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백 김장군 묘비 (송시열 찬)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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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1-12 16:03 조회1,977회 댓글0건본문
■ 국역 송자대전 9 (1982.9, 민족문화추진회)
p.357
조증요동백(詔贈遼東伯) 김장군(金將軍) 묘비(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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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는 장군에게 멀리서 영의정을 추증하고, 용만(龍灣) 강가에 사당을 세우고 비석을 사당 앞에 세웠으며, 그의 아들에게는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그의 아우 응해(應海)는 형이 입던 옷으로 강상(江上)에서 혼을 부른 다음 그 옷을 가지고 돌아와서 철원 선영의 곁에 묻었는데, 한때 문사(文士)들이 다투어 서로 뇌문(言+ 文)과 만사(挽辭)를 지었다.
그 다음해인 경신년(광해군12, 1620)에는 신종황제가 조서를 내려 증작(贈爵)으로 요동백(遼東伯)에 봉하였고, 그의 처자(妻子)에게 백금(白金)을 하사(下賜)하였는데, 그 고명(誥命)이 중하고도 성대하여 사실이 모두 [충렬록(忠烈錄)]에 기록되었다.
그뒤에는 잠곡(潛谷) 상국(相國) 김육(金堉)이 다시 그 시종(始終)을 거두어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에 편입(編入)하였다. 장군은 신장(身長)이 8척이요 언어가 과묵(寡默)하고 기안(氣岸)이 쾌활했으며, 술은 두어 말씩 마셔도 지기(志氣)가 어지러워지지 않았다. 용력(勇力)이 뛰어나서 나이 18세에 맨손으로 맹호(猛虎)를 격살하였는데, 이때부터 향인들이 문득 장군이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또 황금(黃金)을 마치 흙과 같이 여겼고, 여색을 원수같이 피하였으니, 참으로 걸출하고 훌륭한 대장부였다. 집에 있을 때는 효도와 우애가 뛰어났고 14세에 부모가 모두 돌아갔으나 병란중(兵亂中)이어서 어떻게 장사지낼 길이 없었는데, 이승(異僧)이 있어 슬피 부르짖어 우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장지(葬地)를 가리켜 주어 장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 장사 지내고 제사 지내는 예가 비록 경생(經生)·학사(學士)라도 그보다 더 나을 수 없었다. 아우 응해(應海)와 더불어 농사에 전력하여 스스로 생활을 영위하면서 낮이면 사냥하고 밤에는 병서(兵書)를 읽었다. 그런데 관찰사가 철원에 와서 무사(武士)를 크게 소집하여 무예(武藝)를 시험하자, 장군은 나이가 매우 적었으나 문득 화살을 쏘아 과녁을 쏘아 맞히니, 관찰사가 크게 기특히 여겨 그대로 무과 시험에 나가기를 권하여, 마침내 만력 을사년의 무과에 합격하였고 두 번이나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는데 그 득실(得失)과 숭비(崇卑)에 그저 담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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