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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렴사공파 ⑩ (괴산군,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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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10-26 17:08 조회2,0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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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렴사공파 ⑩ (괴산군,증평)



[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증평의 문화재] 등 충북 괴산군,증평읍 지역 향토자료에 게재되어 있는 안렴사공 김사렴의 후손과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1982>

▣ 부지런하고 부모에 효성이 지극한 김만협(金萬協)

▣ 석달동안 산제 올려 노모 병을 고친 효자 김일(金溢)

▣ 경모재(敬慕齋) (1660 조선조 현종)

▣ 김의로(金義路) (1764-1848)

▣ 안동김씨사 (安東金氏祠)

▣ 김환극(金煥極)의 효행

▣ 김호구(金好九)

▣ 한사정(閑士亭)











▣ 부지런하고 부모에 효성이 지극한 김만협(金萬協)



<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1982>



괴산읍에서 남쪽으로 미원행 도로를 따라 5km가면 문광국민학교가 있고 문광국민학교를 지나 약 200m 좌측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정려가 있다.



이 정려는 고려말의 두문동72현의 한 사람인 안렴사 오은 김사렴의 10대손 金天海의 아들 萬協의 것이다.



1640년에 출생하여 남달리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여 그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로서 1692년(숙종18) 3월 8일 문중에서 상의하여 세우게 되었다.



공은 자녀를 2남 5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은 남다른 효자였다. 독신 효자는 없다는 말도 있지만 金萬協이 효자로 교지를 받기까지는 아우되는 萬전의 뒷받침이 컸다. 아우 만전은 부지런히 일을 하여 가계를 구기지 않게 뒷받침하였고 형 만협은 어버이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극진히 보살펴 드렸다고 한다.



만협은 순창조씨와 혼인하여 아내를 삼았는데 부인 조씨의 부친은 공조좌랑에 오른 덕망높은 분이었고, 그의 증조부는 사과 벼슬에 오른 이였다.



정부인 순창조씨는 일찍이 세상을 떠나고 후처로 전의이씨를 맞아들였다.



만협은 조봉대부 동몽교관의 벼슬에 올라 나라일을 보살피는 한편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부친이 나이가 들어 병석에 눕게 되었다. 평소에도 효성이 지극한 그는 효성을 다하여 동분서주하여 온갖 약을 구하여 써 보았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만협은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부친의 입에 넣어드렸다. 천우신조하여 효성이 지극한 탓인지 5일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부친상을 당하여 묘소를 20리 떨어진 괴산읍 질골에 정하고 예법에 따라 3년간 복상 동안은 한서풍우를 불문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묘하였으며, 식생활에 있어서도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음식을 피하기 위하여 3년간은 밥을 먹지 않고 죽을 먹으며 복상기간을 마쳤다고 한다.



3년간 성묘 다니는 동안 하루는 묘소 근방의 산에 불이 났다. 산불은 부친의 묘소에까지 번져왔다. 너무나 놀란 만협은 옷을 벗어 물을 적셔서 있는 힘을 다하여 불을 껐다.



그후 만협은 화상과 화기를 마시고 병을 얻게 되어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1693년에 세상을 떠났다.



(효행 사실은 정려 및 안동김씨 가보에 기록되어 있다.)







<괴산의 문화재>



안동김씨 효자각

소재지 : 괴산군 문광면 신기리



이 정려각은 효자 金萬協 (1640-1693)의 정려로 숙종18년 (1692)에 세운 것인데, 1985년 효자 金溢(1719-?) 의 정려를 합설하였다.



김만협의 자는 世珍, 본관은 안동이며 金天海의 아들이다. 부친의 임종이 가까우매 단지주혈하여 5일을 더 연명하였다. 3년 복상동안 20리길을 매일 성묘하였으며 성묘중 산에 불이 일어나 묘소에 가까워지자 옷을 벗어 물을 적시어 불을 껐다. 이 일로 화상과 화기를 마셔 세상을 떠났다.



김일의 자는 益三, 김만협의 5세손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극진하였다. 모친의 병이 깊었을 때 지성을 다하여 치료하였으며 천수를 다하매 10리 밖에 장사하고 궤연에서 잠을 자며 3년을 하루같이 시묘하였다.



정려각 안에는

孝子 贈朝奉大夫 童蒙敎官 金萬協之文

孝子 贈嘉善大夫 通德郞 金溢之文

이라 쓴 편액 2점과 김만협의 행적을 적은 孝子金公行錄, 김일의 효행을 기록한 金溢孝行錄이 판각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2칸, 측면1칸의 목조와가로 보호철책을 둘렀다.











▣ 석달동안 산제 올려 노모 병을 고친 효자 김일(金溢)



<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1982>



자는 益三, 본은 안동김씨 가문의 조상인 효자 金萬協의 5대손으로 세습적으로 효도에 성실한 가문에서 1719년(숙종45)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부모님 곁을 지키어 아침 저녁으로 잠자리를 살펴 문안드리며 부모가 병환이 있으면 걱정이 되어 나의 몸을 사치할 수 있겠느냐 하며 머리를 빗는 일도 없이 스스로 약을 다려 드렸다고 한다.



모친이 13년이란 오랜 병환으로 신음하는데 어떤 약이든간 써보지 아니한 약이 없었다. 백약이 무효하여 마지막 수단으로 산제를 지내게 되는데 목욕을 깨끗이 하고 밤중에 10리 길이나 되는 험한 고개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눈바람을 맞아가며 어느 곳에서 나타날지도 모르는 범을 두려워하지 않고 험한 고개를 넘어가서 3개월동안 기도를 드렸더니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모친의 병환이 나았다고 한다.



가세는 청빈하여 외로운 편모에게 봉양할 기름진 음식을 대접할 형편이 못되어 동네에 제사집이 있으면 언제나 빠지지 않고 찬잔술과 한조각의 음식을 얻어다가 공양했다고 하며 허리에는 항상 음식을 얻어담을 주머니를 차고 다니었으며 옷도 깨끗이 입지 못하고 옷소매는 기름때에 절어 있었다고 한다.



김일은 평소에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를 보러 서울에 가 수일간 머무르게 되어 내일이면 과거를 보러 시험장에 들어가게 되는 날인데 그날 아침에 일어나 고향집으로 돌아가려고 몸차림을 하는데 같이 온 친구들이 깜짝놀라 물어보니 효자 김일은 대답하기를



"어제밤 꿈에 늙으신 어머니가 나를 부르시니 반드시 병환으로 편찮으신 모양이다. 내 어찌 과거를 보기 위하여 잠시나마 머무를 수 있겠느냐" 하고 황급히 돌아와 보니 과연 늙은 모친이 병들어 누워 계셨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노모가 살만큼 살아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나니 10리밖에 묘를 쓰고 밤에는 궤연(망인의 신주를 모신 곳) 옆에서 자고 낮에는 무덤앞에 주과를 진설해 놓고 곡하기를 복상 3년동안을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 경모재(敬慕齋) (1660 조선조 현종)



<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1982>



위치 : 괴산군 증평읍 남하리1구

소유 : 안동김씨 종중

수량 : 1동

재료 : 목조

시대 : 1660년 조선현종때 창건



증평읍에서 율리행 도로로 약 4km 지점 남하리1구 양지촌에서 삼보산을 향하여 약 500m 올라간 서당말이라는 마을이 있다.



약 320년전에 건립하였다고 하는 옛날 기와집으로서 안동김씨 재실이라 칭하나 전에는 이곳에 살고 ldT는 안동김씨 문중의 서당으로 쓰였다 하여 부락 이름이 서당말이라 하는 것도 이 건물 때문이라 한다.



이 건물은 안동김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나 서당으로 사용되지는 않고 1년에 자손들이 모여서 조상의 제사를 올리고 종중 회의장소로 이용하며 묘소와 산을 관리하는 관리인이 살고 있다.



이곳이 서당으로 사용시 안동김씨 중에 두 형제가 경모재에서 공부를 하는데 어느 늦은 가을에 스님 한분이 와서 하룻밤 자고 가자고 청하였다. 이를 허락하여 쉬는데 때마침 스님이 병이 나서 앓고 있으므로 형제는 밥을 지어 해 주고 약을 구하여 치료를 하는 등 온갖 정성을 드린 결과 이듬해 봄에 소생한 스님이 하는 말이



"두 분의 은혜가 큰데 이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승이 약간의 지리를 아오니 두분의 뫼자리를 알려드릴까 하오니 허락해 달라고 하여 승낙을 하자 이어 스님은 두분의 소원을 물으니 형은 자손이 많기를 원하고, 동생은 부자되기를 원하니 스님이 원대로 해주겠다며 묘자리를 잡아 주었는데 스님 말대로 형은 7형제를 두고 아우는 3형제를 두었다.



지금도 형의 자손은 많고 아우의 자손은 적은 반면 부자가 많아 현재에도 형제의 자손이 수백호 살고 있다.











▣ 김의로(金義路) (1764-1848)



<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1982>



자는 正甫(정보), 본관은 안동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지극하며 학문을 좋아해서 문장이 높고 행실이 바르고 높을뿐만 아니라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계모를 섬김에 친 어머님과 다름없이 효성으로 받드니 계모 또한 자기가 낳은 자식과 다름없이 사랑하였다.



그러다가 아버지상을 당하여 예에 따라 극진히 장례를 모신후 계모께서 돌아가시게 되자 얼굴색이 변하도록 슬퍼하면서 3년간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살며 애통함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자녀들의 교육은 忠 孝 列을 근본으로 자기 스스로가 먼저 모범을 보여 순박하고 참되며 범도있는 가풍을 이룩해서 장자도 효자, 딸도 효녀로 남양홍씨 가문에 출가하였으나 남편이 바로 죽음으로 절개를 지켜 열녀가 되었다.



이렇게 모범적인 가정을 이루어 효자 열녀가 나오므로 지방의 선비들이 그의 행적을 추천하니 나라에서는 1887년에 증직으로 가선대부 호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를 제수받았으며, 묘소는 괴산군 증평읍 남하리에 있고, 묘 옆에 신도비가 있다.











▣ 안동김씨사 (安東金氏祠)



<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1982>



위치 : 괴산군 증평읍 남하리1구

소유: 사유 (안동김씨 종중)

수량 : 1동

규모 : 건평 34평, 맛배집

재료 : 목조

시대 : 1805년 (조선순조 5년)



증평읍에서 율리행 도로로 약 4km 떨어진 남하리1구 양지촌에 있다.

이 근방에 대대로 내려오는 안동김씨가 살고 있는데 그의 선조중 金聲武(김성무), 金宏(김굉), 金羲錫(김희석), 金汝龜(김여귀), 金義路(김의로)의 다섯분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1805년 (순조5) 후손들이 건립하였는데 여러대가 거듭됨에 따라 위로부터 4위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현재는 호조참판을 지낸 김의로 위패만 모시고 그분의 효성심과 가정의 화목함을 본받고져 자손들이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 안동김씨사 (安東金氏사)



<증평의 문화재, 1999>



소재지 : 증평읍 남하1리 (양지말)

규모 : 정면 4칸, 측면 2칸

건립시기 : 1805년



증평읍 남하1리 양지말 마을에 있는 안동김씨사는 1805년(조선 순조5) 김성무(金聲武), 김굉(金宏), 김희석(金羲錫), 김여귀(金汝龜), 김의로(金義路) 다섯 명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건립됐다.



이후 위로부터 4위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호조참판을 지낸 김의로 위패만 모시고 있다.



사당의 형태라기 보다는 일반 목조기와집 양식을 하고 있다.











▣ 김환극(金煥極)의 효행



<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1982>



괴산군 증평읍 남하리에서 출생한 김환극은 본관이 안동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의 마음을 항상 기쁘게 해드리며 겨울에는 저녁에 이부자리를 펴놓고 들어가 따뜻하게 하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부모님의 의복을 입어 체온으로 따뜻하게 하는 등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더니



부모님께서 병환으로 눕게되자 변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아 병증세를 파악하고 백방으로 약을 구해 썼으나 별로 효험이 없자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하루도 빠짐없이 얼음으로 목욕하고 하늘에 기도드렸으나 급기야 상을 당하니 지극히 애통하였다.



장례후 3년간 시묘하였는데 사후에 가선대부 호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의 증직을 받았다.







▣ 김환극부부 효비각 (金煥極夫婦 孝碑閣)



<증평의 문화재, 1999>



소재지 : 증평읍 용강3리 (용문리)

규모 : 정면 1칸, 측면 1칸

건립시기 : 1926년



1972년 증평읍 남하1리 솔모루 마을에 효심이 지극한 김환극 (안동김씨)과 그의 처 광산김씨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비각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맛배지붕 목조기와집이며 효비각 안에 있는 효비의 비문은 1958년에 성균관장 최찬익(崔燦翊)이 짓고 글씨는 괴산군수 이길원(李吉遠)이 썼다.











▣ 김호구 (金好九)



<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1982>



본관은 안동, 괴산군 증평읍 죽리에서 태어난 효자이다.



부모님을 봉양함에 효성이 지극하여 아침 저녁으로 밥을 떠넣어 드렸으며 때때로 맛있는 음식을 손수 만들어 드렸다.



한번은 과거시험 볼 날이 박두하여 시험준비를 하고 서울로 올라가던 중 아버지 병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잡초중에 선뜻 醫劑(의제)라 써 붙인 풀이 있어 뜯어가지고 집에 돌아와 행여나 하고 다려 드렸더니 씻은 듯이 나았다.



그후 얼마지나 또다시 병이 깊게 들었는데 물고기가 좋다하여 연못에 낚시를 담그고 앉아 있으니 갑자기 한 마리의 큰 뱀이 입에 무성를 물고 물위로 올라와 앉은 자리 옆에 놓고 가거늘 이상히 여겨 그 물건을 다려 드렸더니 병이 나았다.



또다시 몇 년이 지나 노환으로 병이 심하여 변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아 병증세를 알아보며 백방으로 약을 구해 썼으나 늙어서 일어난 병이라 효과가 없이 더욱 병환이 깊어 사경에 이르르니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입에 넣어 드렸으나 수명을 다하여 돌아가심에 3년동안 묘 옆에 묘막을 짓고 외부사람과의 접촉을 금하며 먹을 것 입을 것 심지어는 머리도 빗지 않고 고생을 하면서 애통해 하였다.











▣ 한사정 (閑士亭)



<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1982>



위치 : 괴산군 증평읍 죽리

소유 : 사유

수량 : 1동

규모 : 정면2칸 팔작집

재료 : 목조

시대 : 1965년



증평읍에서 청안행 도로를 따라가다 삼거리에서 동쪽 율리행 도로를 따라가면 죽리 원평부락뒤 삼보산 기슭에 있다.



학식이 높은 선비 儉竹(검죽) 선생의 공덕을 추모하는 뜻으로 그 후손과 제자 중 김동휘, 김은수 등이 협력하여 1965년에 건립하였다.



검죽 金好奭(김호석)은 안동김씨로 구한말 증평읍에서 태어나 학식과 덕망이 높아 이 지방의 고결한 선비로서 존경을 받았다. 공은 세상에서 명예와 부귀는 뜬구름과 같이 여겨 오직 학업을 연마하고 인격을 도야함에 힘씀으로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380여명에 달하였다.



현 토정의 건물은 목조 기와집으로 정면2간, 측면2간의 팔작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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