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현리-고락리-내판리 익원공파 세거지---03金在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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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7-14 20:19 조회2,332회 댓글0건본문
궁현리-고락리-내판리 익원공파 세거지---03金在衡
■ 청원군지 (1990.12)
28) 金在衡 (1890-1966)
독립운동가 김재형은 본관은 안동. 자는 舜玉. 호는 費隱. 고종27년 (1890)에 청원군 강내면 궁현리에서 金元默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매일신보의 판매업에 종사하고 있던 그는 기독교인이면서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배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하여
金在石, 조동식 등으로 하여금 독립선언서 500여장을 문의, 미원 등지에 배부케 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혐의로 고등법원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출옥 후인 1922년 청원군 강내면 다락리의 이석영, 전병수 등과 합자하여 정명학숙을 설립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1966년 사망하였다.
묘소는 청원군 강내면 궁현리에 있으며, 1983년 국가보훈처에서 묘비를 세웠고, 정부는 197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문헌 : 인물지
■ 청원의인풍 (1991.2., 청주문화원)
6) 金在衡 紀蹟碑
-고조桓(불화변) - 증조 胤正 - 조 大欽 - 고 元默
독립유공자 김재형(1890-1966)의 기적비는 1984년 청원군 강내면 궁현리에 세웠으며 비문은 청주대학교 총장 金明會가 짓고 글씨는 趙壽衡이 썼다.
■ 충청북도 공훈록 (2001.11, 광복회 충청북도지부)
p146
김재형(김在衡) 1890.1.8-1966.5.30
충청북도 청원사람으로 기독교인이다. 당시 매일신보 판매업을 하고 있었으며, 1919년 3월 1일 國葬에 참례키 위해 상경했을 때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는 것을 직접 보고, 귀향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귀가후 은밀하게 거사 시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강내면에서 매일 산 위에서 봉화를 올리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어 거사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서울의 박동완 민족대표로부터 수령하여 감추어 두었던 독립선언문 5백여매 중 연기군 조치원에 사는 김在石에게 3백5십여 매를 주어, 문의면 미원면 보은읍 등지에 나누어 주게 하였다. 또 나머지 백5십매는 5십매씩 봉투에 넣어 강내면에 살고 있는 조동식 김鳳會 박준평 등에게 각각 나누어 주어 각지에 배부케 함으로써, 인근 주민의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7일 고등법원에서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2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70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82, 112면, 8권 570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159,116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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