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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처 숙부인 김씨의 행장 및 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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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3-09-18 00:46 조회2,1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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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처 숙부인(淑夫人) 김씨(金氏)의 행장(行狀) ▣



--부인의 성(姓)은 김씨(金氏)니 서울의 대성이다. 고려조 정승 방경(方慶)의 현손(玄孫)인 척약재(惕若齋) 구용(九容)은 고려 말에 이름을 떨쳤고, 벼슬이 삼사(三司)의 좌사(左使)에 이르렀다. 그 사대손(四代孫)인 윤종(胤宗)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절도사였고, 그 아들 진기(震紀)가 경자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별제(別提)로 첫 벼슬에 나아갔다. 그리고 그가 휘(諱) 대섭(大涉)을 낳으니 또한 계유년 사마시에 합격, 도사(都事)로 첫 벼슬에 나아갔다. 그리고 관찰사(觀察使) 심공(沈公) 전(銓)의 딸에게 장가드니 부인(夫人)은 바로 그 둘째딸이다.

--융경(隆慶) 신미년(선조 4, 1571)에 낳아, 나이 열다섯에 우리집에 시집왔다. 성미가 조심스럽고, 성실하고도 소박하여 꾸밈이 없었으며 길쌈하기에 부지런하여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고, 말은 입에서 내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을 섬기기를 매우 공손하게 하여,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몸소 문안드리고, 음식을 드릴 때 꼭 맛을 보고 드렸다. 철을 따라 제 철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했다.

--종들을 다루기를 엄격히 했지만 잘못을 용서해 주었고 욕지거리로 꾸짖지 않으니 모부인께서 칭찬하시되,



"우리 어진 며느리로다." 하셨다.



--내 한창 젊은 나이에, 부인에게 압류(狎遊)하기를 좋아하였지만 싫은 기색을 얼굴에 나타낸 적은 거의 없었으며, 어쩌다 조금이라도 방자하게 굴면 문득 말하기를,



"군자의 처신은 마땅히 엄중해야지요. 옛사람은 술집ㆍ다방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던데, 하물며 이보다 더한 짓이겠어요?"



하였으므로, 내 듣고 마음으로 부끄러워, 더러 조금이나마 다잡힘이 있었다. 그리고 항상 내게 부지런히 글 공부하기를 권하여,



"장부가 세상에 나서 과거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고, 제 몸에 이롭게 하는 이도 또한 많습니다. 당신은 집이 가난하고, 시어머님은 늙어 계시니, 재주만 믿고 허송세월하지 마십시오. 세월은 빠르니 뉘우친들 어찌 뒤따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진년(선조 25, 1592) 왜적을 피하던 때에는 마침 태중(胎中)이어서 지친 몸으로 단천(端川)까지 가서 7월 7일에 아들을 낳았다. 이틀 후에 왜적이 갑자기 닥치자, 순변사(巡邊使) 이영(李瑛)이 물러나 마천령(磨天嶺)을 지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그대를 이끌고서 밤을 새워 고개를 넘어 임명역(臨溟驛)에 이르렀는데, 그대는 기운이 지쳐 말도 못하였다. 그때 동성(同姓)인 허행(許珩)이 우리를 맞아 같이 해도(海島)에 피란하였으나 머물 수가 없었다. 억지로 산성원(山城院) 백성 박논억(朴論億)의 집에 이르러 10일 저녁 숨을 거두매, 소 팔아 관을 사고, 옷을 찢어 염(斂)을 하였으나, 오히려 체온이 따뜻하므로 차마 묻지를 못하였는데, 갑자기 왜적이 성진창(城津倉)을 친다는 소문이 들리므로, 도사공(都事公)이 급히 명하여 뒷산에 임시로 묻으니 그때 나이 스물둘로 같이 살기는 여덟 해였다.

--아! 슬프다. 그 아들은 젖이 없어 일찍 죽고, 첫딸은 자라 진사 이사성(李士星)에게 시집가서 아들ㆍ딸 하나씩을 낳았다.

--기유년(광해 1, 1609)에 내가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직하여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임명되니 예에 따라 숙부인(淑夫人)으로 추봉케 된 것이다. 아! 그대 같은 맑은 덕행으로, 중수(中壽)도 못한데다가, 뒤를 이을 아들도 없으니, 천도(天道) 또한 믿기 어렵다. 바야흐로 우리 가난할 때, 당신과 마주 앉아 짧은 등잔심지를 돋우며 반짝거리는 불빛에 밤을 지새워 책을 펴 놓고 읽다가 조금 싫증을 내면 당신은 반드시 농담하기를,



"게으름 부리지 마십시오, 나의 부인첩(夫人帖)이 늦어집니다."



하였는데, 18년 뒤에 다만 한 장의 빈 교지를 궤연[靈座]에 바치게 되고 그 영화를 누릴 이는 나와 귀밑머리 마주 푼 짝이 아닐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당신이 만약 앎이 있다면 또한 반드시 슬퍼하리라. 아, 슬프다. 을미년(선조 28, 1595) 가을에 길주에서 돌아와, 또한 강릉 외사(外舍)에 묻었다가, 경자년(선조 33, 1600) 3월에 선부인을 따라 원주 서면 노수(蘆藪)에 영장(永葬)하니, 그 묘는 선산 왼쪽에 있으며 인좌(寅坐) 신향(申向)이다. 삼가 행적을 쓰노라.



《출전 : 성소부부고 제15권 문부 12 - 행장 行狀》







▣ 망처(亡妻)의 제문 ▣



오직 부인은 본성이 공경스럽고 정성스러웠고/惟靈性惟恭恪



그 덕은 그윽하고 고요하였네/德則幽閑

일찍이 시어머니 섬길 때/早事先姑

시어머니 마음은 몹시도 기뻤다네/姑志甚驩

죽어서도 시어머니 따라/死而從姑

이 산에 와 묻히는구려/來窆玆山

휑덩그레한 들판 안개는 퍼졌는데/荒野煙蔓

달빛 쓸쓸하고 서리도 차구려/月苦霜寒

의지 없는 외론 혼은/孑孑孤魂

홑 그림자 얼마나 슬프리까/悲影之單

십팔 년을 지나서/踰十八年

남편 귀히 되어 높은 벼슬에 오르니/夫貴陞班

은총으로 추봉하라는/恩賁追封

조서가 내려졌네/紫誥回鸞

미천할 때 가난을 함께 하면서/賤時共貧

나의 벼슬 높기를 빌더니만/祈我高官

벼슬하자 그댄 벌써 죽어 없으니/及官已歿

추봉(追封)의 은총만 부질없이 내려졌네/寵命徒頒

어찌하면 영화를 같이 누릴꼬/焉得同榮

내 마음 하염없어라/我懷漫漫

아마도 그대 넋 알음 있다면/想魂有志

그대 또한 눈물을 줄줄 흘리리/其亦汍瀾

녹으로 내린 술 한잔 들구려/一酌官醪

서러움에 눈물만 줄줄 흐르누나/悲來涕潸



《출전 : 성소부부고 제15권 문부 12 - 제문 祭文》





▣ 김발용 - 전통적인 여인상을 보는 듯 합니다.

▣ 김영윤 -

▣ 김주회 -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솔내 -

▣ 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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