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충주 엄정 소재 유물 소개

페이지 정보

김완식 작성일03-11-25 22:20 조회1,726회 댓글0건

본문

경종대왕 태실비



◈위치: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태봉(억정사 대지국사비에서 안길로 1km거리)



엄정면 괴동리(태봉)에 있는 높이2m 폭8m의 비로 숙종14년(1688)2월에 20대 경종대왕의 태를 이곳에 안치하였다. 대왕은 1720년에 즉위하여 4년간 왕위에 있다 세상을 떠나니 영조2년(1726) 9월8일에 영조임금이 선왕의 태실을 돌로 깎은 8각형 난간을 두르고 이 비석을 세우는 등 웅장하게 꾸미고 순호군16명을 두어 3년마다 제사를 지냈다.

일제시대에 조선 총독부는 태실의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1928년에 전국의 태실을 창경원 안으로 옮기니 경종태실도 이때 태를 담았던 항아리는 꺼내가고 석조물만 남아 있던 것을 중원군(통합전 충주시)에서 1976년 다시 세웠다.

(충청북도 지방 유형문화재 제6호 1975.8.20.지정)



엄정 하마비



엄정면 괴동리(비석부락)에 있는 높이 0.66m 폭 0.33m의 비로서 누구든지 그 앞을 지나갈 때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비석이다.

궁궐,종묘,문묘 또는 왕이나 성현의 탄생지나 묘소 앞에 세워 지나다니는 사람으로 하여금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게 하였다.

태종3년(1413)에 종묘와 대궐문 앞에 처음으로 세웠다.

괴동리의 하마비도 조선 경종임금의 태실이 있는 태봉아래에 세워져 있었는데 일제때 허물어졌었으나 괴동리 마을 회관을 세울 때 지금의 지리에다 옮겨 다시 세운 것이다.



엄정면 신만리 부도



엄정면 신만리 족동 부락에서 신흥사로 가는 길의 산 언덕 뽕나무 밭에 부도가 놓여졌던 기단석(길이 1.68m)과 부도탑을 덮었던 옥개석만이 흙에 묻혀 있으나 이 부도탑의 일부로 보이는 8각형의 받침돌(한면의 길이 0.4m 높이 0.6m)이 마을 앞 개천의 제방 밑에 반쯤 묻혀 있고 또 한 개의 돌은 엄정면 목계리에 있다.

보기 드물게 큰 부도이다.



엄정면 목계 돌탑



엄정면 목계리 부흥사 부근에 있으며 작은돌(벽돌크기 정도 보다 작은)들로 쌓아놓은 것이다.(높이 약8m 둘레 약13m)

이 돌탑의 동편쪽으로 사람이 앉아서 드나들 크기의 출구가 있고 그 안에 "부흥산신"이라고 새겨 놓은 비석이 있다.

보통의 탑의 모양으로 쌓은 것이 아니라 돌의 무더기로 볼 수 있다.

최봉출이란 사람이 쌓았다고 하는데 이 탑의 옆엔 부흥사라는 절이 자리잡고 있다.



유인석 신도비



엄정면 신만리에 있는 비로서 유인석(1842-1915)은 유학자이며 의병장으로 유명한데 고흥 유씨였다.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이후 김홍집 내각에 적극 반대하여 의병항쟁으로 충주와 제천등지에서 싸우다가 만주로 갔다.

1910년 한일 합방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만주에서 죽었다.

1962.3.1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엄정면 추평리 3층 석탑





우리나라의 많은 지명들이 옛 유적과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유적지를 찾고 확인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 지명 또는 전설등이다.

엄정면 추평리 탑평 마을의 3층석탑은 이 탑이 있었기에 마을 이름이 탑평으로 유래가 되었다. 추평리 3층 석탑은 현재의 위치가 원위치였는 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어윤입씨의 밭 가운데 세워져 있으며 대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높이가 2.25m인 이 탑은 상륜부가 상실되었고 3층 옥개석 위에 둥근 석재가 하나 올려져 있고 옥개석의 전각이 상당히 경쾌한 반전을 보인 형태이고 전각 사방에는 풍경을 달수 있도록 만든 풍경원공이 있으며 탑신은 높이가 낮은 장방형인데다가 낙수면이 급경사의 형태를 이루고 고려 중기 시대에 조성되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초층기단부는 현재 매몰되어 있어 확인할 수 없으나 기단석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는 듯 보여지고 탑신에는 양 우주가 조각되어 있다.

현재 탑의 위치에서 300m쪽 산상봉에 사지가 있으나 사찰명등이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고려 때의 전형적인 기와 무늬인 파초문 와당등이 많이 출토되고 있으나 기와나 토기등이 붉은 색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아 연전에 불탄 흔적을 보이고 있다.

추평리 3층탑을 고려중기 시대에 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선 사지나 탑 주위에서 고려 때의 기와편들이 출토되고 있고 탑의 균형이 높지 않은 장방형의 형태로서 조성수법이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확실시 되고 있는데 특히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변화가 8세기 후반기부터는 탑의 규모가 소형탑으로 변모해 가는 뚜렷한 건축양식의 변화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억정사 대지국사비 (보물제 16호) - 이 비석 바로위에 저희 안동김문 의 묘역이 있습니다.



◆ 위 치 : 충북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에 소재하고 있는 이 비는 조선 태조 2년(1393년)에 의정대부 박의중이 쓰고 승려 혜공이 조각하여 동 년 10월에 중원이 세운 것이다.



국사의 법명은 찬영,자는 고운이며 속성은 청주 한씨로서 고려 충숙왕 15년(1328년)에 출생하였다.14세에 중흥사에 들어가 원광국사에게서 5년간 법을 배우고, 26세에 승과에 장원하였다. 32세에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양가도승록 대사가 되었다가 수년 후 특명을 받아 석남사,월남사,신흥사,운문사 주지등을 역임하고 45세에 왕이 내원으로 맞아 들여 "정지원명"(국일선사)이라고 호를 내리고 가사를 하사하였다. 47세 때 공민왕이 승하하자 속세를 피해 생활하려 하였으나 새로운 왕이 만류하고, 왕명으로 "대선사"를 하게 되었다.



50세에 보개산에 들어가고 다음해에 가지사와 태자산 주지를 하였으나 모두 왕의 뜻에 의한 것이 었다. 56세에 왕사로서 조계종 존자라 명을 내리고 억정사에 맞아들이게 하였다.

다음해에는 증흥사에 원중국사비를 세웠고 58세에는 왕이 광명사로 맞아 들였다.



신왕이 즉위한 후에도 전번 임금의 대우와 같이 섬겼으며, 같은해 10월 흥성사로 옮긴 뒤에 왕명으로 "억정사"에 머물게 하였으며, 공양왕2년(1390년)에 63세로 입적하였다

왕은 지감국사라는 시호와 함께 탑의 이름을 혜월원명이라 하고 후하게 장사 지내었다.



이 비석은 간단한 것이 특징이다. 비석의 덮개없이 비의 위쪽 좌우만 약간씩 잘라내는 형식으로 고려 말에서 조선초기를 거치는 과도기의 특색을 보여 주고 있다.



비의 글은 비석 4면에 해서체로 새겨져 있고,끝에는 국사의 동문들과 속세의 문도이름 및 충주목사까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광범위한 체제로 비석이 세워 졌음을 알 수 있다.

비석의 높이는 290cm이고, 폭 125cm, 두께25cm의 광해석으로 만들어 졌다.





백운암





엄정면 괴동리 백운산 중턱에 있는 이 절터의 부근에 조선19대 경종대왕의 태실비가 있어서 일명 "태봉절"이라고 부르는 절이다. 이 절은 임오군란(1882년)으로 중원군 노은면까지 피신을 했던 고종황제의 왕후인 민비가 무사히 서울로 돌아갈 것을 예언했던 무당에게, 민비가 환궁한 후 진령군 여대감의 칭호와 함께 이 절을 짓도록 하여 주었다고 한다. 대한불교 법주사 본산에 속해있는 암자이다.

또 여기에는 1개의 반자(흔히 "바라"라고 불려지는 종의 한 종류로서 "징"같이 생겨 사찰에서 공양시간등을 알리는데 사용되는 기구)는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귀중한 유물이다. "반자"는 신라 때 까지는 금구라고 불렸고 고려 때 와서 금구외에 다른명칭으로 불리게 되니, 반자(飯子)라고 쓰여진 유품은 현재 7-8점뿐인 귀중한 유품이다. 백운암에 있는 반자는 직경이 43cm 후폭이 10cm인데 표면의 장식으로는 5개의 연과를 가진 자방(둥근원의 테)이 있고 그 주변을 12판의 연화문을 돌렸고 그 밖으로 3줄기의 돌기선을 그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측면에 점선으로 글자를 파는 명문이 있어 주조 연월일과 시납의 사찰명등을 밝혀주고 있는데 아주 귀중한 유품이다.

백운암 반자에 대하여는 앞으로 조사연구가 되어야겠으나 우선 현재의 형태로 보았을 때 조식이 단정하고 주조기술도 우수하거니와 위와 같은 명문이 기록된 점을 보아 빨리 보호되어야 할 것이다.

연화문등의 조각수법을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이 확실한 것으로 우리지방에서는 보기드문 귀중한 불교미술품이다.

한편 이 백운암에는 고려시대의 철조불상이 있어 지방 유형문화재로 지정받고 있고 많은 탱화도 갖추어 있었으나 서울의 모대학으로 옮겨가고 현재는 신작탱화가 있을 뿐이다. 현재의 사찰은 조선왕조 고종 23년에 건립된 작은 규모의 암자이나 이곳은 옛부터 내려오는 불교유적지임에 틀림없다.



괴동리 백운암 철불좌상





엄정면 괴동리에 있는 백운암은 1886년 고종23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는 작은 암자인데 이곳에 철제불상이 본존불로 안치되어 있다. 그런데 이 철불상은 충주시 대원사와 단호사에 있는 철불상과는 그 형체나 조각수법을 전혀 달리하고 있다. 이 철불상은 지금까지도 개금불사하여(황금색으로 표면을 칠한 것) 철불상 본래의 모습은 불 수 없으나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갖춘 훌륭한 불상이다. 이 철불상의 얼굴은 양볼에 약간 살이 올라 풍만한 상호를 가지고 있고 나발에 육계는 있으나 약간 작게 표현되었다.

양쪽귀는 어깨에 닿지 않고 있고 눈은 반쯤 떠서 일직선을 그렸고 눈두덩이는 부은 듯이 보이고 있다.

얼굴에 비해 코는 크게 보이며 입술은 얇은데 입가에 미소가 없으므로 무표정하게 보이며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목에는 3줄의 표현이 나타난다. 당당한 어깨에 비해 허리는 가늘고 법의는 우견편단인데 법의가 얇아서 풍만한 가슴과 인체의 윤곽이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양손의 형태는 좌측 손은 무릎위에 얹어 손가락 모두를 밑으로 향하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였는데 장지를 약간 구부린 모습이다.

얼굴과 손의 형태등을 정확히 볼 수 없어 존명(부처의 이름)과 제작연대등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인체묘사 등이 대원사의 철불보다 착실함을 보이고 있고 또 보물 513호인 영천의 선원동 철불상과 매우 흡사함을 미루어 볼 때 이 철불상의 제작연대는 대원사나 단호사의 철불상보다 약간 앞선다고 느껴지므로 이 철불상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전체높이 0.76m 얼굴높이 0.27m 어깨폭 0.44m 가슴폭 0.3m 무릎높이 0.16m 무릎폭 0.65m인데 이 철불상의 원위치는 현재 보물 16호인 대지국사비가 있는 엄정면 괴동리의 억정사지로 구전되고 있다.







신흥사





엄정면 신만리 장병산 중턱에 있는 절로 이 절이 있는 골짜기를 "독작골"이라고 하며, 흔히 독작골 절로 알려져 있다.

일제시대에 이 절에서 나온 금으로 만든 종을 신고하여 조선 총독부에서 보상금으로 받은 돈과 주민들의 기부금으로 세웠던 초가집을 헐고 지금의 건물(함석집)을 지었다고 한다(1924년)



고여 불조묘



엄정면 가춘리(춘정)에 있으며 조선 개국공신 고성군 고여의 신주를 모신 곳이다.

조선 태조의 명으로 불조묘를 세웠는데 사당과 보관하고 있던 교지는 6.25동란때 불타 버렸는데 1979년 후손들이 추평리 저수지 근처에 다시 정면 2칸 측면 1.5칸의 목조기와집을 세웠다고 하며 고여는 조선태조의 상장군으로 3등 개국공신으로 봉해졌었다.















▣ 솔내 - 계속되는 자료 소개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 김윤식 -

▣ 김항용 - 님의 노고 덕에 엄정의 역사 유물 잘 감상하고 있습니다.

▣ 김윤만 -

▣ 김태서 - 자료 소개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