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湖西士林과 우리가문 12 --- 山林이란 정치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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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1-28 06:08 조회1,788회 댓글0건본문
■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2001.3-11쇄, 이덕일, 김영사)
P.89
山林이란 정치세력
효종이 즉위할 무렵 조선에는 특이한 성격의 정치세력 하나가 존재했다. 山林이라 불리는 정치세력이었다. 시골의 서원 등에서 講學하는 道學者를 산림학자 또는 山林養德之士 라고 일컬은 데서 비롯된 말이 산림이었다.
이들은 과거를 통한 출시는 포기한 채 학문만을 닦았다. 인조반정이후 정국에 미치는 이들의 영향이 증대하면서 하나의 정치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어떤 측면에서 이들은 벼슬에 뜻이 없어서 과거를 보지 않았다기보다는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벼슬길에 나갈 수 있기 때문에 과거를 보지 않은 측면이 강했다. 조선 후기 들어 그만큼 이들 산림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들이었다.
산림의 의견이 중요하게 된 이유는 이들이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정통 서인세력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인조반정은 이이의 제자들이 주도한 정변이었다. 학파가 정파가 되는 조선 정치의 특성상 반정주도 세력으로서는 이이의 학통을 이은 산림세력의 지지 여부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반정 직후 집권 세력들이 비밀리에 두 가지의 국정운영 원칙을 정해 놓았다는 소문이 朝野에 나돌았다. 그 하나는 國婚勿失이고 다른 하나는 崇用山林이라는 것이었다. 국혼물실은 글자 그대로 國婚은 빼앗기지 않겠다, 즉 왕비는 서인 집안에서만 내겠다는 뜻이었고, 숭용산림은 산림을 높여 등용하겠다는 뜻이었다. 바로 숭용산림이란 쿠데타 정권의 국정운영 원칙 덕택에 이들 산림들은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산림의 종주인 사계 ★김장생은 과거를 보지 않았으나 인조반정후 사헌부 장령, 집의 등 대간직을 제수 받았으며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도 과거를 보지 않은 몸으로 대사헌을 역임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들 산림은 이미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효종때 산림의 영수였던 김집 휘하에는 兩宋으로 불리던 ★송시열, ★송준길과 초려 ★이유태, ★유계, ★윤선거 같은 쟁쟁한 제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송시열과 송준길은 쌍청공 ★송유의 자손으로 친척간이었다. 송시열은 여덟살 때 한 살 위인 송준길의 아버지 ★송이창에게 사사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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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이후 인조와 효종은 이들 산림 세력에게 거듭해서 관직을 제수했다. 김집이나 송준길도 그랬지만 그 대표적인 인물인 송시열을 예로 들면 첫 관직에 나서는 인조11년 (1633) 27세 때부터 사망하는 숙종15년(1689) 83세 때까지 56년간에 걸쳐 네 임금이 그를 부른 횟수는 무려 167회였다.
그러나 송시열이 이에 응한 것은 37회에 불과했다. 그는 제수되는 벼슬을 거듭 거부함으로써 그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한껏 높일 수 있었다. 벼슬에 뜻이 없어서 출사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송시열을 조선 역사상 최대의 당쟁가라고 말하지만 그가 조정에서 벼슬한 기간은 불과 몇 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우상과 좌상에 세 번 제수되었으나 그가 조정에 출사해 정승의 임무를 수행한 날은 49일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기간은 고향에서 학문을 닦고 문인들을 길렀다. 그리고 배후에서 집권당인 서인과 노론을 조종했던 것이다.
병자호란으로 결정적 타격을 입은 인조, 그리고 둘째 아들로서 소현세자의 장남 석철의 자리를 차지한 효종으로서는 산림의지지 여부가 왕권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지주가 되므로 이들에게 자주 벼슬을 제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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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명분의 하자를 안고 즉위한 효종에게 산림의 지지는 중요한 것이었다. 효종이 즉위하자 당시의 실권자들인 ★김자점과 ★원두표, ★이후원 등이 앞다투어 산림 인사들의 중용을 권유한 것도 자파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효종 즉위 초의 정국은 낙흥부원군 ★김자점의 洛黨과 원성부원군 ★원두표의 原黨으로 나뉘어 있었다. 원당과 낙당은 산림의 지지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산림을 추천한 것이다.
이런 이유들이 중첩되어 효종은 ★김집과 ★송시열, ★송준길 등 산림을 대거 불렀고 이들은 드디어 사양하는 자세를 버리고 영수 김집을 필두로 대거 출사해 조정에 나왔다.
그러나 山黨은 낙당이나 원당은 물론 국왕 효종의 들러리나 서기에는 이미 너무 커져 버렸을 뿐만 아니라 당 자체의 정치적 야심도 이들보다 작지 않은 정치세력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성리학적 명분론으로 무장된 학자적 정객이기도 했다.
★김자점의 낙당과 ★원두표의 원당은 모두 산림을 자파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막상 산림은 낙당과 원당 모두 부패 정치세력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김집과 송준길은 사헌부, 사간원등 자파의 大諫을 동원하여 당대의 실세인 김자점과 그 黨人들을 탄핵했다. "나라를 미혹케 하고 조정을 잘못 이끌었다는 이유(迷國誤朝)"다. 이들은 김자점과 그 당인들인 전라감사 이시만 등을 몰아냈다.
산림은 김자점의 낙당뿐만 아니라 원두표의 원당에 속한 예의 이행진과 승지 이시해 등을 탄핵시켜 파직시켰다. 원두표의 집을 출입하면서 압객(狎客: 서로 예의를 차리지 않는 친밀한 사이)으로 불려도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출사한 산당은 마치 중종 때의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가 그랬던 것처럼 거침없는 공세를 취했다. 초야에 있었다는 선명성과 이이의 학통을 이었다는 정당성을 무기로 산림이란 정치세력이 조정에 등장한 것이었다.
▣ 김윤만 - 거침없는 공세를 취했다. 초야에 있었다는 선명성과 이이의 학통을 이었다는 정당성을 무기로
▣ 김윤식 - 주회 대부님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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