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향(1243-1306) ▶ 밀직부사 부(孚)의 아들로 어머니는 강주우씨이며, 흥주(興州: 지금의 경상북도 풍기)의 죽계 상평리에서 태어났다. 원종1년(1270)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이 되고 직한림원이 되었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그는 정동행성의 원외랑을 지냈고,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도 세 번이나 갔다가 왔다. 이때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그려가지고 돌아왔다. 1303년 김문정을 중국 강남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ㆍ악기 및 육경ㆍ제자(諸子)ㆍ사서ㆍ주자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이듬해 5월에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박사(博士)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육영재단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서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같은 해 6월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셨다.
▶ 1306년 9월12일 64세로 죽었다. 그의 유학발전에 끼친 공적으로 말미암아 조선 명종때 문묘에 배향되었다. 당시 원나라에서의 주자학의 보편화와 주자서의 유포등에 따른 영향도 있었지만, 그가 여러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왕래하여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또 직접 주자서를 베껴오고 주자학의 국내보급을 위해 노력하여 유학이 크게 일어났다. 주자학을 처음 받아들인 사람으로 그를 주목하고 있지만, 그가 수용한 성리학의 사상내용은 자료가 부족하여 알 수 없다.