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렴사공파(사렴) 소개자료 17---논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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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8-28 03:25 조회1,960회 댓글0건본문
♣♣♣11 논산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2자 현령공 휘土+遲
께서 문의현령으로 그 4자 군자감정공 휘公衍(공연)의 장자 참의공 휘繼賢(계현), 4자 사마공 휘洛瑞(낙서) 2자 민숙공 휘王+言(언) 후손으로 論山派(논산파)라 한다.
○생원진사 급제 7명(낙서, 욱, 언, 세보, 세필, 두수, 세익), 문과급제 3명(욱, 언, 세익), 무과급제 2명(세영, 석형)이 있으며, 낙서는 율곡에게 사사하였다. 언은 민숙공에 시호되었으며, 세익은 충렬사 제문(강화도, 김상용 제향)이 전한다.
○<김언 정려문>은 1661년 홍명구의 아들 중보의 주선으로 세웠다가, 허적이 정표 환수하였다가, 세보등 3형제 상소로 다시 좌찬성 추증하였다. <김언 묘갈>은 송시열 찬, 김진상 서, 김진규 두전으로 세웠으며, (김진상은 김언의 사위 김익훈의 손자임) <김언 행장>은 김세보 찬이다. <성천부 관기 금옥 정절묘각과 정문>이 성천에 있다고 전하고, <김언과 금옥의 사당>도 성천에 있다고 전한다.
○致翕(치흡)은 군수 통정 동중추를, 載鉉(재현)은 호拙窩(졸와)이고 아들 宗濩(종호)는 음사 도사 지부령을 지냈고, 龍澤은 호松隱이며, 泰錫(泰植)1936-은 연기군장학재단이사장을 지냈다. 주요 세거지는 전주, 익산, 김제, 공주, 청양, 서산, 아산 등에 널리 세거하고 있다.
55) 김낙서(金洛瑞, 1553-1623)
공은 진사 하서의 아우인데, 율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조때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특별히 재랑(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아들 진과 언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자손의 귀함으로 인하여 승지에 추증되었다. <오창지>
56) 김욱(金頊, 1583- ? )
공은 충신인 민숙공 언의 형이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지평에 이르렀다. <오창지>
김욱(金頊)은 김낙서(金洛瑞)의 아들로 1583년 계미(癸未)에 태어났다. 자는 여신(汝信)이고, 제 김언이며, 청주(淸州)에 거주하였다. 1603(선조36) 성균관(成均館), 태평관(太平館)에서 식년(式年) 진사(進士)급제하고, 이때 시험관은 ★김수(金) 중추부행지사(中樞府行知事) 등이었으며, 161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57) 김언(金王+言, 1588-1637)
김언은 김낙서(金洛瑞)의 아들로, 1589년 기축에 태어났으며, 자(字) 여윤(汝潤)이고, 형(兄) 김욱(金頊) 외조부(外祖父) 이희담(李希聃) 부(妻父) 이선립(李先立)이며, 1609년 기유 생원시 급제하고, 1615년(광해7) 식년시(式年試) 병과6(丙科6)에 급제하였다.
■ 민숙공(김언) 약력
○1588(선조21)-1636(인조14). 조선 인조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은 汝潤(여윤). 공은 안렴사의 10세손이고 아버지는 진사 洛瑞(낙서)이다.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에서 태어났다.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609년(광해군1) 진사가 되고 161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된뒤 폐모론에 가담하지 않아 7,8년뒤 겨우 봉상시주부에 머물렀다.
○인조반정후 부안현감, 예조정랑, 병조정랑, 성균관사예, 예빈시정. 장악원정 등을 역임하고 1628년(인조6)에 영천군수를 거쳐 성천부사가 되었다.
○金世達(1625-1674)은 자는 士章, 본관은 안동으로 고려충신 안렴사 김사렴의 11세손이며 괴산군 청천면 무능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그의 재종숙인 성천부사 ★김언의 임소책방에서 글을 배우고 있었다. <괴산군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성천부사로서 흩어진 관병을 정렬하여 관찰사 홍명구에게 예속시키고 의병을 모집하여 적의 진로를 막고 항거하다가 전사하였다.
○그뒤 홍명구의 아들 중보의 주선으로 조정에서는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정려문을 세웠다. 그러나 현종때 허적이 성천부사를 지낼 때 그의 행적이 모호하다고 하여 旌表를 환수하였다. 1680년(숙종6)에 허적이 처형된뒤 아들 世輔등 삼형제의 상소로 다시 정표문제가 제기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愍肅(민숙)이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 현종실록 숙종실록 국조인물고 국조방목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묘갈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짓고 학사 김공 鎭商이 썼으며 죽천 김공 鎭圭가 두전을 하였다. <오창지>
○현종2년(1661)에 정문이 세워졌다. 묘소는 청원군 오창면 복현리에 있으며 송시열이 지은 묘갈이 있다. 문헌 : 청주시지 <청원군지>
작성자 :김윤식 작성일 : 2004/05/19 00:31 (from:218.238.124.188) 조회 : 48
국역 국조인물고_김언(金琂)
묘갈명(墓碣銘)
송시열(宋時烈) 지음
숭정(崇禎 명 의종의 연호) 9년인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오랑캐 군사(청나라 군사)가 가득하게 퍼져 들어왔는데, 이때 성천 부사(成川府使) 김언(金琂) 여윤[汝潤 김언의 자(字)] 공이 즉시 관병(官兵)을 단속하여 이끌고 자모산성(慈母山城)으로 달려가서 전부 감사(監司) 홍명구(洪命耈) 공에게 예속시킨 다음 돌아와서 곧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적(敵)의 침범하는 자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당시에 호란(胡亂)이 갑작스레 일어나서 인심이 흐트러져 수습할 길이 없자, 공이 눈물을 뿌리며 군중들에게 맹세하여 ‘군장(軍長)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격동시켰는데, 얼마 안 되어 적병이 크게 닥치므로, 공이 또 군중들에게 유시하기를, “적이 찾는 것은 <부사(府使)인> 나이니, 나는 의리에 있어 당연히 죽을 힘을 다하다가 목숨을 바치겠지만, 너희들은 모두 돌아들 가도록 하라. 헛되이 죽어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니, 군중이 모두 공을 위해 감읍(感泣)하였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공을 업고 달아나겠다고 청하였으나 공은 굳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적이 과연 공을 찾아서 칼을 들이대며 공에게 항복하라고 위협하기에 이르렀는데, 공은 적을 크게 꾸짖고 끝내 굴복하지 않다가 드디어 살해를 당하였으니, 때는 숭정 10년인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 정월 초5일이었다.
처음에 공이 가속(家屬)들에게 병란을 피하도록 지시해 보낼 때 여러 아들이 모두 어렸는데, 사위인 지금 광남(光南 김익훈의 호)군 김익훈(金益勳)이 막 장가가서 있던 터라 공에게 이르기를, “적봉(敵鋒)을 당할 수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가속들과 더불어 산곡(山谷)에 들어가 많은 집안 식구들을 보호할 계획을 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죽기를 스스로 맹세하였으니, 온전한 몸으로 처자(妻子)를 보호할 수 없다.” 하였다. 일이 급하게 되자, 광남이 또 공을 당기어 억지로 일으켰지만 공은 굳게 앉아서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그 당시에 감사 홍명구 공이 공의 죽음을 듣고서 비장(裨將) 및 의복(衣服)을 보내어 시체를 염습(殮襲)하게 한 다음, 그대로 김화현(金化縣)에 이르렀다가 군사가 패하여 순절(殉節)하였다.
이때에 본도(本道 평안도)에서 사실을 조정에 올려 알리는 관장(官長)이 없었으므로, 홍명구 공의 아들인 의정(議政) 홍중보(洪重普) 공이 매양 그 당시의 일에 대해 오랫동안 매몰될 것을 한탄하다가, 김공의 여러 아들이 장성하게 되자 나라에 상언(上言)하여 그때의 실제 상황을 아뢰니, 현종(顯宗)께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복계(覆啓)하게 하였는데, 김남중(金南重) 공과 이일상(李一相) 공이 앞뒤로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내면서 그 사실에 의거하여 관작(官爵)을 추증(追贈)할 것과 정려(旌閭)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드디어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하고 집 앞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갑진년(甲辰年 1664년 현종 5년)에 현종께서 재이(災異)로 인하여 대신들을 인견(引見)하였을 때 적신(敵臣) 허적(許積)이 공의 여러 아들에게 묵은 원한이 있어서 공에게 내린 정문을 넘어뜨림으로써 재이를 풀리게 하는 한 사건으로 삼자, 여러 아들들이 상언하여 송소(訟訴)하였는데, 지금 원임 의정(原任議政) 정지화(鄭之和) 공이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어 여러 아들의 상언을 무고(誣告)한 것이 아니라고 여겼으나, 당시에 허적의 세력 확장이 심하여 그 원한을 풀지 못하다가 지금 주상(主上) 경신년(庚申年 1680년 숙종 6년)에 허적과 그 무리가 모두 처형되어 죽자, 여러 아들들이 다시 전에 상언한 것을 거듭 올려 청하니, 사건이 다시 해조(該曹)에 내려졌다.
해조에서 대신에게 의논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지금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 공이 그 사실에 의거하여 법도대로 시행할 것을 청하자 주상께서 윤허하였으나, 지금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민정중(閔鼎重) 공이 또 그 일을 중대하게 여거 ‘다시 본부(本府)의 군민(軍民)들에게 조사해 물어서 그 상세함을 얻은 다음에 시행하여도 늦지 않다.’고 청하였다.
민정중 공은 또 그 고을의 기생 금옥(今玉)이 같은 때에 순절(殉節)한 일을 아뢰었는데, 서로 참고하여 조사해 본 결과 온 부중(府中)의 유생(儒生) 계층의 노소(老小)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공이 산 아래에서 적을 만났을 때에 산 위에서 피병(避兵)하던 사람들이, 공은 돌을 손에 쥐고서 적을 치고 금옥은 옷으로 얼굴을 덮어 가리고서 낭떠러지에 몸을 던지는 상황을 보았다.’고 말한 것으로써 관아(官衙)의 서류를 구비하여, 이미 임금께 알리어 아울러 금옥에게도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으니, 아! 임금과 정승이 절의(節義)를 장려하고 원통함을 풀어 준 까닭은 세상에 지켜나갈 올바른 도리를 위하여 염려한 것이 지극하였던 것이리라.
공은 관향이 안동(安東)으로 그 선대의 계통은 실로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에게서 나왔는데, 김방경(金方慶)이란 분은 고려 때 큰 명성이 있었고, 그 뒤로 높은 관작이 대대로 빛났다.
공의 고조 김지(金墀)는 문의 현령(文義縣令)을 지냈고, 증조 김공연(金公衍)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냇으며, 조부 김계현(金繼賢)은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김낙서(金洛瑞)는 진사(進士)인데, 율곡 선생(慄谷先生 이이)에게 수학하여 음사(蔭仕)에 나아가지 아니하고서 시(詩)를 읊고 술 마시는 것을 스스로 즐겼으며, 승지(承旨)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이씨(李氏)는 전의(全義)의 대성(大姓)으로, 그의 선고(先考)는 병절 교위(秉節校尉) 이희담(李希聃)이다.
공은 만력(萬曆 명 신종의 연호) 무자년(戊子年 1588년 선조 21년) 6월 2일에 태어나서,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에 상사(上舍)에 올랐고 을묘년(乙卯年 1615년 광해군 7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어 들어갔으나, 7~8년 뒤에 비로소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에 조용(調用)되었는데, 대개 광해조(光海朝) 때에 간악한 흉도(兇盜)들이 성모(聖母 인목대비)를 원수로 여기는 논의를 주장하자 공이 붙좇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오랫동안 침체되었던 것이고 또한 높이 등용할 조짐이 없었다.
인조(仁祖)께서 반정(反正)하여 즉시 병조(兵曹)의 낭관(郎官)에 임명하였는데, 부모 봉양을 위하여 외직에 나가 부안 현감(扶安縣監)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부모의 상고(喪故)를 연달아 당하여 의례를 지켜 집상(執喪)하였고, 상복 입기를 마치자 예조(禮曹)ㆍ병조의 정랑(正郞)과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임명되어, 장차 대성(臺省)에 처하게 되었으나 공과 사이가 벌어진 자의 저지하는 바가 되었다.
이어 예빈시 정(禮賓寺正)을 역임하고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거쳐 무진년(戊辰年 1628년 인조 6년)에 외직에 나가 영천 군수(榮川郡守)가 되었는데, 부안(扶安)에 있을 때의 일을 가지고 맡고 있는 관사(官司)에서 추후 논의하여 파직시키자, 부안 사람들이 궐문(闕門)에 와 지키면서 그의 억울함을 풀어 주어 아뢰었으므로, 서용(敍用)하여 사도시 정(司道寺正)으로 삼았다.
이때에 조정에서 서쪽 변경(邊境)에 임명하는 것을 신중히 여겨 공을 성천 부사로 삼았는데, 정치와 교화(敎化)가 크게 이루어지자 임금에 품계에 따른 의복(衣服)을 내려 포창하였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이르러 청(淸)나라와의 틈새가 벌어져서 서도(西道)의 수령을 모두 무신(武臣)으로 교체 임명하였는데,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상신(相臣) 김유(金瑬) 공이 ‘성천(成川)에는 어진 정치를 넉넉하게 베풀어 위급할 때 힘을 얻는다.’고 하여 드디어 바꾸지 않았었다.
이 해 겨울에 백성들은 모두 피란할 짐을 꾸리어 놓고서 변고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공은 하늘을 우러러보고 탄식하기를, “는 관수(官守)의 직임에 있으니, 분의(分義)로 보아서 당연히 떠나지 말아야 될 것이다. 살기를 탐내어 구차스레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더니, 마침내 그 말과 같이 하였다.
공이 가정에 거처할 때는 선행(善行)이 있었고 관직에 있을 때는 훌륭한 공적이 있었으며, 또 그의 선공(先公)께서는 대현(大賢 율곡을 지칭함)의 문하(門下)에 출입하였으므로 사우(師友)들이 모두 높이 받들었는데, 마침내 시례(詩禮)의 교훈이 있는 집안의 명재(名宰)와 서로 혼인하는 계합(契合)을 이루게 되었다.
공은 처음에 군수(郡守) 최응주(崔應周)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김세홍(金世弘)을 낳았고 딸은 승지(承旨) 유도삼(柳道三)에게 출가하였다.
후취(後娶)는 국성(國姓)인 이씨(李氏)로, 세종 대왕의 6대손인 이선립(李先立)의 따님이고 직제학(直提學) 홍종록(洪宗祿)의 외손녀인데, 경자년(更子年 1600년 선조 33년) 11월에 태어나서 갑인년(甲寅年 1674년 현종 15년) 정월 6일에 졸하였다. 공의 묘소는 광주(廣州) 기자산(其自山) 가자동(加資洞)에 있는데, 부인 이씨를 합부(合祔)하였다.
공은 처음에 원종 공신(原從功臣)으로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가 여러 번 추증이 더해져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고, 이씨는 참 고명(誥命)을 받아 정부인(貞夫人)이 되었다. 부인은 성질이 온화하고 유순한 데에다 몸 가지는 법도가 엄격하고 올발라서 과수(寡守)로 산 지 38년 동안에 가도(家道)가 이지러짐이 없었으니, 대개 효경(孝敬)에 주관점을 두어서 여러 가지 행동이 모두 갖추어진 것이었다.
맏아들 김세보(金世輔)는 일찍이 현감(縣監)이 되었고, 다음 김세필(金世弼)은 좌랑(佐郞)이며, 셋째 김세익(金世翊)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판관(判官)이다. 사위는 곧 광남(光南 김익훈)이다.
현감의 아들은 김광원(金光遠)ㆍ김광적(金光績)ㆍ김광도((金光道)이고 딸은 참봉(參奉) 황이장(黃爾章)에게 출가하였다. 좌랑의 두 딸은 사인(士人) 이지윤(李志尹)ㆍ신도동(辛道東)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판관의 아들은 김광석(金光錫)이고 두 딸은 사인(士人) 조의헌(趙儀獻)과 화릉 도정(花陵都正) 이조(李洮)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광남의 아들은 수찬(修撰) 김만채(金萬埰)와 생원 김만선(金萬墡)이다.
아! 의병을 모집하였고 일이 버려지자 목숨을 바쳤던 실상이 온 부중(府中)의 듣고 본 사람들에게 환히 드러나서 이미 입으로 전하여 옮겨지는데도, 저 소인(小人)은 성인(成人)의 아름다움을 즐겁게 여기지 않고 기회를 틈타 원한을 풀려고 하여, 위로는 임금의 들음을 속이고 아래로는 백성의 이륜(彛倫)을 무너뜨렸으니, 통탄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다행스럽게도 흉도(兇徒)의 괴수를 죽여 없애자 공의(公議)가 빙 돌아 조정에서 다시 사민(士民)들이 바친 서장(書狀)과 유생들이 상서(上書)한 것에 의거하여 정문을 세운 은전(恩典)이 거듭 새롭게 되었으니, 옛날 태사공(太史公 한나라 사마천)이 형가(荊軻)에 대하여 전하면서 한 약의(藥醫)의 일로 증거하였고, 유후(留侯)에 대하여 기록하면서 한 화공(畵工)의 일로 증거하였는데, 하물며 온 경내(境內)의 질박한 사민들의 말이겠는가?
아! 공이 치켜세워지고 낮추어지는 것은 곧 세도(世道)의 쇠퇴함과 융성함에 관계될 것일진저. 기생 금옥이 낭떠러지에 투신(投身)한 것에 이르러서는 또한 공의 일로 인해서 아울러 드러났으니, 민정중 공의 청한 것은 대개 회옹 선생[晦翁先生 주자(朱子)]이 주 봉사(朱奉使)의 절개를 기록함으로 인하여 오대산(五臺山)의 의승(義僧)인 진보(眞寶)를 아울러 기록한 뜻을 인용한 것이다.
그 일이 더욱 기이하도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구독(溝瀆)에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더라면, 사람들이 혹시 알지 못했을 것인데, 공이 산하(山下)에서 죽었으니, 사민(士民)들 이사(異辭)가 있지 않았도다.
부정(不正)한 말 늘어놓아 공격하니, 저는 어떠한 사람이었던가? 대신과 명경(明卿)이야 어찌 공에게 사정(私情)을 두어, 임금의 들음을 감히 속이겠는가?
공에게 대하여 알려고 하는 자 있거든, 대체로 그가 치켜세워지고 낮추어진 시기(時期)를 볼지어다.
▲출전 : 국역 국조인물고 제5집 39쪽~44쪽
■ 愍肅公(민숙공 김언) 할아버님의 약력
---1994년 2월 14일 (순절 357주기 기념)
---안동김씨 (안렴사공파) 좌승지공파 종친회
1. 서기 1588년, 선조21년 음력 6월 탄생, 거금 406년전임
2. 아버님 진사로 ★洛瑞(낙서), ★율곡 선생의 문하생, 평생 불출사, 詩畵(시화)로 벗하고 유유자적, 승정원 좌승지 추증됨, 어머님 전의이씨 병절교위 지내신 ★희담의 따님
3. 서기 1615년 (28세시) 문과급제, 상봉주부 벼슬 7-8년간 계심, 광해군 폐모론에 불참하여 미관직에서 오래 계심, 36세시 인조반정으로 기성랑으로 승차
4. 부안현감으로 계실적, 양친이 연이어 돌아가심, 시기하는 자 있어 무고함에 오래 한직에 계심
5. 41세시, 영천군수로 재직시, 무안현감시 궐례로 탄핵받아 파직됨 (집상중궐례로)
6. 부안 관민이 무고함과 선정치적을 진정하야 복관되시고 사도사정으로 승차하심
7. 성천부사가 되시고, 선정으로 인조임금께서 품위를 높이고 표창하심
8. 병자년, 서기 1636년에 청나라 사정이 급박함에 서북지방 관장을 모두 무신으로 교체하였으나, 영상 ★김류가 공의 선치적과 민심이 따름을 들어 유임시킴
9. 병자년 12월 9일, 청태종이 20만 대군으로 압록강을 도하침공, 불과 7일만에 (12월 15일)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피함
10. 평양감사 ★홍명기의 명으로 자모산성으로 달려가 합류함
11. 평양감사 ★홍명기가 아무 연락 없이 딴 곳으로 가버림에 홀로 의병을 초모하여 적과 대치함
12. 상부와 연락이 두절되고, 고립무원으로 민심이 경동하여 관병의 이탈자가 속출함에 세궁력진 상태에 빠짐
13. 대세가 돌이키기에 불가능함에 관, 병, 민을 해산시킴 (가전에는 米, 布를 분배하였다 함)
14. 잔여 관, 민, 병이 같이 죽기를 간청하고 사위 ★金益勳과 시위병이 없고 달아나라 함에 크게 꾸짖고 죽기를 맹세하고 후일을 도모하라 이르시고 해산시킴
15. 소수의 시종 군사와 더불어 산성에서 돌로 적과 싸우시다가 적의 칼아래 쓰러지심
16. 적장이 항복하기를 권하나, 공께서 목숨이 끊어질때까지 크게 꾸짖고 불절하여 끝내 해를 입으심. 때는 인조15년 (정술년) 정월 초5일 (서기 1637년) 이며, 거금 352년전임
17. 당시 공의 가속이 각기 흐트러져 큰 환난을 당함, ★世輔 15세, ★世弼 7세, ★世翊 4세였음
18. 감사 ★홍명기가 비장과 의복을 보내어, 공의 시선과 의대를 수습시키고 그는 김화현에서 청과 싸우다가 전사함
19. 그후 난리가 끝나고 세상이 안정됨에 경기도 광주군 기자산에 안장하시고, 후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墓碣문을 쓰심 (가전에 의하면 의대와 유품만을 가지고 쓴 허묘였다 함)
20. 초취부인 경주최씨 아들 ★世弘 벼슬 통덕랑 일찍 별세 (21세) 무후, 딸 한분 ★柳道三에게 출가, 최씨부인 묘는 오창면 양대리 뒷산, 시아버님 승지공 묘소옆에 있음
21. 재취부인 전주이씨로 세종대왕 6세손 李先立의 딸임, 남은 ★世輔, ★世弼, ★世翊과 1년 (광남군 ★金益勳에게 시집감) 두시고, 서기 1675년 정월 초6일 돌아가심, 향년 76세, 38년간 홀로 의도를 엄중히 하고 가도를 확립함에 가문을 지키고, 어린 세 자녀를 훌륭히 키워 출세시켰음, 묘소는 할아버님과 합장함, 현재 우리 모은 후손은 전주이씨 할머님의 후손임
22. 성천부 관기 ★今玉이 오래도록 할아버님을 모시다가 자모산성에서 끝까지 남아 돌을 나르다가 도우며 싸웠음. 후에 성천부민이 감격하여 貞節廟閣(정절묘각)을 세우고, 후에 다시 숙종 임금님께서 旌門(정문)을 세우도록 허락하여, 현재 성천에 현존한다 함
23. 난리가 끝나고 세상이 안정되었으나, 조정에 무고하는 무리있어 할아버님의 거룩한 죽음이 표상되지 못하여 영상을 지낸 ★홍중보가 항상 한탄하였으나 어찌하지 못하고 필경 둘째 아드님 ★世輔 할아버님이 장성하여, 그 실정과 억울함을 끈질기게 탄원하고 그치지 않으셨음
24. 예조판서 ★김남중, ★이일상이 주청하여 현종임금께서 이조판서 추증하시고, 본가에 旌閭問(정려문) 세워 표창함 (때는 현종5년, 서기 1664년으로 순절후 27년만이었음)
25. 현종때 영의정 ★허적이 사사감정으로 비방 무고하여, 정려문을 헐고 묘갈을 땅에 묻었음 (장차 청나라의 노여움을 사서 나라에 재앙이 닥친다고 함)
26. 서기 1680년 허적이 역적으로 주멸됨에 자손들이 다시 탄원, 예조에서 재논의 영의정 ★김수항께서 주청하여 판부사 ★민승중에게 사실규명을 명함. ★민승규 성천부 현지에 가서 직접 성천부 관민을 상대로 현지조사함
27. 할아버님의 은혜로 살아남은 관, 민, 병들과 장렬하게 순절하심을 목도한 백성들이 한결같이 그 행적을 똑똑히 증언하고 입증함 (가전에 의하면, 이미 전에 할아버님과 기생 ★금옥의 사당을 주민 스스로 지어놓고 추모하고 있었다 함)
28. 숙종 임금님께서 ★민승중의 복명과 성천부민, 유생의 탄원으로 본가에 정려문을 다시 복권시키고, 성천부에 사당과 순절비를 세우게 하시고, 묘비와 묘갈을 다시 세우게 하심 (묘소 : 광주군 기자산 가좌동 자좌 있었다 함)
29. 현종 임금님때에 이조판서로 추증, 다시 좌찬성으로 높이고 정종(=정조)때 민숙공이라 시호내림. 두부인 모두 정부인 교지 받음
■ 조선왕조실록 숙종 009 06/06/30(정해) /고 성천부사 김언의 철거된 정려를 세워줄 것에 관한 전 교관 김세보 등 삼형제의 상소
---전 교관(敎官) 김세보(金世輔) 등 형제 세 사람이 상소하기를, “신의 아비인 고(故) 성천부사(成川府使) 김언(金)은 일찍이 병자년의 난리에 의병을 모집하여 근왕(勤王)하려고 하다가 적병에게 핍박을 받자 적을 꾸짖으면서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당시의 감사 홍명구(洪命耉)가 이 소식을 듣고 자기의 옷을 벗어 군관으로 하여금 가지고 가서 시체를 거두게 하고 조정에서 포장(褒奬)·정표(旌表)의 명이 전후에 계속해서 내렸습니다. 그런데 갑진년에 역적 허적(許積)이 사감(私憾)을 풀려고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끝내 정문(旌門)을 철거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다시 정표(旌表)의 은전(恩典)을 내려 주소서.” 하였다. 소가 예조에 내리자, 예조에서는 대신들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영의정 김수항의 의견은 “그 당시의 감사 홍명구가 수의(衣)에 싸서 비장(裨將)을 보낸 사실은 그의 아들인 고(故) 상신(相臣) 홍중보(洪重普)가 조정 중신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이야기 했으니, 이것은 공안(公案)이 될 수 있으니, 간사하게 속이는 말인지는 분변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명백합니다. 다시 정려를 세워 주도록 청합니다.” 하고,
---우의정 민중정(閔重鼎)의 의견은, “정표하는 은전은 처음에 그의 아들의 상언으로 허락했었는데, 뒤에 한 사람이 추후에 헐뜯는 이유로써 철거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다시 아들이 말하는 데 따라서 환원시킨다면 아마도 신중히 하는 도리가 아닐 듯 합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전란이 일어난 지가 오래지 않으니, 성천(成川) 사람 가운데 반드시 눈으로 직접 보고서 말할 수 있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또한 따라간 고을 기생 ★금옥(今玉)이란 자가 절벽에 떨어져서 죽었다.’고 했으니, 이와 같은 일들도 또한 파묻어 없어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본도(本道)로 하여금 방문(訪問)하여 그 실제 사정을 알아내어 위에 알린 뒤에 해당 부(府)에 다시 명하여 포장(褒章)을 의논하게 함이 일의 체모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영의정의 의논대로 시행하게 하고, ★금옥이 추락해 죽었다는 사실 여부는 본도로 하여금 물어보게 한 뒤에 다시 품지(旨)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 김세영(金世榮)
1651년(효종2) 신묘에 등과하여 관이 만호에 이르렀다. <청주시지, 1976>
○ 김세보(金世輔, 1623- )
공은 충신인 민숙공 언의 아들인데, 음직으로 현감을 지냈으며, 젊은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오창지>
김세보(金世輔)는 1623년 계해(癸亥)에 태어났으며, 자는 중경(重卿)이고, 경(京)에 거주하였으며, 1662년(현종3) 한성부(漢城府), 동학(東學)에서 증광(增廣) 진사(進士)급제하였고, 이때 시험관은 남용익(南龍翼)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등이었다. 부친은 김언(金)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성천(成川)/행도호부사(行都護府使)이었으며, 형 김세홍(金世弘) 제 김세필(金世弼), 김세익(金世翊)이 있다.
○ 김세필(金世弼, 1631- )
공은 현감 세보의 아우인데, 젊은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직으로 현감을 지냈다. <오창지>
김세필(金世弼)은 1631년 신미(辛未)에 태어났으며, 자는 중해(仲諧)이고, 경(京)에 거주하였으며, 한성부(漢城府), 동학(東學)에서 1663년(현종4) 식년(式年) 진사(進士)급제하였으며, 이때 시험관은 허적(許積) 형조판서(刑曹判書), 박장원(朴長遠) 이조참판(吏曹參判), 남구만(南九萬)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등이었다.
58) 김세익(金世翊, 1634(인조12)∼1698(숙종24))
김세익(金世翊)은 김언의 아들로 1634년 갑술에 태어났다. 자(字) 량경(亮卿)이고 외조부(外祖父) 이선립(李先立) 처부(妻父) 이후응(李後膺)이며, 경(京)에 거주하였고, 1654년(효종5) 서학(西學), 동학(東學) 식년(式年) 진사(進士) 급제하였으며, 전주판관(全州判官)을 역임하다 1686년(숙종12) 정시(庭試) 병과2(丙科2)로 급제하였으며, 관직 경상감사를 지냈다.
■ 김세익 약력
1634(인조12)-1698(숙종24).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亮卿(양경).
아버지는 성천부사 王+言(언), 어머니는 李先立의 딸. 아버지가 병자호란때 적병과 싸우다가 순절하자 중림찰방에 기용되어 관계에 나갔으나 1681년(숙종7) 헌납 朴泰孫으로부터 탐학하다는 탄핵을 받아 仕版(사판)을 삭거당하였다.
그뒤 다시 서용되었으며 1686년 전주판관으로 재임시 53세의 나이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 사간원에 들어갔다.
1694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시에 시관으로 영남지방을 다녀와서 백성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宮房의 침탈상을 보고하고 그 구제책을 촉구한 바 있으며, 이듬해에도 군병의 기강확립과 궁방의 검약한 생활 등을 건의한 바 있다.
김세익은 수군절도사 삼도 통어사 도호부사로 강화도에 있으면서 충렬사 제문을 지었다.<江都古今詩選제2집 (2001, 강화문화원)>
이후 여러차례 승지에 발탁되었으며, 1698년 경상도관찰사로 재임시 도내를 순시하던 중 청송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 국조방목 淸選考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경상도 선생안 (상주문화원)
◇김세익(金世翊)
o직 명:통정대부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대구도호부사(通政大夫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大邱都護府使)
o재임기간:1698년(숙종 24년) 무인(戊寅) 9월 16일~1698년(숙종 24년) 무인(戊寅) 10월 23일
졸서(卒逝)
■ 조선왕조실록 기록 요약
---○ 표시는 낙서의 손자 文臣 김세익 기록, ▶ 표시는 응해의 손자 武班 김세익 기록인 듯---
1685년 ▶숙종11/01/05(을축) 특지(特旨)로 김세익(金世翊)에게 좌윤(左尹)을 제수(除授)하였다. 이어서 김세익(金世翊)의 사람됨과 그의 활쏘는 기예(技藝)를 칭찬하였다. 그러기에 이 명이 있었다.
1694년 ○숙종20/05/15(임자) 김세익(金世翊)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숙종20/09/27(임진) / 부사직 김세익이 영남의 사정을 상소하다. 부사직(副司直) 김세익(金世翊)이 명을 받고 영남(嶺南)에 내려가 선비들을 시험보였다. 돌아와서 상소하여 본도(本道)의 사정을 논의하기를,
○숙종20/09/29(갑오) 김세익(金世翊)을 장령으로
1695년 ○숙종21/05/16(정축) 김세익(金世翊)을 헌납으로,
○숙종21/05/19(경진) 헌납 김세익이 성천의 은점 폐지와 초료의 폐단 등 관서지방의 민폐에 대하여 상소하다. 헌납(獻納) 김세익(金世翊)이 관서(關西)에 가서 선비를 시험보이고 조정에 돌아와 민폐(民弊)를 상소로 진달하였는데, 성천(成川)의 은점(銀店)을 폐지시킬 것과, 황주(黃州)·봉산---
○숙종21/08/02(신묘) 헌납 김세익이 국름을 허비하는 폐단 등에 대해 상소하다
○숙종21/08/14(계묘) 김세익(金世翊)을 집의(執義)로
▶숙종21/10/16(을사) 김세익(金世翊)을 총융사(摠戎使)로
○숙종21/11/06(갑자) 김세익(金世翊)을 사간(司諫)으로
1696년 ○숙종22/01/18(을해) 김세익(金世翊)을 승지(承旨)로
○숙종22/02/21(정미) 동부승지(同副承旨) 김세익(金世翊)
○숙종22/04/30(을묘) 김세익(金世翊)을 승지(承旨)로
▶숙종22/05/20(을해) 좌변 대장 김세익
○숙종22/08/09(임진) 승지 김세익(金世翊)
1697년 ○숙종23/01/19(신미) 승지(承旨) 김세익(金世翊)이 말하기를, “강도(江都)의 모든 산들이 거의 민둥산이 되었으므로, 혹시라도 급박한 일이 있게 되면---
○숙종23/03/25(병자) 예방 승지(禮房承旨) 김세익(金世翊)
○숙종23/03#03(계미) 우승지(右承旨) 김세익(金世翊)
○숙종23/07/22(경자) 김세익(金世翊)을 승지(承旨)로
○숙종23/09/28(을사) 김세익(金世翊)을 충청도 관찰사로
○숙종23/10/01(무신) 배천의 문회 서원에 편액을 내리고 치제하게 하다,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친히 문회 서원(文會書院) 네 자(字)를 써서 승지(承旨) 김세익(金世翊)을 보내어 편액(扁額)을 내리고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숙종23/10/13(경신) 충청도 감사 김세익(金世翊)
○숙종23/10/13(경신) 김세익(金世翊)을 승지(承旨)로
1698년 ○숙종24/02/03(무신) 승지 김세익이 역로의 폐단을 아뢰고 사사로운 역마 이용 엄금을 청하다. ---모든 승지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여 결재를 받도록 명하였다. 이 때에 승지 김세익(金世翊)이 배천(白川)에 봉사(奉使)하였다가 막 돌아왔는데,
○숙종24/07/15(정해) 김세익(金世翊)을 경상도 관찰사로
○숙종24/10/29(경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세익(金世翊)이 졸(卒)하여 이세재(李世載)로 대신하였다.
■ 김세익(金世翊) 인장 (오세창의 근역인수)
---인장1 : 金世翊印
---인장2 : 安東世家
■ 김세익 글
忠烈祠 祭文 (좌승지 金世翊, 1634-1698)
깊숙이 병자 정축년에 있어서랴. 어찌된 운수인지 재앙을 만나다니.
임금의 수레는 떠나려 하는데, 장관의 말은 급함을 알려오니 조정은 물끓듯이 어지러워라.
먼저 섬으로 피신을 해야지,
임금이 계신 곳은 소식이 끊겨지고 소리쳐 도와주는 이 없네.
긴 강물로 띠를 둘러 있는데 이른바 험한 요새지라 믿고만 있었는데.
사람의 꾀로서는 선악을 가리지 않는데 북녘 오랑캐는 나는 듯이 건너 오네.
천작의 요충이라지만 창졸간에 빼앗겼으니 인축이 문드러져 산성에 그득하고 일반 백성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갈팡질팡 하는데
짐승도 놀라 뛰고 새는 숨기가 바쁘니 팔진미도 먹다가 버려야 하니 누가 일찍이 이를 분별하였으랴.
슬프다 그대 여러분 신하들이여 풍상은 급한데 굴하지 않는 분이 있으니 오직 이때의 元老인지라.
중요한 직분이 있는 것도 아니로데 용렬하게 결단을 내려 이곳에 부임하였으니 배운 것은 저버리지 않아 혹은 재상으로 봉직하면서 혹은 임금을 뫼시는 일에 앞장서는데 평복차림이 있었으니
음으로 보직되어 이바지 하였는데 서로가 이어서 이 나라에 신명을 바치었노라.
義는 중하고 생명은 가벼운 것이지, 하물며 여러 軍官에 이르기까지,
그 자취에 종과 편술관 패관 등이 있었으니 총책임자를 꾸짖으며 강물에 뛰어들었으며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중에 뛰어 들어가니 장수들은 패주하련만 우리는 열명 가운데 한 분이 살았겠지.
간은 이날 순국하였으니 신위야말로 비록 가지런하지 않아도 충신으로서는 서로가 짝지어 있노라.
예부터 난리에 있어서야 어찌 충의심이나 절개가 없을손가. 한편으로 드디어 모시었으니 더욱 높여야만 하네. (이하 생략)
(註) 김세익은 수군절도사 삼도 통어사 도호부사로 本島에 있었다.
<江都古今詩選제2집 (2001, 강화문화원)>
◇충렬사 (忠烈祠) (시도유형문화재 21호)
소재지 인천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371
선원 김상용과 공조판서 이상길 외 26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김상용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인천이 청나라 군사에게 함락되자 순절한 충신이다. 인조 19년(1641)에 지어 현충사라 불렀으나, 효종 9년(1658)에 나라에서 충렬사라는 이름을 다시 받았다. 1977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른다.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는 없어지고, 사당과 책을 보관하는 전사청· 출입문인 외삼문 등이 남아있다.
■ 허재집 (원광대학 역)
虛齋와 그 文學 (원광대 교수 柳在泳)
허재집은 허재 柳惠源(1632-1695)의 시문집이다. 허재 세상을 떠난 100년쯤 뒤에 5세손 世夏( )가 필사하고 <世箕 使3종제 世夏詩 一○實記> 6세손 東琪가 趙宇熙의 序(1881)를 받아 간행하려다 못하였다.
그 뒤 9세손 桓圭가 尹夏重의 序(1918)를 받고 8세손 熙雨의 跋(1918)을 붙여 목활자본 3권1책으로 간행하였는데 허재 세상 떠난 200여년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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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完山伯金亮卿世翊次柳處士韻贈別 /완산백김양경세익차류처사운증별
완산백 김양경 세익(1634-1698)이 유처사(▶유혜원, 1632-1695)의 증별시에 차운하여
淸談今獲久離餘 /청담금획구이여 /(집) 떠난 지 오랜데 이제 淸談했으니
忘却從來困簿書 /망각종래곤부서 /그 전 따분한 문서 잊어 버렸네
彭澤休官幽興在 /팽택휴관유흥재 /彭澤의 벼슬 그만 둔 그윽한 흥취 있으니
九秋佳節返吾盧 /구추가절반오로 /九秋 佳節에는 내 집에 돌아 가려네
*完山伯 : 전주부윤을 이리 지칭
*金亮卿 世翊 : 1687년(숙종13) 전주부윤으로 있었다. 이 詩는 1688년에 쓴 것으로 본다.
*淸談 : 맑고 고상한 이야기
*彭澤 : 중국 강서성에 있는 고을 이름. 晉의 도연명이 이 고을 원이 되었다가 五斗米로 허리 굽히기 싫다고 그만 두었음
*九秋 : 가을 90일 동안을 이름. 三秋
● 謝宛山府伯金亮卿世翊助貝+盡石溪崔先生祠宇啓 /사완산부백김양경세익조○석계최선생사우계
鳳谷金東準沙溪石溪門人配此祠宇在全州府 /봉곡김동준사계석계문인배차사우재전주부
완산부윤 김양경 세익이 석계 최선생 사우에 부조한 걸 사례한 글
봉곡 김동준은 사계 석계 문인으로 이 사우에 배향되었는데 전주부에 있다.
---내용 9페이지 분량, 추후 보완---
*석계 최선생 :
*봉곡 김동준 :
● 謝宛山府伯金亮卿粧匣具籤於歷代史要啓 /사완산부백김양경장갑구첨어역대사요계
전주부윤 김양경이 역대사요에 장갑 구첨해 준 걸 사례하는 글
---내용 5페이지 분량, 추후 보완---
*歷代史要(역대사요) : 중국의 전국시대로부터 5대 말까지의 역사를 간추려 10권으로 엮은 책. 권청하 편찬
*權靑霞(권청하) :
*粧匣(장갑) : 책을 좋게 보존하기 위해 갑을 만들어 끼워 둠
*具籤(구첨) : 籤紙(첨지)를 붙여 둠. 찾기 쉽게 종이 쪽지를 붙여 둠
허재집 권지3
부록
● 安東金世翊贈虛齋序 /안동김세익증허재서
안동 김세익이 해재(▶유혜원)께 준 서문
내(▶김세익)가 전주부윤으로 있을 때 문서와 편지2) 로 바빠3) 한 가지 아름다운 정서도 없고 술잔 들고 시를 읊는 그러한 겨를 또한 거의 없었다. 정묘년(▶1687년 숙종13) 여름 공무가 조금 한가하여 두건을 벗어 놓고5) 의의정에서 아이들과 새로 자란 대 수백 그루를 완상했다.
그때 고부6) 김중심(金仲深)7) (金聖淵의 자는 仲深. 文科하여 결성현감 이조좌랑을 했는데 허재▶유혜원 門下에서 受業했다) 이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나의 스승 흥덕8) 유처사(▶유혜원)는 이름이 혜원(惠源)이고 자는 원중(源中)이며 세속을 벗어난 한 시인인데 그 심사를 논한다면 세상에 구하는 것이 없고 탐하는 것은 오직 술9)일 뿐인데 마침 일이 있어 이 부(全州)에 이르렀다" 고 했다.
나는 처음 문인(文人) 운사(韻士)로 알고 소동을 보내어 맞아 왔는데, 상대하니 용의가 소박하고 수염과 머리가 희였으며 혼연히 지란의 방에 들어 앉은 듯 향기로왔다. 함께 이야기하고 시간을 보내며 백가서를 다 논해 보았는데 계합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가 지었다고 하는 시문을 외는데 거의 조금도 이속한 말이 없어 그 내력을 알아보니 ★권청하의 문인이었다.
그가 뜻이 있는 것을 알만한데 먼지를 털 즈음에 그 손가락이 끊어진 것을 보고 나는 마음이 척연(戚然)하여 중심(▶김성연)에게 물어보니, 연전에 그 어버이 병에 단지 진혈하여 바로 회소되었고 지금까지도 근심없이 살아 계시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나는 듣고 섬찍하나 공경심이 나 중심에게 말하기를,
"어버이를 위한 정성 지극하다. 임종 창황 중에 이렇게 하기 진실로 어렵고 하물며 그 피를 드려 오늘이 있게 한 것은 참으로 이른 바 성효의 소감이 백행의 근원인 이에 있다 하겠다. 이 어찌 문인 운사로 대접해도 좋으리오"
드디어 눈물을 씻고 술을 두어 잔 권한 뒤에 정자에 머물게 하고 글과 술의 즐거움으로 허일이 없었으니 지난 적 부서(簿書)의 괴로움을 조금 잊었다.
한 보름쯤 되어 문득 돌아간다 알리기에 말려도 그치지 않는 것은 차마 어머님10)을 오래 떠나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에 또 왔었고, 이제까지 무릇 세 번 이르렀는데 그 부지런히 와 상방하는 뜻을 감동할 만하다.
나는 그 사는데 청취(淸趣)가 있느냐고 물으니, 집이 가난하기에 겨우 두어 간 집을 얽어 양친하는 겨를에 형제숙질이 한방에 단란하게 모여 술 한병 고기 한 마리라도 함께 그걸 들었으며 술마신 즐거운 여흥으로 때에 따라 시를 짓되 그 공졸은 헤아리지 않고 계산의 좋은 경치도 없지 않으나 지극한 즐거움은 이 집 이름 한 허(虛)자와 바꾸기 어려우니 내 뜻을 아리로다 했다.
나는 웃으면서 짓궂게 말하길
"허중수물(虛中受物)11) 한다로 군자가 하는 것은 이 어찌 집을 이름한 뜻이리요." 하니,
말하길
"아니다. 장자(南華子)12)의 말에 허실생백(虛實生白)13) 한다는 것은 오직 도집허의(道集虛義)14) 이니 대개 여기에서 땄다." 고 했다.
나는 말하기를,
"선생(▶ )은 근본 ★청하에게서 수업하고 청하는 ★사계(沙溪) 김선생의 문인이라 일생용공(一生用功)이 우리들에게 벗어나지 않았는데 어찌 꼭 장수(莊손수변빼고搜)15)의 말을 끌어다가 호했는가" 하니, 말하기를,
"나는 호락(瓠落)16) 해서 때의 모습에 맞지 않고 말이 어지러워 때의 귀에 맞지 않으며, 모습이 고목(槁木)17) 같아 오래도록 멍하니 앉아 저 대방가(大方家)의 비웃음을 면치 못했다. 오직 그 근본 뜻은 올빼미와 썩은 쥐를 다투지 않으니, 그렇다면 장자의 말을 버리고 내 집을 이름할 수 없다." 고 했다.
내 듣고 옳게 여겨 마침내 허재(虛齋) 두 글자를 크게 써서 돌려 주고 그 강산의 승경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처사의 즐거움 같은 것은 이에 짐짓 생략한다.
아아, 바야흐로 이제 성상(▶숙종)께서 효도로 국가를 다스리니 포록(褒錄)할 은전이 아마도 꼭 머지 않아 처사(▶유혜원)의 집에 내려지리라. 내가 순복(淳複)18) 하는 것은 백행의 근원(孝)이기 때문에 이걸로 이에 서문한다.
때는 숭정후 무진(▶1688, 숙종14) 팔월 이십 사일
○김두수(金斗壽)는 김세주(金世柱)의 아들 김두남(金斗南)의 형제로 1669년 기유(己酉)에 태어났으며 자는 대수(大)이고 경(京)에 거주하였다. 1693년(숙종19) 성균관 반수당(成均館泮水堂), 동학(東學)에서 식년(式年) 생원(生員) 급제하였으며, 이때 시험관은 이서우(李瑞雨)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이었다.
▣ 김항용 - 예, 올렸습니다.
▣ 김윤만 -
▣ 김태서 -
▣ 김윤식 -
▣ 솔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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