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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의 주변인물들(75)원종-3- 원종이 친몽정책을 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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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4-01-06 21:04 조회1,5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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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탐구 - 원종의 친몽정책 title_back3.gif title_logo.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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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row3.gif 원종이 친몽정책을 편 이유는?
고종46년 태자의 입조 이후 원의 고려에 대한 무력침공이 일단 종식되고 고려와 원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원에서는 헌종이 죽고 세조가 즉위하며 고려에서는 고종이 죽고 원종이 즉위하였다.
원은 정복지의 진무와 군주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군사적 시위가 필요하고 징수된 물자의 수집ㆍ보관을 위해 창고가 요구되었으며, 군주의 의사를 신속하게 전달하고 집적된 재화를 중앙으로 운송하는데 역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이를 고려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전란과 흉년으로 인해 군사와 양식 운수는 불가능하다고 사신을 보내 전하였다. 이에 원은 고려에 대해 강압적으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려 국왕의 친조를 요구하였는데, 이것은 국내 정치상황 변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고려 국왕의 친조에 대해 재상들과
김준의 입장은 불가하는 쪽이었다. 재상들은 고려왕실의 권위를 생각해서 반대했겠지만, 김준은 국왕의 친조로 인하여 원이 자신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입지가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하여 반대하였을 것이다.
국론이 반대쪽으로 기우는 듯 하였으나 평장사 이장용 등이 고려 사직을 보위하기 위해 국왕이 친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원종은 전국적으로 백금을 거두고, 참형과 교형 이하의 죄인을 사면하고 친조하였다.

친조 이후 국왕과 그 측근세력은 가능한 한 원과의 마찰을 피하고 원의 요구대로 진행해갔다. 원종7년 11월 원이 세력을 일본에까지 뻗치려는 목적으로 흑적(黑的)ㆍ은홍(殷弘) 등을 일본에 보내어 사정을 탐색하는데 고려의 호위를 요구하였다. 고려는 추밀원부사 송군비와 시어사 김찬 등을 흑적과 함께 일본에 동행하게 하였으나 풍파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원 세조의 더 많은 요구를 초래하였다. 원종8년 8월 원이 일본에게 조공을 요구하였는데, 이에 고려가 끼어드는 것이 고려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이장용은 판단하였다. 그래서 흑적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에게 봉서를 독촉하지 말고 일본이 판단하여 행동하는대로 기다리자고 하였다.
그런데 원과 고려정부는 각기 일본에 화호를 강요하는 내용의 국서를 전달하였다.
원종9년 12월 지문하성사 신사전(申思佺)ㆍ시랑 진자후(陣子厚)ㆍ기거사인 반부ㆍ흑적ㆍ은홍 등을 일본에 보내고 이듬해 3월 이들은 대마도에 이르러 왜인2명을 잡아왔다. 원은 이들에게 일본의 조회를 요구하고 방면하였다. 반면 원은 고려에 대해 탐라로 하여금 100척을 만들도록 하고 일본침공을 서서히 준비하였다.

원은 일본에 대해 조회요구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자 원종9년부터는 내정간섭의 강도가 더욱 심해지기 시작했다. 육사(六事)의 조속한 실천과 김준 부자와 아우 김충 등을 연경에 오도록 하였다. 이후 김준을 비롯한 집권무인세력의 대몽고정책은 항몽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김준은 원의 문책이 두려웠고 그 해결방안으로 장군 차송우의 의견에 따라 사신을 죽이고 더 먼섬으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원종의 입장에서는 무인집권자에 대한 몽고의 문책을 국왕권 회복의 좋은 기회로 포착하고는 김준의 제안에 반대하였다. 결국 김준은 원종과 그 측근세력에 의해 제거되었다.
한편 일반 관료세력들은 원과의 타협을 통해 사직을 보위하려 하였다. 원에 간 이장용은 원의 터무니없는 군사징발 요구에 특유의 외교능력을 발휘하였다. 원에 일질로 있던 왕준(王?)이 고려에 5만 군사가 있다고 허위보고 하자, 원 세조는 1만명만 고려에 머물러 국가를 호위하게 하고 송과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 4만군대의 지원병을 착출할 것, 전함 1천척과 쌀 3-4천석을 실을 수 있는 큰 배를 만들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이장용은 허위보고한 사실을 밝히고 고려에 4만의 군대가 있었으나 30년간 전란과 역질로 다 죽고 백호ㆍ천호의 직이 있으나 이름뿐이며 원과의 전쟁이 종식된 이후 살아 성장한 사람들은 겨우 9-10살에 불과하다 하여 징병의 곤란함을 설명하였다. 이장용이 원에 입조하여 세조의 무리한 요구를 경감시켜 최소한의 소극적 협조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준제거라는 고려의 정치국면 변화는 원의 고려간섭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무인집권자들의 항몽정책은 군사적으로는 별초군에 의존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은 왕정복고를 정변의 명분으로 하였으나 몽고의 간섭이 심화되면서 무인정권에 위기의식을 느끼자 항몽으로 고려 종묘사직을 보위한다는 명분 전환으로 항몽을 견지하였다. 따라서 일반민들도 초지일관했던 항몽에서 오히려 투몽하는 모습들이 나타나 집권무인들의 항몽책에 이반하고 있었다.
국왕과 그 측근세력은 물론 원에 의지하여야 했기 때문에 원의 요구대로 출륙환도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관료세력은 이미 세계강대국으로 성장한 원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국익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이와 같이 항전, 강화, 출륙환도가 이 시기 중요현안 문제로 부상하였고 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정권의 존폐가 달려 있었다.
원의 세조 즉위 이후 대고려 관계가 무조건 살육과 약탈에서 어느정도 회유책으로 변화되며 고려에서도 최씨집권의 종말 이후 왕과 일반 대신들 사이에서는 원과 마찰하지 않으려는 모습들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김준과 이후
임연세력들에 의해 원종이 폐위되었는데, 원의 도움으로 원종은 복위되었다. 원종의 복위 이후 원종과 그 측근세력들은 자시 활기를 띠며 정치활동을 재개하였으며, 이제는 원과 국내 대신들의 지지기반으로 국왕권을 확실하게 회복하였다. 그래서 원종은 더욱 친몽정책을 구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 김윤식 -
▣ 김태서 -
▣ 김항용 -
▣ 김윤만 -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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