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현리-고락리-내판리 익원공파 세거지---05[낙포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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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7-14 20:21 조회1,567회 댓글0건본문
궁현리-고락리-내판리 익원공파 세거지---05[낙포세적]
■ 낙포세적 (2002.9, 안동김씨 익원공파종회)
P26
효자 三省공 김煊
공의 호는 삼성이고 효소공 13세손이며 심숭주의 차남. 청주 궁현에서 출생. 공은 천성이 온후 인자하여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교훈에 어긋나는 일이 없고 효성이 지극하여 하루의 식사를 부모님이 먼저 드신 후에야 하였다 한다. 이웃사람들은 반드시 대효를 이룰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급기야 장성함에 부모님의 구미에 맞는 식찬으로 성의를 다해 공양하였다 한다. 어느해 모친께서 병환이 나셔서 눕게 되시자 병간호에 정성을 다했으나 병세는 차도가 없이 위독하여 백약이 무효함을 아시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서 모친의 입에 넘겨 드렸더니 마침내 회생하였으나 그후 만 하루만에 돌아가시니 슬퍼함이 보는 이 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3년상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성묘를 매일 3년동안 빠짐없이 하셨다. 지방 사림에서 효행을 조정에 추천하여 순조 그해 효자정려를 명하였고 지방 사림들이 1958년 10월에 효자비를 세웠다.
P29
절효부 한양조씨
부인은 효소공 18세손인 김진회의 재취부인이다. 한양조씨 명문의 집안에서 태어나 덕망이 높으신 부모님의 슬하에서 부모에 대한 훌륭한 교훈을 받고 안동김씨 집안에 출가해 왔다. 어려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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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천의 효부요 절부로서 이러한 사실이 청원군에서 널리 알려지자 방방곡곡마다 칭송이 자자하여 이에 청주향교(전교 이형복)가 1981년 2월에 표창하였다.
P33
義巖 참판공 김基正
슬픈노래 서리발 쌓인 언덕을 감도나니
옛날 임진년에 왜구 풍우같이 날뛰었네
외로운 여인 푸른 물에 빠지기로 맹세하였는데
오랑캐 괴수 맹랑하게 즐기며 고운여인 소홀히 보았네
옛비석엔 이끼 끼어도 이름은 오래오래 전할 것이니
한송이 꽃은 차가운 강물에 뜨고 백골은 또한 향기로워라
만약 아름다운 여인이 남자가 되었더라면
진주땅에 죽지 않고 수양에서 죽었으리
P36
15. 익원공 김사형 파종회 연혁
조선중엽---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고 익원공의 묘소가 있는 양평지방에 도적이 창궐하다. 이로 인하여 자손들이 묘소를 성찰하지 못한 관계로 상당기간 실전.
1770년 (밀직사사공 설단)---효소공 17세손인 참판공 김기정(김재경) 주창. 양주 팔야리 효소공 묘소 우측 상단에 밀직사사공 김승의 단을 모아 세일 향사.
1790년---참판공 김기정께서 한성부윤 재임시 관군을 이끌고 도적과 싸워 익원공 묘소를 찾았다. 효소공 11세손 김태화, 김유집에게 묘소를 개봉축하고 위토를 마련토록 당부.
1872년 (부조묘 이전)---전남 영암에 익원공의 사당인 부조묘를 충북 청원군 강내면 용실동으로 이전. 1870-1872년 8월에 영정은 처음 황해도 평산엽동에 봉안, 그후 영암 이전까지는 사실기록이 없어 알수 없다.
1883년 (1회파보)---최초 계미파보 발간. 주창자 김기유, 간사 김수홍, 김광훈, 김면수, 김양대(도산) 중수기는 덕은 송근수가 쓰다.
1898년---2월한식 익원공 묘소 사초, 주간 청주 김기문
1900년 (2회파보)---2회 경자파보 발간, 종손 김영필, 김영시, 김영상, 김지묵이 주간, 서문은 방손 김성호가 쓰고 발문은 김영필이 쓰다.
익원공 부조묘를 용실동에서 강내면 궁현리로 이건. 주창자 김영필 간사 김태로, 김윤원, 김민상, 김재경, 이건기는 행주 기우만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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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부조묘 이관)---익원공 부조묘를 궁현리에서 부여읍 저석리 석탄 이전. 신주 익원공 김사형 회맹철권 보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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