, 1965)

恭愍王(金哲埈, 韓國의 人間像 1, 新丘文化社, 1965)

辛旽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閔賢九, 歷史學報 38·40, 1968). 〈閔賢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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